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 - 백과사전을 통째로 집어삼킨 남자의 가공할만한 지식탐험
A.J.제이콥스 지음, 표정훈, 김명남 옮김 / 김영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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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다 읽었다. 이 책을 서점에서 처음 봤을 때, 아내는 비아냥거렸다.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하룻밤에 읽는~’시리즈, 또는 ‘현대인을 위한 필수 교양’ ‘논술을 위한 절대지식’류의 실용인문서로 오해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인문학마저 실용의 틀 안으로 끌어들인 실용인문서를 좋아하지 않는다. 시장주의 탈레반 치하에서 살면서도 희미하게나마 인문학에 대한 지적 욕구를 안고 사는 현대인들. 실용주의 인문서는 그들의 순수한 지적욕구마저 얄팍한 효율성의 이름으로 채워버린다고 우리는 믿는다. 때문에 아내는 22권이 넘는 브리태니커를 한 권으로 정리해놓은 듯한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보고 ‘이제 갈 때까지 갔구나’란 표정을 지은 것이었다. 실제로 책을 펴보면 오해살만도 하다. 알파벳순으로 정리된 단어와 그 단어 밑에 있는 설명. 영락없는 사전의 형식이다. 하지만 아내는 책의 첫 장을 펼치고 이내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다. ‘아악; 고대 동아시아 음악. 가가쿠를 볼 것. 이게 설명의 전부다. 고대, 공, 아시아, 음악, 이렇게 네 단어로 이루어진 설명에 “가가쿠를 볼 것”이라니. 이거 누굴 놀리는 건가!’ 그렇다. <~브리태니커>는 실용서나 사전 요약서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사전의 형식을 빌린 에스콰이어 편집자 A. J 제이콥스의 ‘브리태니커 도전기’다.


그렇다면 600페이지에 달하는 잡지 편집자의 무의미한 도전기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뭔가? 우선 재밌다. 순전히 이 책을 이끌어가는 강점은 제이콥스의 시니컬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다. 그의 유머는 브리태니커를 읽는 대중잡지 에스콰이어 편집자라는 특성에서 비롯된다. 

‘마르크스-엥겔스 듀엣에서 존재감이 덜한 쪽이 엥겔스라고 이해해왔다. 19세기 혁명계의 사이먼 앤 가펑클에서 가펑클 쪽이랄까.’

엥겔스를 읽으며 사이먼 앤 가펑클을 떠올리다니. 단순한 유머가 아니다. 소위 학문의 정전(canon)으로 인정받으며 엄청난 권위를 쌓아올린 저서들. 인류에 위대한 공을 세운 위인들. 이들이 갖고 있는 권위를 그가 지닌 대중문화 지식을 이용해 허물어놓는 것이다. 모나리자의 얼굴에 수염을 그려 넣은 마르셀 뒤샹의 기지 발랄한 장난처럼 제이콥스의 사전읽기는 권위를 무너뜨리는데서 오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때로는 대중문화 지식이 필요 없다. 에스콰이어 편집자답게 브리태니커가 쏟아내는 정보들을 에스콰이어 식으로 편집함으로써 2000년 역사의 권위에 조소한다. 이런 식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브리태니커의 설명을 읽고 내가 내린 심오한 결론은 바로 다음과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그는 젊은 여자를 밝혔다.’/ ‘프랜시스 베이컨. 그는 뇌물을 받은 죄로 런던탑에 투옥됐다. 그의 변명인즉, 뇌물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이 자신이 내린 판결에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르네 데카르트. 그는 사팔뜨기, 즉 사시 여성에게 성적으로 집착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나는 데카르트가 안쓰러웠다. 17세기 유럽 지식인 집단에 사시 여성이 과연 얼마나 됐겠느냐는 말이다. 차라리 우리 시대에 태어났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고도로 광범위하게 발달한 섹스산업을 감안할 때, ‘사팔뜨기 계집들’ 정도의 제목이 붙은 성인용 잡지나 ‘뜨거운 사팔뜨기닷컴’ 같은 성인 전용 유료 웹사이트가 어딘가 반드시 있을 것 같다.‘

이 외에도 멘사 회원들을 끊임없이 조롱한다.

그렇다고 제이콥스가 시종 일관 집요한 유머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사전을 통해 삶을 관조하는 가르침을 전달해주기도 한다. 물론 도덕, 윤리책의 방식이 아닌 제이콥스의 방식으로 말이다.

 ‘존 다이어. 그는 이런 시를 썼다.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은/ 겨울날의 덧없는 햇살일지니/ 으스대며 힘 자랑 하는 모든 것들은/ 요람에서 무덤 사이일지니” 실망이다. 한편으로 나는 이 시가 현명한 겸손함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한 편으로 이 시는 나의 냉소적인 성향을 자극한다. 나는 보다 나은 지혜를 원한다.’

곧 이어 그는 E 차례에 있는 전도서(Ecclesiastes) 부분에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인다.

“저자가 인생을 관찰함으로써 확신하게 된 사실은 ‘발이 빠르다고 달음박질에서 우승하는 것도 아니고, 힘이 세다고 싸움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며, 지혜가 있다고 먹을 것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슬기롭다고 돈을 모으는 것도 아니며, 아는 것이 많다고 총애를 받는 것도 아니더라..(중략).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저자의 충고는 하느님이 준 좋은 것이 있을 대 최대한 그것을 향유하라는 것이다.” 최고다. 정녕 인생이 그러하지 아니한가. 그렇지 않고서야 얼간이 천치 같던 고등학교 친구가 지금 수백만 달러의 연봉을 받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빈 디젤의 화려한 연예계 경력을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리고 전도서는 조언까지 제공한다. 아무 수도 없으니 알아서 즐기라는 것이다. 작은 것들에서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나라면 줄리(제이콥스의 아내)의 웃음소리, 맛있는 양파 소스, 어처구니없이 편안한 우리 집 거실의 낡아빠진 가죽 의자 등등이 있겠다.’

브리태니커를 읽으며 제이콥스는 이처럼 우리 삶이 처한 실존적 비극과 극복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샤르트르와 카뮈가 아닌 제이콥스의 용어로!

사실 역사와 위인, 수많은 발명과 발견에 대한 그의 조소는 끊이지 않는다. 이 또한 그의 위대한 발견이리라. 실제로 인간의 삶이란 것 자체가 부조리 그 자체가 아니던가. 이러한 인간의 삶들이 조합되어 이뤄진 역사는 오죽이나 부조리하겠는가.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역사를 무수한 단면으로 나눠놓고 이를 기록한 브리태니커에는 엄청나게 많은 비합리와 부조리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제이콥스는 마음껏 조소할 수 있고 비아냥거릴 수 있는 최고의 소재를 발견한 셈이다. 마음껏 자신의 장기를 살릴 수 있는 장을 마련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가 사전을 읽게 된 이유, 그 근원인 지식에 대한 열망, 유식함에 대한 열망을 끝끝내 버리지 못한다는 점.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냉소를 이용해 브리태니커의 온갖 지식을 조소하면서도 자신은 그 지식을 통해 더 유식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다른 말들의 척추골이 24개인데 반해 아랍종 말은 23개 뿐’이란 사실을 요긴하게 뽐낼 상황을 생각하는 것처럼. 사실 난 책을 읽으며 그가 ‘역시 브리태니커를 다 읽어봤는데 별 소용이 없더라. 그냥 내 낡은 가죽 의자에서 심슨이나 보며 히죽히죽 웃을걸 그랬어’라고 결론내리길 바랐다. 그의 냉소가 결국 브리태니커를 읽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사전의 마지막 단어인 지비에츠(zywiec)-폴란드 남중부의 한 도시-를 읽고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나는 지식과 지력이 같지 않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 둘은 가까운 이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배움의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아니, 시종 일관 MTV의 비비스앤 벗헤드가 되어 브리태니커의 권위를 헤집고 다니던 사람의 입에서 천 원짜리 지폐의 이퇴계 선생의 말이 나오다니!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를 통해 단 한 번도 배움의 즐거움을 진지하게 언급하지 않던 저자가 갑작스레 사전을 다 읽고 나니 좀 유식해진 것 같아서 즐겁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서인영이 카이스트에서 공부하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결론이다. 물론 끝이 좀 찜찜한 것을 빼면 참으로 유쾌한 책이었다. 아마도 내 기대가 과했던 게 아닌가 싶다. 저자에게 ‘에스콰이어’적인 즐거움에 ‘르몽드’적인 날카로운 깨달음까지 함께 기대했으니. 그 기대를 조금 낮춘다면, <한 권으로 읽는 브리태니커>는 친구 집에 놀러가서 친구가 올 때까지 남의 방에서 뒹굴며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기 좋아하는 분들에겐 최고의 책이 아닐까 싶다. (김영하, <랄랄라 하우스> ‘집주인의 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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