나는 정이 없다, 란 소리를 참 많이 들었다. 정은 따뜻함이니, 정이 없다는 말은 그만큼 차가운 인간이란 의미다. 내게 정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엄마, 아내, 동생. 그러니 정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도 쉽지 않다. 가끔 엄마의 말에 반박이라도 하려면, 어느새 엄마는 ‘니가 6살 때 말이지’ 로 시작하는 오래된 근거를 끄집어낸다. 엄마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어느 날 집 앞 동네를 지나고 있는 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웅성하고 있더란다. 엄마가 가서 살펴보니 한 아이가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울고 있었던 것. 주위 사람들은, 뒤집어진 자전거와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주변에 엄마 안계시나’ 라며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또래의 아이를 둘이나 둔 엄마는 놀라서 달려갔다. 역시나 얼굴에 찰과상을 입고 우는 아이는 내 동생이었으며, 뒤집어진 자전거는 내 자전거였다. 놀란 엄마는 주변 사람들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며 주변을 살폈다. 근데 넘어진 동생 주변의 인파 사이에서 낯익은 꼬마아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그 꼬마, 바로 나였다. 동생이 넘어져 울고 있는데, 주변 어른들이 ‘이 아이 엄마 안계시냐’ 며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형이란 아이는 행인들 무리에 파묻혀 남의 일 구경하듯 서있었던 것이다. ‘넌 정말 어렸을 때부터 정이 없었어.’
안타깝게도 정 없는 내 모습의 가장 큰 피해자는 부모님이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아들들이 그러겠지만, 난 부모님께 살가운 말 한 번 건네지 않는다. 오랜만에 집에 가서 ‘아버지 요즘 일이 많이 힘드시죠?’ ‘엄마, 요즘 건강은 괜찮아?’라고 말하면 좋으련만, 고작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곤 ‘엄마 배 안 고파’ ‘아빠, 이제 가야 되요’가 전부다. 그렇다고 부모님 방에 살짝 들어가 무뚝뚝하게 ‘엄마 용돈 써’ ‘아빠, 이 영양제 함 드셔보셔’라고 말하는 유형도 아니다. 결혼 후에는 예전처럼 자주 뵙지도 못하는데, 여전히 내 행동은 사춘기를 막 지나고 있는 중학생과 다를 바 없다. 일요일이면 아버지는 성당에 사시다시피 한다. 일요일에야 겨우 쉴 수 있는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을 자주 뵙지 못한다. 안타까운 아버지는 아들이 미사 보러 성당이라도 올 때면, 어떻게 서든 짬을 내 아들에게 다가와 자주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을 쏟아낸다. 손도 잡고 다 큰 아들의 얼굴도 만지고 싶어 하는 눈치다. 하지만 아들은 매몰차다. ‘오늘도 하루 종일 바쁘시네요? 점심은 아침을 늦게 먹어서요. 그럼 갈게요.’ 아들의 입에선 언제나 ‘갈게요’다. 그놈의 ‘갈게요.’ 뭐가 그리 바쁜지.
소설가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을 읽으며 부모님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매우 낯선 경험이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가 쓴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을 읽던 김연수가 눈물을 흘리던 부분을 읽다가 벌어진 일이었다. <사람답게 사는 즐거움>은 생선 먹을 때는 젓가락으로 뒤집고, 손에 음식이 묻어도 빨지 마라 등의 에티켓을 적은 딱딱한 책이다. 그런데 수많은 금기 사항 을 얘기하다 갑자기 이덕무가 어머니가 살아계실적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야기하며 ‘지금은 네 분 숙부가 다 작고하고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으며, 아버지만이 홀로 계시는데, 때로 그 일을 말씀하실 때마나 눈물을 흘리지 않으신 적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부분이 나온다. 하지만 아버지가 눈물을 흘릴 때 옆에서 함께 눈물을 흘렸을 이덕무를 상상하는 김연수의 글을 보자, 그 무덤덤한 한 문장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셨으며’가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건조한 문장 위로 정없는 아들에 홀대 당하는 우리 부모님의 부재가 순간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덕무가 쓴 에티켓은 전부 어머니가 그에게 하시던 말씀이었다. 결국 이덕무는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하나하나 적으며 어머니를 그리워하고 슬퍼했던 것이다. “폐병이란 것은 기침병이다. 지금도 슬픈 생각에 고요히 귀기울이면 우리 어머니의 기침소리가 은은히 여태도 귀에 들려온다. 황홀하게도 사방을 둘러봐도 기침하는 내 어머니의 그림자는 또한 볼 수가 없다. 이에 눈물이 솟구쳐 얼굴을 적신다. 등불에게 물어봐도 등불은 말이 없는 것을 어이하리”
이덕무는 어머니의 기침소리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깨어났다 죽어도 다시 들을 수 없는 그 소리. 그 문장을 읽으며, 난 엄마가 세상에 없을 때 엄마의 어떤 모습을 그리워할까 생각했다. 아들에게 밥을 주기위해 부엌에서 수선을 떨던 엄마의 얼굴이 가장 많이 보고 싶지 않을까. 일본의 하이쿠는 5.7.5의 음수율을 가진 정형시인데, 여기엔 매미소리 은유가 많이 나온다고 한다. ‘한적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소리야’라는 식이다. 다음은 하이쿠에 대한 김연수의 설명이다. ‘삶의 여백이자 죽음의 적막을 언어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어 귀를 때리는 한여름 매미소리를 역설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매미소리가 천지를 울리다가 문득 멈춘 상태. 그 찰나적인 상태가 바로 견딜 수 없는 삶의 여백이자 죽음의 적막이니까’ 아. 고작 17음자로 죽음을 얼마나 탁월하게 형상화해낸 문장인가. 그렇다. 죽음은 적막이다. 부모님이 떠나시면, 엄마의 경망스런 웃음도, 아빠의 이유 없는 짜증도 다신 들을 수 없다. '밥먹고 가라' 며 붙잡는 엄마의 말도, '자주 집에 들르라' 는 아빠의 말도 모두 침묵 속에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풍수지탄이라. 이덕무의 글을 읽으며 부모님의 부재를 떠올렸고, 하이쿠에 묘사된 적막의 공포에서 죽음의 슬픔을 느꼈다. 정이 없는 내 행동이 부끄러워진 것은 물론이다.
헬스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는 데, 한 아저씨가 내 옆에서 러닝머신을 하고 있던 학생에게 다가왔다. 둘은 부자지간이었다. 아버지는 주름이 깊게 팬 게 나이가 꽤 많아 보였다. 조용히 늦둥이에게 다가온 아버지가 말한다. “OO야. 아빠는 찜질방에서 기다릴테니까 끝나면 와. 같이 샤워하자” 하지만 아들은 러닝머신에 달린 TV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한다.
“나 늦게까지 할 거야”
“언제까지 할 건데?”
“몰라. 늦게까지 계속 할 거야”
아버지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아들을 잠시 멍하게 바라보더니.
“늦게까지 한다고?”
“응”
“알았어”
아버지는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한 30분이 더 지났을까. 실제로 내 옆 학생은 늦게까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샤워를 하러 들어가는 데 아까 봤던 아저씨가 무료한 표정으로 자전거를 타고 있었다. 아니 그냥 자전거에 앉아 러닝머신을 하는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씁쓸한 표정과 주름을 보는 데, 이상하게 가슴이 너무 아렸다. 어쩌면 그렇게 익숙한 광경인지. 아버지의 주름살 위로 내 아버지의 얼굴이 덮쳐졌다. 간이고 심장이고 다 내주고, 그저 자식들 주변을 맴돌 뿐인 부모님들. 그들의 얄궂은 운명이 슬펐다. 그 날 결국 그 아버진 아들과 샤워를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시간 나면 가장 먼저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적막이 찾아오면 가고 싶어도 못 가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