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mc2
데이비드 보더니스 지음, 김민희 옮김, 한창우 감수 / 생각의나무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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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서점에 갔다 한 과학 잡지를 보고 놀란 적이 있다. 뉴턴이란 잡지였는데, 표지에는 대문짝만한 글씨로 “주기율표 완전도해”라고 적혀있었다. 화학 시간에 어쩔 수 없이 암기해야 했던 주기율표의 완전 도해가 마치 축구 잡지의 ‘호날두, 레알 마드리드 이적 발표’, 타블로이드 잡지의 ‘대마초 피는 브리트니 스피어스 사진 독점 공개’처럼 당당하게 잡지 커버를 장식하고 있다니,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사는 세상 밖에 과학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틀림없이 지구 어느 한 구석에선 이 잡지를 보고 “야 너 서점 가봤어. 드디어 주기율표가 완전 도해됐대.” “뭐라고. 주기율표가 완전 도해됐다고? 이런 도대체 숨어있던 그 원소는 뭐였던거야? 하하.” “몰라. 당장 가서 사봐야겠어.” “나도.”라고 대화를 나누는 소년들이 있을 것만 같았다.


사실 초등학교 시절엔 내가 사는 세계에도 과학은 있었다. 만화로 된 과학 책을 종종 읽곤 했다. 하지만 중학교 때부터 과학과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분명 그 때 내 뇌가 과학적 사고를 하는 데 약간의 장애가 있음을 느꼈던 것은 확실하다. 이해가 안 되니 멀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 하지만 만약 그 때 누군가가 과학에 대한 다른 접근 방식을 내게 알려줬다면 어땠을까? 그러니까 사랑과 전쟁의 신구 아저씨가 있었다면 나와 과학의 결별이 지금처럼 단호하게 이뤄졌을까? 당시 난 과학을 왜 공부해야 하는 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원소와 원자와 분자가 어떻게 다른지, 힘과 속도의 관계가 무엇인지 몰라 헤맸을 뿐.


갑자기 이제 와서 신구 아저씨를 찾고, 예전 과학 얘기를 꺼낸 것은 얼마 전 책을 읽고, 내가 과학을 좋아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다. 그 책은 데이비드 보더니스의 <E=MC²>. 상당히 흥미로운 책이다. 먼저 공식을 구성하고 있는 각 요소에 대한 설명으로 책은 시작한다. 이후 E=MC²의 탄생과정과 성장과정, 그리고 성숙의 과정을 한 인물의 모습처럼 풀어낸다. 마치 E=MC²의 전기 같다고나 할까. 중간 중간에 다양한 일화와 역사 이야기는 10년 넘게 과학과 떨어져 지낸 인문학도의 서서한 적응을 돕는다. 물론 내용이 쉽지 만은 않다. 나 역시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노트에 동그라미 직선 그리기를 반복했고, 책을 다 읽은 지금도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되진 않는다. 하지만 이제 적어도 카메론 디아즈가 프리미어 기자에게 던졌던 질문, ‘E=MC²이 뭐에요?’에는 간단하게나마 대답할 수 있게 됐다.


E=MC²의 업적은 따로 따로 존재하던 에너지의 세계와 질량의 세계를 연결시켰다는 데 있다. 마이클 패러데이가 에너지의 개념 연구의 장을 열고난 후, 이 세상의 모든 에너지는 다른 형태로 전환될 수 있어도 전체 양은 일정하다는 법칙이 도출된다. 마찬가지로 라부아지에의 정확한 측정을 시작으로 지구상의 전체 질량의 총량은 일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 이전엔, 불과 소리 나는 전선, 불빛으로 구성된 에너지의 세계와 나무, 바위, 행성으로 이뤄진 질량의 세계가 엄연히 다른 세계로 여겨졌다. 여기에 아인슈타인은 c, 바로 빛의 개념을 통해 두 세계를 연결시킨다. 아인슈타인은 그 어떤 것도 빛보다 본질적으로 빠를 수는 없음을 밝혀낸다. 수의 세계엔 -273도 -274도 있지만 온도의 세계엔 -273℃가 끝이듯, 빛의 세계엔 670,000,001(빛의 속도 670,000,000mph)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빛의 속도로 날아가는 우주선의 속력을 높이기 위해 에너지를 가하면 어떻게 될까? 아인슈타인은 속도가 늘어나는 대신 질량이 늘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그 결과 c라는 매개를 통해 에너지는 질량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고 반대로 질량도 에너지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게 된 것이다.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공식에 따르면 이제 우리는 모든 물체를 통해 무한한 에너지를 생성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공식 E=MC²에서 M에 1파운드 질량을 넣는다면 뽑아낼 수 있는 에너지는 100억 킬로와트시다. 빛의 속도의 제곱은 448,900,000,000,000,000이다. 원자폭탄의 가공할만한 파괴력은 여기서 온다.)


물론 보더니스의 <E=MC²>를 통해 카메론 디아즈의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성과의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과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더 큰 성과라 할 수 있다. 과학은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열망에서 탄생했다. 이 세상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나? 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무엇인가?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근원은 무엇인가? 등등. 결국 과학은 우리 주변을 구성하고 있는 세계를 이해하는 과정이다. 새로운 법칙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하나씩 미지의 세계를 지워나가는 것이다. 지금도 강원도의 한 연구실에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암흑 물질에 대한 연구가 진행 중이다. 그 물질의 수수께끼를 풀게 되면 우주에 대한 비밀도 한 꺼풀 벗겨지게 된다고 한다. 우주의 비밀을 파헤친다고 가시적인 이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과 우주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그리고 이를 충족시키려는 그들의 순수한 활동이야 말로 과학의 목적이 아닐까.


다시 중학교 시절로 돌아가자. 난 왜 원자와 원소를 배우는 지, 왜 힘의 작용을 공부하는지 몰랐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근본 물질과 법칙들을 알게 되면 중간고사 성적이 올라간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 이 세상의 수수께끼가 풀린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무릇 과학이란 우주와 삼라만상의 법칙을 파헤치는 커다란 정신의 활동이다. 그러니 성적이라는 작은 세계에 갇혀 살았던 내가 과학의 즐거움을 깨달았을 리 만무하다. 지금이라도 ‘주기율표 완전도해’를 보며 즐거워할 사람들을 이해하게 해준 보더니스 선생에게 감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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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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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 니체는 역사에 흐르는 커다란 두 힘을 그리스 신이 빗대어 대해 설명했다. 하나는 아폴론으로 대변되는 이성의 힘. 아폴론은 그리스 문명을 대변하는 합리의 신이다. 아폴론의 이름 뒤에는 태양, 낮, 절제, 질서, 생성, 법률, 규칙 등의 의미가 숨어있다. 또 다른 힘은 디오니소스로 대표되는 감성의 힘.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답게 축제의 신이자 감성이 신으로 불린다. 디오니소스의 이름에는 달, 밤, 자유, 무질서, 혼란, 죽음, 쾌락 등의 상징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 그리스의 연극을 통해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힘을 발견했으며, 반대로 과거 유럽 사회에 흐르는 계몽주의에서 아폴론의 힘을 지적했다. 난 대학교 3학년 때 니체의 이러한 설명을 처음 접했다. 새롭게 눈을 뜬 느낌이었다. 세계를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안경을 얻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후 난 무수한 문학예술 작품 속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상징이 뒤얽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 속에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힘싸움을 통해 일정한 순환 곡선이 그려지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졸업 직전까지 웬만한 리포트는 니체가 설명한 두 신을 이용해 우려먹었으니, 니체가 인문학적 개안과 함께 학점까지 나름 책임져준 셈이다.


어렸을 적 처음 영어 발음기호를 배운 후, 그 틀에 따라 실제로 모든 영어를 읽어보려 한 적이 있었다. 규칙이 적용되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다. 니체로부터 역사를 읽는 틀을 배운 후, 그 틀로 온갖 문학, 예술 작품 읽기를 시도했다. 예술과 문학은 그 시대를 반영한 거울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실제로 니체가 알려준 공식으로 거의 모든 작품을 읽어낼 수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이 미술 영역이었다. 미술작품은 당대의 분위기를 아주 세분화해서 표현한다는데 큰 매력이 있다. 예를 들어 역사는 역사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시간상자 안에 넣어져있다. 때문에 역사책이 말하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1499년 12월 31일까지 중세고 1500년 1월 1일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지 않았듯, 역사는 천천히 변해갔고, 그러한 변화의 흔적은 미술에 아로 새겨져있다. 그 결과 우리는 미술 작품을 통해 어떻게 아폴로와 디오니소스가 긴 시간 대결을 해왔는지 그들의 숨결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다.


미술에서 아폴론적인 요소는 선이다. 선은 미술의 커다란 두 요소 중 형태를 담당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형태잡기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성이다. 때문에 이성이 주를 이루는 시기엔, 형태의 정확한 묘사가 강조된다. 반면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담당하는 것은 색이다. 화가가 자신이 느낀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선 선보다 색이 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성의 강조에 반발하던 시기, 색도 선보다 중시되기 시작한다. 도식화하자면, 이성의 빛이 시작됐던 그리스 문명에선 선이, 종교의 시대였던 중세에는 색이 더 큰 가치를 얻게 되는 식이다. 르네상스 시기엔 이성의 힘이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신에서 인간으로 관심을 돌렸을 때 시대가 목격한 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었다. 대표적인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면 완벽한 구도와 정확한 묘사를 느낄 수 있다. 이성의 시대를 정확히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후기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 엘 그레코의 그림은 조금 다르다. 라파엘로 그림에 비해 구도도 흐트러져있고, 형태도 불명확하다. 당시 엘그레코는 물질적인 세계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감각의 눈, 영혼의 눈에 보이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는데, 그 결과 시대의 가치였던 이성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이후 미술사는 이러한 대립이 훨씬 강조된다. 바로크의 기준에서 볼 때, 아름다움이란 결코 완벽하게 파악되는 형태가 아니라, 모호한 기운을 품고 있는, 그래서 감상자에게 늘 새로운 여운을 남기는, 그런 형태에서 발휘된다. 때문에 바로크의 작품은 형태적으로 르네상스의 작품보다 덜 섬세해 보이지만, 작품의 질감은 더욱 실제와 같아 보인다. 서서히 디오니소스가 웅크렸던 몸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한 순간이다. 프랑스에서 바로크는 디오니소스를 더 극단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한다. 로코코의 시작이다. 미술 평론의 선구자 로제 드 필은 색채를 더 강조하며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고전주의 작가 푸생 보다 바로크 계열의 화가 루벤스를 더 높게 평가한다. 로제 드 필의 말이 권위를 얻으면서 프랑스의 로코코는 바로크 시절보다 훨씬 화려하고 관능적인 그림이 주를 이루게 된다. 결과적으로 바로크와 로코코를 거치면서 형태보다는 색채를 드러내는 방식이 강조됐으며, 디오니소스가 아폴론을 다시 누르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은 다비드를 위시한 신고전주의파와 들라크루아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의 대결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간 대학 시절, 많은 미술 교양 수업을 듣고 미술사 책도 여러 권 읽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지나치게 연대기에 집착하거나 일부 작품 해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 수업도 대부분 특정 주제를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미술사 전체를 조망하긴 어려웠다. 수업과 여러 권의 책을 통해 조각으로 얻은 정보를 통합해줄 책이 필요했다. 적절한 순간 진중권의 새 책 <서양미술사>를 만났다. 최근 나온 <서양미술사>는 그의 다른 미학 저작과 마찬가지로 미술사의 전체를 바라보게 해주는 부감과 함께 세부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클로즈업을 동시에 제공해준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그는 책이나 글을 쓰는 작업이 동시에 놀이의 한 과정이라고 밝혔는데 이번에도 놀이의 흔적이 느껴진다. 미술사의 공시적 영역(학문이 다루는 문제 영역을 분류하여 제시하는 부분)과 통시적 영역(학문의 변천과정을 서술하는 부분)을 교차시키며 미술사를 다루고 있다. 이중독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진중권다운 기지다. 수많은 미학서적을 쓰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사실을 담아내는 그를 보며, 그의 방대한 지식에 놀라울 따름이다. 혹시 미술사에 대한 책을 하나 찾고 있었다면 주저 없이 진중권의 책을 추천한다. 곧 발간될 <서양 미술사> 시리즈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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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아사다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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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의 추천으로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읽을 기회가 있었다. 장편소설에 익숙하지 않았던 나였지만, 두 권으로 구성된 <칼에 지다>를 읽고 당시 엄청난 감동을 받았었다. 그 날 이후 아사다 지로는 내 베스트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런 아사다 지로가 신작을 냈다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금 찜찜하기도 했다. 이번에 새로 나온 작품은 그의 전작 <칼에 지다>와 분위기가 너무 달랐다. <칼에 지다>에서 느껴진 비장하고 장중한 느낌은 그의 신작소설에서 가벼움과 유머로 바뀌어 있는 듯 했다. 조금 주저하며 책을 집었다.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


책의 발상은 그다지 신선하지 않다. 죽은 사람이 자신의 생에 대한 미련을 느끼지 못하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이 기둥 줄거리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들은 자신이 살아있을 때 느끼지 못했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삶은 너무 사랑해서 신을 속여야만 했던 시지프스 신화가 연상된다. 죽은 후에야 무언가를 깨닫는다는 이야기는 메멘토 모리, 항상 죽음이 네 옆에 있음을 명심하라는 깨달음의 경구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렇다. 아사다 지로의 전작 <칼에 지다>도 혁신적인 소설은 아니었던 것처럼,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도 새롭지 않은 소재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아사다지로의 힘이 발휘된다.


비장한 남성미로 무장한 <칼에 지다>도 비평가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감정 과잉의 소설이었다. 아사다 지로 소설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바로 이야기의 감정 과잉을 통해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분출하는 감정이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독자는 아사다지로의 이야기를 허구로 인식하고 감동을 받는다. 뭐랄까. 쇤베르크와 같은 모더니즘 계열의 선구적인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가끔 라디오에서 나오는 뽕짝의 축축한 가사에 가슴이 젖어드는 경험과 비교할 수 있을까. 때문에 아사다 지로의 이야기엔 김훈 소설에서 느껴지는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한 번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을 드라마로 각색한다고 생각해보자. 곳곳에 뚫려있는 구성의 구멍과 비현실적인 설정에 곤란을 겪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점을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아사다 지로는 곳곳에 있는 구멍과 비현실적인 공간에 부여된 자유를 적절하게 이용해 독자의 감정 샘을 꼬챙이로 마구 찔러대기 때문이다. 나에게 아사다 지로의 작품은 일종의 동화(fairy tale)이다. 그것도 아주 매력적인.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도 아사다 지로의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다.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설정의 진부함은 저승의 공간을 공무원 조직으로 표현한 기발한 상상력이 메워준다. (환생의 과정도 유쾌하다.^^) 때문에 죽음은 슬프면서도 유쾌한 상황으로 바뀌고 여기서 아사다 지로는 자신의 능력을 이용, 독자를 울리고 웃긴다. 마치 양 손에 울음과 웃음이라는 줄을 잡고 상황에 맞게 적절히 놓았다 끌어당겼다를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이야기의 흡입력은 현재 최고의 인기 일본 작가로 꼽히는 오쿠다 히데오를 넘어선다는 생각마저 든다.


다만 감정 샘을 찌르기 위해 아사다 지로가 설치해놓은 덫들이 이번엔 전작처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덫으로 독자의 관심을 사로잡으려면 완벽한 위장과 근처에 오면 단번에 휘잡을 수 있는 수단 못지않게 독자를 끌어당길 수 있는 미끼가 필요하다. 그것이 고기던 사탕이던 말이다. 하지만 이번 <쓰바키야마 과장의 7일간>이 놓아 둔 미끼는 덫 안에 들어와 한 방에 사로잡히게 만들 정도는 못된다고 생각했다. 주인공들이 이승으로 돌아와 깨달음을 얻게 되는 상황이 내 가치관 밖에 존재했기 때문일까. 가령, 10년 넘게 혼자 남자를 사랑하면서 절대 그 말을 하지 않는,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는 주인공의 여자, 어머니의 바람을 알면서도 아버지가 친부가 아님을 알면서도 인생을 관조하는듯한 아이, 자신을 버린 부모님을 너무나 쉽게 용서하는 아이 등 환생 후 쓰바키야마가 겪어야 하는 상황이 달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진 것이다. 물론 아사다 지로의 화려한 말발에 쉽고 재밌게 읽히긴 하지만 <칼에 지다>를 읽었을 때 느꼈던 감정의 응어리는 없었다. 특히 쓰바키야마가 자신의 전 여자 친구를 찾아가서 나누는 대화 장면은 내가 혐오해 마지않는 왁스 노래의 지질한 가사를 듣는 듯해서 매우 불편하기까지 했다. 만약 아사다 지로의 신작이 나온다면 난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번 작품에서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그의 스토리텔러로서의 출중한 능력은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의 실망에도 아사다 지로의 다음 소설이 기대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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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8-08-21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물을 뽑아내는 최루성 작품도 많죠. 철도원 등. 감정은 종종 기복을 주는 쪽이 정신적으로도 건강에 좋은 것 같습니다. 리뷰 잘 읽었습니다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 백과사전을 통째로 집어삼킨 남자의 가공할만한 지식탐험
A.J.제이콥스 지음, 표정훈,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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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다 읽었다. 이 책을 서점에서 처음 봤을 때, 아내는 비아냥거렸다.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하룻밤에 읽는~’시리즈, 또는 ‘현대인을 위한 필수 교양’ ‘논술을 위한 절대지식’류의 실용인문서로 오해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인문학마저 실용의 틀 안으로 끌어들인 실용인문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장주의 탈레반 치하에서 살면서도 희미하게나마 인문학에 대한 지적 욕구를 안고 사는 현대인들. 실용주의 인문서는 그들의 순수한 지적욕구마저 얄팍한 효율성의 이름으로 채워버린다고 우리는 믿는다. 때문에 아내는 22권이 넘는 브리태니커를 한 권으로 정리해놓은 듯한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보고 ‘이제 갈 때까지 갔구나’란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 실제로 책을 펴보면 오해살만도 하다. 알파벳순으로 정리된 단어와 그 단어 밑에 있는 설명. 영락없는 사전의 형식이다. 하지만 아내는 책의 첫 장을 펼치고 이내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아악; 고대 동아시아 음악. 가가쿠를 볼 것. 이게 설명의 전부다. 고대, 공, 아시아, 음악, 이렇게 네 단어로 이루어진 설명에 “가가쿠를 볼 것”이라니. 이거 누굴 놀리는 건가!’ 그렇다. <~브리태니커>는 실용서나 사전 요약서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사전의 형식을 빌린 에스콰이어 편집자 A. J 제이콥스의 ‘브리태니커 도전기’다.


그렇다면 600페이지에 달하는 잡지 편집자의 무의미한 도전기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뭔가? 우선 재밌다. 순전히 이 책을 이끌어가는 강점은 제이콥스의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다. 그의 유머는 브리태니커를 읽는 대중잡지 에스콰이어 편집자라는 특성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엥겔스 듀엣에서 존재감이 덜한 쪽이 엥겔스라고 이해해왔다. 19세기 혁명계의 사이먼 앤 가펑클에서 가펑클 쪽이랄까.’

엥겔스를 읽으며 사이먼 앤 가펑클을 떠올리다니. 단순한 유머가 아니다. 소위 학문의 정전(canon)으로 인정받으며 엄청난 권위를 쌓아올린 저서들. 인류에 위대한 공을 세운 위인들. 이들이 갖고 있는 권위를 그가 지닌 대중문화 지식을 이용해 허물어놓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은 마르셀 뒤샹의 기지 발랄한 장난처럼 제이콥스의 사전읽기는 권위를 무너뜨리는데서 오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때로는 대중문화 지식이 필요 없다. 에스콰이어 편집자답게 브리태니커가 쏟아내는 정보들을 에스콰이어 식으로 편집함으로써 2000년 역사의 권위에 조소한다. 이런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브리태니커의 설명을 읽고 내가 내린 심오한 결론은 바로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젊은 여자를 밝혔다.’/ ‘프랜시스 베이컨. 그는 뇌물을 받은 죄로 런던탑에 투옥됐다. 그의 변명인즉, 뇌물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신이 내린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그는 사팔뜨기, 즉 사시 여성에게 성적으로 집착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데카르트가 안쓰러웠다. 17세기 유럽 지식인 집단에 사시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됐겠느냐는 말이다. 차라리 우리 시대에 태어났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고도로 광범위하게 발달한 섹스산업을 감안할 때, ‘사팔뜨기 계집들’ 정도의 제목이 붙은 성인용 잡지나 ‘뜨거운 사팔뜨기닷컴’ 같은 성인 전용 유료 웹사이트가 어딘가 반드시 있을 것 같다.‘

이 외에도 멘사 회원들을 끊임없이 조롱한다.

그렇다고 제이콥스가 시종 일관 집요한 유머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사전을 통해 삶을 관조하는 가르침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물론 도덕, 윤리책의 방식이 아닌 제이콥스의 방식으로 말이다.

 ‘존 다이어. 그는 이런 시를 썼다.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은/ 겨울날의 덧없는 햇살일지니/ 으스대며 힘 자랑 하는 모든 것들은/ 요람에서 무덤 사이일지니” 실망이다. 한편으로 나는 이 시가 현명한 겸손함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시는 나의 냉소적인 성향을 자극한다. 나는 보다 나은 지혜를 원한다.’

곧 이어 그는 E 차례에 있는 전도서(Ecclesiastes)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저자가 인생을 관찰함으로써 확신하게 된 사실은 ‘발이 빠르다고 달음박질에서 우승하는 것도 아니고, 힘이 세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며, 지혜가 있다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슬기롭다고 돈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아는 것이 많다고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더라..(중략).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저자의 충고는 하느님이 준 좋은 것이 있을 대 최대한 그것을 향유하라는 것이다.” 최고다. 정녕 인생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고서야 얼간이 천치 같던 고등학교 친구가 지금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빈 디젤의 화려한 연예계 경력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리고 전도서는 조언까지 제공한다. 아무 수도 없으니 알아서 즐기라는 것이다. 작은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나라면 줄리(제이콥스의 아내)의 웃음소리, 맛있는 양파 소스, 어처구니없이 편안한 우리 집 거실의 낡아빠진 가죽 의자 등등이 있겠다.’

브리태니커를 읽으며 제이콥스는 이처럼 우리 삶이 처한 실존적 비극과 극복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샤르트르와 카뮈가 아닌 제이콥스의 용어로!

사실 역사와 위인, 수많은 발명과 발견에 대한 그의 조소는 끊이지 않는다. 이 또한 그의 위대한 발견이리라. 실제로 인간의 삶이란 것 자체가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니던가. 이러한 인간의 삶들이 조합되어 이뤄진 역사는 오죽이나 부조리하겠는가.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역사를 무수한 단면으로 나눠놓고 이를 기록한 브리태니커에는 엄청나게 많은 비합리와 부조리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제이콥스는 마음껏 조소할 수 있고 비아냥거릴 수 있는 최고의 소재를 발견한 셈이다. 마음껏 자신의 장기를 살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사전을 읽게 된 이유, 그 근원인 지식에 대한 열망, 유식함에 대한 열망을 끝끝내 버리지 못한다는 점.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냉소를 이용해 브리태니커의 온갖 지식을 조소하면서도 자신은 그 지식을 통해 더 유식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말들의 척추골이 24개인데 반해 아랍종 말은 23개 뿐’이란 사실을 요긴하게 뽐낼 상황을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난 책을 읽으며 그가 ‘역시 브리태니커를 다 읽어봤는데 별 소용이 없더라. 그냥 내 낡은 가죽 의자에서 심슨이나 보며 히죽히죽 웃을걸 그랬어’라고 결론내리길 바랐다. 그의 냉소가 결국 브리태니커를 읽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전의 마지막 단어인 지비에츠(zywiec)-폴란드 남중부의 한 도시-를 읽고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나는 지식과 지력이 같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 둘은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아니, 시종 일관 MTV의 비비스앤 벗헤드가 되어 브리태니커의 권위를 헤집고 다니던 사람의 입에서 천 원짜리 지폐의 이퇴계 선생의 말이 나오다니!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통해 단 한 번도 배움의 즐거움을 진지하게 언급하지 않던 저자가 갑작스레 사전을 다 읽고 나니 좀 유식해진 것 같아서 즐겁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서인영이 카이스트에서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결론이다. 물론 끝이 좀 찜찜한 것을 빼면 참으로 유쾌한 책이었다. 아마도 내 기대가 과했던 게 아닌가 싶다. 저자에게 ‘에스콰이어’적인 즐거움에 ‘르몽드’적인 날카로운 깨달음까지 함께 기대했으니. 그 기대를 조금 낮춘다면,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는 친구 집에 놀러가서 친구가 올 때까지 남의 방에서 뒹굴며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기 좋아하는 분들에겐 최고의 책이 아닐까 싶다. (김영하, <랄랄라 하우스> ‘집주인의 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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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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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시절은 너무 힘들었다. 야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탁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인생이 참으로 고통스럽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난 행복도 필요없고 즐거움도 필요없어요. 대신 이런 고통스런 상황도 좀 안 주면 안 되나요? 그냥 즐거움도 슬픔도, 행복도 고통도 없는, 마치 심장 박동기 모니터에 비친 멈춰버린 심장 같은 삶을 주면 안 되냐고요?”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을 견뎌내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나보다 더 괴로운 상황에 놓인 친구를 생각하는 것. 어머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로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친구, 어렸을 적 발병한 병 때문에 매일 병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친구, 가난한 친구, 장애가 있는 친구 등등. TV나 신문을 통해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접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내 삶에 감사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그럴 때면 잠시 조숙한 꼬마 철학자가 되어 인생이 뭔지, 고통이 뭔지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힘든 시절을 이겨내는 나만의 방법도 나름 터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천천히 아이의 허물을 벗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고3 때 김려령의 장편소설 <완득이>를 봤으면 어땠을까. 분명 지금 읽고 받았던 감동보다 몇 배는 더 큰 감동을 받았을거다. (지금 재미없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소설 속 완득이가 처한 상황은 분명 내 고3 시절보다 훨씬 열악했으니까. 게다가 힘든 상황을 대하는, 때로는 덤덤하고 심지어 쿨하기까지한 완득이의 태도. 하늘에 대고 소심하게 중얼거리던 내 태도와 묘한 대조작용을 일으키며 감동 호르몬, 다이돌핀(didorphin)을 무한대로 쏟아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괴로워하던 그 시절에 <완득이>를 읽었다면 조금은 더 오랜 기간 꼬마 철학자로 남아있지 않았을까 싶다. 더 일찍 철이 들었을 것 같다는 의미다. <완득이>는 지금 봐도 무릎을 칠, 삶을 관통하는 번뜩이는 생각이 쉽게 형상화된 작품이다. 일례로 소설 속 완득이의 담임 똥주는 항상 자기 안의 고통을 안고 사는, 겉으로는 덤덤한 척 해도 속으로는 무지 힘들어하는 완득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번, 한 번이 쪽팔린 거야. 싸가지 없는 놈들이야 남의 약점 가직 계속 놀려먹는다만, 그런 놈들은 상대 안 하면 돼. 니가 속에 숨겨놓으려니까. 너 대신 누가 그걸 들추면 상처가 되는 거야. 상처가 되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니 입으로 먼저 말해버려.”

“뭐가요?”

“그 ‘뭐’ 말이야. 새끼야. 니 나이 때는 그 뭐가 좆나게 쪽팔린데, 나중에 나이 먹으면 쪽팔려한게 더 쪽팔려져. 나가 새끼야. 나 졸려.”


고3시절 이 부분을 이해했다면 아마 하늘을 원망하며 힘든 시절을 하루하루 보내진 않았을게다. 오히려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안의 괴로움과 대면했을 것이다. 물론 난장이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칭하는 소설 속의 ‘뭐’와 내 안의 ‘뭐’는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태도 차원에서는 충분히 많은 것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나만의 괴로움을 가슴 깊은 곳에 꼭 넣어 놓고, 하늘을, 세상을, 부모님을 원망하던 청소년. 그 괴로움의 원인인 ‘뭐’에 대해서는 차마 당당히 바라보지 못한 채,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홀연히 나타나 모든 고통을 가져가주길 바랐던 겁 많은 청소년. 똥주의 저 말은 그런 청소년에게 당당히 내 안의 ‘뭐’를 대하고 그 ‘뭐’와의 직접 소통을 통해 극복하라는 철학자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


<완득이>는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은 청소년소설이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란 의미다. 난 <완득이>를 읽는 내내 힘들어하던 고3시절을 떠올렸다. 어두운 골방에 처박혀 삶이 너무 힘들다고 투덜대던 고3의 내게로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져주며 <완득이>를 건내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그 때의 나에게 위로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지금의 나에게도 <완득이>는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완득이>는 잔소리가 아닌, 재치 넘치는 말투로 ‘얘야. 삶을 말이다. 이런거란다’라고 말하는 할머니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이유로 아직 자신이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누구에게나 <완득이> 할머니가 전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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