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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득이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고3 시절은 너무 힘들었다. 야자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탁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인생이 참으로 고통스럽다고 중얼거리곤 했다. “난 행복도 필요없고 즐거움도 필요없어요. 대신 이런 고통스런 상황도 좀 안 주면 안 되나요? 그냥 즐거움도 슬픔도, 행복도 고통도 없는, 마치 심장 박동기 모니터에 비친 멈춰버린 심장 같은 삶을 주면 안 되냐고요?” 그렇게 힘들었던 시절을 견뎌내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은 나보다 더 괴로운 상황에 놓인 친구를 생각하는 것. 어머니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홀로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친구, 어렸을 적 발병한 병 때문에 매일 병원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친구, 가난한 친구, 장애가 있는 친구 등등. TV나 신문을 통해 그 친구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접할 때면, 그 순간만큼은 내 삶에 감사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그럴 때면 잠시 조숙한 꼬마 철학자가 되어 인생이 뭔지, 고통이 뭔지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힘든 시절을 이겨내는 나만의 방법도 나름 터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천천히 아이의 허물을 벗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고3 때 김려령의 장편소설 <완득이>를 봤으면 어땠을까. 분명 지금 읽고 받았던 감동보다 몇 배는 더 큰 감동을 받았을거다. (지금 재미없다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소설 속 완득이가 처한 상황은 분명 내 고3 시절보다 훨씬 열악했으니까. 게다가 힘든 상황을 대하는, 때로는 덤덤하고 심지어 쿨하기까지한 완득이의 태도. 하늘에 대고 소심하게 중얼거리던 내 태도와 묘한 대조작용을 일으키며 감동 호르몬, 다이돌핀(didorphin)을 무한대로 쏟아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괴로워하던 그 시절에 <완득이>를 읽었다면 조금은 더 오랜 기간 꼬마 철학자로 남아있지 않았을까 싶다. 더 일찍 철이 들었을 것 같다는 의미다. <완득이>는 지금 봐도 무릎을 칠, 삶을 관통하는 번뜩이는 생각이 쉽게 형상화된 작품이다. 일례로 소설 속 완득이의 담임 똥주는 항상 자기 안의 고통을 안고 사는, 겉으로는 덤덤한 척 해도 속으로는 무지 힘들어하는 완득이에게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한 번, 한 번이 쪽팔린 거야. 싸가지 없는 놈들이야 남의 약점 가직 계속 놀려먹는다만, 그런 놈들은 상대 안 하면 돼. 니가 속에 숨겨놓으려니까. 너 대신 누가 그걸 들추면 상처가 되는 거야. 상처가 되기 싫으면 그냥 그렇다고 니 입으로 먼저 말해버려.”
“뭐가요?”
“그 ‘뭐’ 말이야. 새끼야. 니 나이 때는 그 뭐가 좆나게 쪽팔린데, 나중에 나이 먹으면 쪽팔려한게 더 쪽팔려져. 나가 새끼야. 나 졸려.”
고3시절 이 부분을 이해했다면 아마 하늘을 원망하며 힘든 시절을 하루하루 보내진 않았을게다. 오히려 좀 더 적극적으로 내 안의 괴로움과 대면했을 것이다. 물론 난장이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를 지칭하는 소설 속의 ‘뭐’와 내 안의 ‘뭐’는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삶의 태도 차원에서는 충분히 많은 것을 알려주는 내용이다. 나만의 괴로움을 가슴 깊은 곳에 꼭 넣어 놓고, 하늘을, 세상을, 부모님을 원망하던 청소년. 그 괴로움의 원인인 ‘뭐’에 대해서는 차마 당당히 바라보지 못한 채, 치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가 홀연히 나타나 모든 고통을 가져가주길 바랐던 겁 많은 청소년. 똥주의 저 말은 그런 청소년에게 당당히 내 안의 ‘뭐’를 대하고 그 ‘뭐’와의 직접 소통을 통해 극복하라는 철학자의 가르침과 다를 바 없다.
<완득이>는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을 받은 청소년소설이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란 의미다. 난 <완득이>를 읽는 내내 힘들어하던 고3시절을 떠올렸다. 어두운 골방에 처박혀 삶이 너무 힘들다고 투덜대던 고3의 내게로 다가가 어깨를 어루만져주며 <완득이>를 건내고 싶었다. 조금이나마 그 때의 나에게 위로가 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지금의 나에게도 <완득이>는 많은 의미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완득이>는 잔소리가 아닌, 재치 넘치는 말투로 ‘얘야. 삶을 말이다. 이런거란다’라고 말하는 할머니 같은 느낌이 든다. 이런 이유로 아직 자신이 어른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 누구에게나 <완득이> 할머니가 전하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