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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편 (반양장) - 미학의 눈으로 보는 고전예술의 세계 ㅣ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철학자 니체는 역사에 흐르는 커다란 두 힘을 그리스 신이 빗대어 대해 설명했다. 하나는 아폴론으로 대변되는 이성의 힘. 아폴론은 그리스 문명을 대변하는 합리의 신이다. 아폴론의 이름 뒤에는 태양, 낮, 절제, 질서, 생성, 법률, 규칙 등의 의미가 숨어있다. 또 다른 힘은 디오니소스로 대표되는 감성의 힘. 디오니소스는 술의 신답게 축제의 신이자 감성이 신으로 불린다. 디오니소스의 이름에는 달, 밤, 자유, 무질서, 혼란, 죽음, 쾌락 등의 상징이 자리 잡고 있다. 과거 그리스의 연극을 통해 니체는 디오니소스의 힘을 발견했으며, 반대로 과거 유럽 사회에 흐르는 계몽주의에서 아폴론의 힘을 지적했다. 난 대학교 3학년 때 니체의 이러한 설명을 처음 접했다. 새롭게 눈을 뜬 느낌이었다. 세계를 좀 더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안경을 얻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후 난 무수한 문학예술 작품 속에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상징이 뒤얽혀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역사 속에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힘싸움을 통해 일정한 순환 곡선이 그려지고 있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 졸업 직전까지 웬만한 리포트는 니체가 설명한 두 신을 이용해 우려먹었으니, 니체가 인문학적 개안과 함께 학점까지 나름 책임져준 셈이다.
어렸을 적 처음 영어 발음기호를 배운 후, 그 틀에 따라 실제로 모든 영어를 읽어보려 한 적이 있었다. 규칙이 적용되는 것이 신기했기 때문이다. 대학 때도 마찬가지였다. 니체로부터 역사를 읽는 틀을 배운 후, 그 틀로 온갖 문학, 예술 작품 읽기를 시도했다. 예술과 문학은 그 시대를 반영한 거울과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실제로 니체가 알려준 공식으로 거의 모든 작품을 읽어낼 수 있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이 미술 영역이었다. 미술작품은 당대의 분위기를 아주 세분화해서 표현한다는데 큰 매력이 있다. 예를 들어 역사는 역사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시간상자 안에 넣어져있다. 때문에 역사책이 말하는 계몽주의와 낭만주의는 철저히 단절되어 있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1499년 12월 31일까지 중세고 1500년 1월 1일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지 않았듯, 역사는 천천히 변해갔고, 그러한 변화의 흔적은 미술에 아로 새겨져있다. 그 결과 우리는 미술 작품을 통해 어떻게 아폴로와 디오니소스가 긴 시간 대결을 해왔는지 그들의 숨결 하나하나를 느낄 수 있다.
미술에서 아폴론적인 요소는 선이다. 선은 미술의 커다란 두 요소 중 형태를 담당한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려는 형태잡기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이성이다. 때문에 이성이 주를 이루는 시기엔, 형태의 정확한 묘사가 강조된다. 반면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담당하는 것은 색이다. 화가가 자신이 느낀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선 선보다 색이 더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성의 강조에 반발하던 시기, 색도 선보다 중시되기 시작한다. 도식화하자면, 이성의 빛이 시작됐던 그리스 문명에선 선이, 종교의 시대였던 중세에는 색이 더 큰 가치를 얻게 되는 식이다. 르네상스 시기엔 이성의 힘이 다시 태어나기 시작했다. 신에서 인간으로 관심을 돌렸을 때 시대가 목격한 것은 바로 인간의 이성이었다. 대표적인 르네상스 화가, 라파엘로의 그림을 보면 완벽한 구도와 정확한 묘사를 느낄 수 있다. 이성의 시대를 정확히 읽을 수 있다. 하지만 후기 르네상스 시기의 화가 엘 그레코의 그림은 조금 다르다. 라파엘로 그림에 비해 구도도 흐트러져있고, 형태도 불명확하다. 당시 엘그레코는 물질적인 세계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감각의 눈, 영혼의 눈에 보이는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는데, 그 결과 시대의 가치였던 이성에서 잠시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이후 미술사는 이러한 대립이 훨씬 강조된다. 바로크의 기준에서 볼 때, 아름다움이란 결코 완벽하게 파악되는 형태가 아니라, 모호한 기운을 품고 있는, 그래서 감상자에게 늘 새로운 여운을 남기는, 그런 형태에서 발휘된다. 때문에 바로크의 작품은 형태적으로 르네상스의 작품보다 덜 섬세해 보이지만, 작품의 질감은 더욱 실제와 같아 보인다. 서서히 디오니소스가 웅크렸던 몸을 본격적으로 펴기 시작한 순간이다. 프랑스에서 바로크는 디오니소스를 더 극단적으로 강조하기 시작한다. 로코코의 시작이다. 미술 평론의 선구자 로제 드 필은 색채를 더 강조하며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고전주의 작가 푸생 보다 바로크 계열의 화가 루벤스를 더 높게 평가한다. 로제 드 필의 말이 권위를 얻으면서 프랑스의 로코코는 바로크 시절보다 훨씬 화려하고 관능적인 그림이 주를 이루게 된다. 결과적으로 바로크와 로코코를 거치면서 형태보다는 색채를 드러내는 방식이 강조됐으며, 디오니소스가 아폴론을 다시 누르게 된 것이다. 물론 이후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은 다비드를 위시한 신고전주의파와 들라크루아로 대표되는 낭만주의의 대결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간 대학 시절, 많은 미술 교양 수업을 듣고 미술사 책도 여러 권 읽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이 지나치게 연대기에 집착하거나 일부 작품 해설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 수업도 대부분 특정 주제를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미술사 전체를 조망하긴 어려웠다. 수업과 여러 권의 책을 통해 조각으로 얻은 정보를 통합해줄 책이 필요했다. 적절한 순간 진중권의 새 책 <서양미술사>를 만났다. 최근 나온 <서양미술사>는 그의 다른 미학 저작과 마찬가지로 미술사의 전체를 바라보게 해주는 부감과 함께 세부적인 정보를 제공해주는 클로즈업을 동시에 제공해준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그는 책이나 글을 쓰는 작업이 동시에 놀이의 한 과정이라고 밝혔는데 이번에도 놀이의 흔적이 느껴진다. 미술사의 공시적 영역(학문이 다루는 문제 영역을 분류하여 제시하는 부분)과 통시적 영역(학문의 변천과정을 서술하는 부분)을 교차시키며 미술사를 다루고 있다. 이중독해를 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진중권다운 기지다. 수많은 미학서적을 쓰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사실을 담아내는 그를 보며, 그의 방대한 지식에 놀라울 따름이다. 혹시 미술사에 대한 책을 하나 찾고 있었다면 주저 없이 진중권의 책을 추천한다. 곧 발간될 <서양 미술사> 시리즈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