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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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우리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사실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때문에 태초부터 인간은 자신에게 부과된 비극적 숙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다. 그렇다면 한정된 시간 속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죽음의 공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 때 철학과 종교가 등장한다. 종교와 철학이 제시한 답은 180도 다른 얘기였지만(누군가는 신의 구원을 통해-종교-, 또 다른 누구는 자신의 이성을 통해-철학- ‘인간은 죽는다’라는 비극을 극복했다.), 궁극적인 핵심은 어떻게 살아야 삶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종교와 철학은 우리에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길잡이다. 때문에 종교와 철학은 단순한 개별 지식 습득을 넘어 행동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예를 들어 ‘인생의 욕망을 줄여 삶의 번뇌를 떨쳐라’라고 알려주는 불교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만약 그가 불교철학을 단순한 지식으로 습득하고도 탐욕과 욕망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는 불교의 핵심사상을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종교와 철학의 지식은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나라엔 수많은 크리스천이 있다. 모두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삶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많은 종교인들은 앎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일례로 주말에 교회나 성당에 열심히 나가서 기도하면서도, 평일엔 매일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당과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나오다가, 교회 주차장에서 차들이 엉키기라도 하면, ‘아저씨 빨리 차 빼라고’ ‘아니 이 아줌마는 뭐 차를 이따위로 댄 거야’란 말을 내뱉는다.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좋겠어. 주중에 죄짓고 주말에 기도 한 시간 하고 나면 또 죄가 없어지니까 말이야’라는 식의 비아냥거림이 등장한다. 실제로 많은 종교인이 습관처럼 교회나 성당에 나가, 습관처럼 기도를 하고, 습관처럼 남을 미워하고 욕을 하며 살아간다. 얼마 전 한 수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에게 훌륭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억지로 전도할 필요 없죠.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자연스레 상대방은 당신의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겁니다.” 종교인으로서 내 삶을 반성해보고, 삶과 종교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먼저 내가 믿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종교가 일러준, 사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크리스천이 배워야 할 사는 방법은 단순 명료하다. 바로 예수의 삶이다. 크리스천이 예수의 삶을 배우고 그의 삶에 가장 가깝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때, 삶과 종교의 괴리는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김규항의 <예수전>을 집어 들었다. 김규항은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삶을 통해 과연 예수가 꿈꾸고 실현하려 했던 세상은 무엇이며, 크리스천이 예수의 삶을 따르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지 묵상한다. 우선 김규항은 예수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교리 속에 파묻힌 예수의 삶을 끄집어 내, 인간 예수의 모습을 그린다. 그렇게 그려낸 예수의 삶이 전하고자 하는 방식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바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 더 나아가 법전이나 규칙 보다는 인간의 의식과 정신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제식적 의례를 무작정 엄격히 지키는 것 보다 실제 신앙인의 본질과 의미를 더 중시하라고 말씀하신다.(간음한 여성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했던 말씀. ‘죄를 짓지 않은 자,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말은 이런 예수의 생각을 잘 대변해준다. “하느님의 관심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었다.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기 위해 율법을 준 게 아니라 사람을 더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율법을 준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는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다’) 탄생부터 그는 약자의 대변자였다. 예수는 로마와 예루살렘의 지주로부터 이중의 착취를 당하던 갈릴래아에서 탄생한다.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 그는 메시아이되 영광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인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함께하는 메시아로서 예고된 것이다”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애끓는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김규항의 말처럼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나병환자나 이방인들을 가족처럼 사랑한다.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가 행한 이웃사랑의 이야기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예수는 세상에 사랑을 전파하는 현인이자 동시에 잘못된 세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던 혁명가였다. 지금은 물론 예수가 전파하던 평등한 사랑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예수가 살던 당시만 하더라도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리스 전통에 따르면 모든 자연과 사람에겐 계급이 있었다. 더 존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분이 있었고,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이 기존의 사상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형제라는 예수의 생각은 당시엔 혁명적인 사고였고, 그런 사고를 전파하던 예수의 행동은 기존 지배 체제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더 나아가 예수는 행동으로 불의에 저항하기도 했다. 예수는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비판하며 과격하게 성전에서 환전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듬지 못하는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직접 행동으로 저항한 것이다. 배금주의가 성전을 지배하는 시대 흐름에 맞서 예수는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순수함을 회복하려 애썼다. 결국 예수의 행동은 당시의 지배체제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이었으며, 그 전복의 핵심에는 고통 받고 차별받던 약자들을 삶의 중심으로 끌어 올리려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때문에 당시 지배체제는 정치적 혁명을 가져올 예수를 두려워 해, 십자가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삶을 떠올리며 다시금 한국의 대형 교회를 생각해본다. 몇 년 전 한 대형교회 목사는 쓰나미가 벌어진 동남아를 두고, 예수를 믿지 않는 지역에 대한 신의 징벌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재밌는 설교로 유명한 한 목사는 불교 믿는 국가는 다 가난하다며 타종교를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과연 그들에게 예수는 누구일까. 자식에게 엄청난 교회의 부를 세습하고 과거 독재자를 위해 매일 조찬 기도회를 열던 목회자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의 행동은 과연 무엇일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고 나눔을 베풀며 검소하게 살아가라는 것. 교리보다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을 실현하는 데 노력하라는 것. 분명 내 눈에 비친 한국 교회는 예수의 명료한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져 보인다. 특히 앎과 행동의 일치가 종교의 전제 조건임을 고려할 때, 과연 한국의 대형 교회의 존재는 현세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내 머리론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탈중심주의 철학을 공부하며 인종주의에 빠져있는 철학자 만큼이나 기이하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그대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복되어라, 지금 우는 사람들/ 그대들은 웃게 되리니. (루가 6:20-21) 진정한 종교가 이 땅에 더 많아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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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 이야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박상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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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탐앤탐스 안이다. 글을 쓰기 위해 왔으며, 날이 더워 그린티톰앤치노란 생소한 이름의 아이스 음료를 주문했다. 얼핏 보기엔 그린티프라푸치노와 비슷하다. 문제는 주문한 지 30분이 다 돼가지만, 톰앤치노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 모습은 병 안에 들어있는 바나나를 먹기 위해 낑낑대는 침팬지의 모습과 흡사하다. 일단 빨대로 한 모금 빨면 딱 한 모금에서 40% 부족한 양이 들어온다. 그린티톰앤치노는 컵에 가득한데, 아무리 빨아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떠먹을 수도 없다. 빨대로 애를 써서 얼음을 떠봤다. 얼음을 바지에 흘렸다. 간신히 떠서 먹은 소량의 그린티톰앤치노는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있는 얼음 맛과 비슷했다. 아까 한 모금에서 40% 부족한 양의 내용물을 먹은 게, 그린티톰앤치노의 알맹이만 쏙 빼먹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한 모금도 안 되는 액체를 10분에 한 번씩 빨아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카운터에 가서 ‘그린티톰앤치노를 떠먹으려고 하는 데 혹시 숟가락 있나요.’라고 묻기도 힘들고, 그린티톰앤치노가 녹을 때 까지 기다려 그린티라테처럼 마시기도 쉽지 않다. 이럴 때면 짜증이 시작된다. ‘이렇게 먹기 힘든 음료를 누가 만든 거야’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비판하기도 어렵다. ‘톰앤치노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아. 왜냐하면 잘 안 나오거든.’ 아무래도 모양새가 빠진다. 카운터에 가서 ‘제가 30분간 애를 써봤는데 이 그린티톰앤치노는 불량품인 것 같아요. 교환해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것도 뭔가 아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정작 내 평정심을 흔드는 일들은 톰앤치노처럼 지극히 사소한 일들이 많다. 2차선 도로에서 비상등을 켜놓고 여유 있게 청과물 가게에서 장을 보시는 아주머니, 자기 의자에는 에어 충격 완충 장치를 설치해놓고 난폭하게 만원 버스를 모는 5412번 버스 운전사, 글 쓰는 내 옆에서 ‘아침에 오일을 안 발라서 각질이 일어난다’며 큰 소리로 수다 떠는 청년(청년이다. 아가씨가 아니다)과 그냥 태어날 때부터 너무 목소리가 커서 마치 내 귀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은 아저씨, 중요한 통화 중에 방전되는 부실한 핸드폰 배터리와 오후 6시만 되면 전화 응대를 칼같이 멈추는 핸드폰 A/S 센터. 분명 방금 전 까지 유턴하라 해놓고 직진이라 말 바꾸는 엉터리 내비게이션, 매일 아침 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드는 선배의 우레 같은 재치기(알레르기성 비염이라 시도때도없이 터져나온다), 좋은 와인을 추천해준다며 온통 로마네콩티나 샤토페트뤼스, 샤토 라피트로쉴드, 샤토마고 등만 소개해놓은 기사, 작업하던 인터넷 창 10개를 동시에 사라지게 만들어놓고 ‘알 수 없는 오류 어쩌고’라며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윈도우, 매일 밤 내 차 와이퍼 아래 집요하게 꽂혀있는 안마 광고지까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사소한 짜증이 마음의 평화를 깨버린다. 물론 황희정승처럼 ‘허허. 그래 오일을 안 바르면 각질이 일어나 짜증나지’ ‘허허. 주차 실력이 부족하면 두 칸을 차지할 수도 있는 거지’ ‘허허. 목소리가 장군같이 크구나’라며 모든 상황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내 속은 밴댕이다. 예전에 내 사촌 동생은 기자를 지망하던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형은 기자하면 잘할 거야’ ‘왜?’ ‘난 형처럼 불평이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 지금 집에서 나와 버스타기까지 한 10가지 정도의 불평을 한 것 같은데, 기자되면 그게 다 기사가 될 거 아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일단 불평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짜증내는 일들의 대부분은 근엄한 신문지상에 기사형태로 비판하기엔 너무 짜잘한 경우가 많다. 그린티톰앤치노처럼 말이다. 그러니 정작 기자가 됐다 하더라도 쓸 기사는 거의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얼마 전 나의 스승뻘 되는 인물을 만났다. 빌 브라이슨. 국적은 미국. 아내는 영국인.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산 언론인. 20년만에 미국으로 귀향한 인물. 그런데 보통 불평쟁이가 아니다. <발칙한 미국학>에 실린 그의 불평 소재를 열거해보면, 우편서비스, TV프로그램, 고급 레스토랑과 점원들, 야구팀 구단주, 각종 서비스센터, 이발소, 신발, 정크푸드, 호텔 룸서비스, 컵홀더, 걷기 싫어하는 사람, 광할한 미국 영토, 할리우드 여름 영화, 덥고 추운 날씨, 해변으로 놀러가기, 크리스마스, 겨울스포츠, 전자제품, 소형 비행기, 쇼핑, 다이어트, 자동차 렌트, 그리고 끝으로 미국의 모든 공무원들과 자질구레한 규칙들. 여기에 분류할 수 없는 더 자질한 불평을 모아 ‘삶의 미스터리들’이란 글을 썼다. 물론 환경오염이나 사생활 감시 같은,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큰 주제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가 하는 불평 대상은 공감 가는 사소한 문제들이다. 일단 그는 일상에서 불평할만한 소재를 찾아내는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다.

 ‘엘리베이터엔 왜 ’정격하중 550kg‘같은 문구가 쓰여있을까. 그 문구는 왜 엘리베이터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부착되어 있는가? 이 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동승자들을 향해 “저는 몸무게가 95kg쯤 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요?”라고 물어야 하는가?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가는 사람들에게 내려달라고 말해야 하는가?’ (삶의 미스터리 중)

 ‘경기 시작 전 우리는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 끝에 가서 섰는데, 잠시 후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다. “표를 사려고 기다리시는 중인가요?” 나는 “아니요. 그냥 줄을 더 길게 만들려고 여기 서 있답니다”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물론 “그런데요?”라고 대답했다’ (친철한 사람들 중)

     보통 불평꾼은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빌브라이슨은 불평꾼이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하는지, 진정한 멋진 불평꾼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우선 불평꾼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이거 진짜 필요한가? 불이 들어오는 회전식 옷걸이를 살 바엔 그냥 불을 켜고 옷을 거는 것이 낫지 않을까?’같이 항상 의심하다 보면, 분명 우리 주변엔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것들이 득실거림을 알 수 있게 된다. 보통 거기서 발전적인 문제의식이 시작된다. 빌 브라이슨 선배(어느 새 선배가 됐다.)같은 경우 불이 들어오는 회전식 옷걸이에서 시작해, 과도한 편리 추구와 거기서 비롯된 에너지 낭비와 환경 훼손의 문제까지 발전시키고, 가끔은 ‘사람들은 편리성에 중독된 나머지, 노동력을 절감해주는 기구를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더 열심히 일할수록 노동력을 절감해주는 기구를 더 많이 갖춰야하겠다고 느끼는 악순환에 빠져있다.’같은 진지한 사회철학자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바람직한 불평꾼의 자세다. 관리비 고지서가 날아오면, 그냥 총액만 확인하고 관리비를 내는 사람보다는 관련 항목을 꼼꼼히 확인하고 ‘재건축 소송비에 7,230원이 지출됐네. 이거 뭐야. 우린 전센대 왜 재건축 소송을 한다는거야’라고 불평하고 확인하는 것이 불평꾼이 되는 첫걸음이다.

     물론 불평하고 짜증내고 화내고 끝내면, 사회와 주변 환경은 어느정도 개선될진 몰라도 개인의 삶은 너무 피폐해진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유머다. 일종의 비아냥인데, 빌 브라이슨은 이 부분의 대가다. 위에 인용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모든 불평사항을 유머로 승화시킨다.

‘요전 날 나는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탄산음료를 셔츠에 쏟은적이 있다. 내가 그렇게 놀란 이유는 관공서,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 사회보장국에 전화를 걸었는데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략) 전화벨이 정확히 270번 울린 뒤 진짜 사람 목소리가 나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관료주의 중)

‘H-4a에서 H-5까지의 굴대 받침대를 사용하여 용수철 따리쇠 D1과 D2를 중심축 J에 붙입니다.같은 문구가 쓰여 있는 안내 책자를 만드는 것은 불법이다.’ (삶의 규칙 중)

‘나에 관한 한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앉아서도 잠을 잘 수가 있고, <사인펠드> 재방송을 이미 본 것인지도 모르고 몇 번씩 다시 볼 수 있으며, 세 번째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래된 뉴스 중)

간혹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때문에 불평의 내용 전체가 헛소리로 매도되기도 한다. 이럴 때 적절한 유머나 은근한 비아냥을 섞어준다면 주변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웃음은 덤이다.

     궁합이 잘 맞는 수필가를 만나는 일은 인생의 크나큰 행운이다. 빌브라이슨을 불평계의 형님으로 삼기위해서라도, 그가 썼던 다른 책들을 우선 찾아봐야겠다. 그럼 난 일단 주문해놓은 그린티톰앤치노를 마시는 방법을 좀 더 강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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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문학터치 2.0 - 21세기 젊은 문학에 관한 발칙한 보고서
손민호 지음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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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문학담당 기자, 손민호. 책을 읽기 전부터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서울대 불문과 이인 성 교수 퇴임식’ 기사를 통해서다. 기사를 읽고 바이라인을 확인했다. 또 손민호였다. 그랬다. 그 기사가 처음이 아니었다. 예전에도 ‘이 기사 괜찮네’ 싶으면 손민호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문학담당 기자 아니랄까봐, 딱딱한 기사들 사이에서 문학적인 기사를 써내고 있었다. 한 번 만난 적도 있다. 전 직장에 있을 때다. 그 때 만나서 이인성 교수 퇴임식 기사 얘기를 꺼냈다. 그는 부끄러워했다. ‘그냥 평범한 기사였는데..... 어쨌든 고맙습니다.’ 그 뒤로도 그가 연재하는 ‘문학터치’는 거의 빼놓지 않고 읽었다. ‘문학터치’는 ‘소설보다 재밌는 소설이야기’정도로 설명할 수 있다. (물론 시도 다룬다.) 그가 연재한 문학터치를 모아 <문학터치2.0>이 나왔다. 그의 기사를 거의 다 읽은 내겐 흥미롭지 않은 책이었다. 허나 그가 거의 새로 쓰다시피 한 책이란다. 결국 집어 들고 말았다.

     기자들이 쓴 책은 공통적으로 쉽게 읽힌다는 강점이 있다. 어렵고 복잡한 내용을 쉽게 풀어쓰는 직업 종사자답게, 일단 글을 쉽게 쓴다. 문장도 간결하고 단어 선택도 명확하다. 잘 읽힌다. 반면 내용은 천차만별이다. 학계 전문가보다 깊이 있는 책이 있는가하면, 몇 년 간 몸으로 때운 내용을 글로 풀어내는 경우도 있다. <문학터치2.0>의 경우 물론 전자에 속한다. 글이 쉽다는 것은 둘째 치고, 소설과 시를 자신의 방식대로 분류하고 분석하는 방식이 논리적이다. 소설에 관한 대중서적 중 전문성 분야에서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윤성희 소설을 두고, ‘주어와 서술어의 소설’이라고 분석한다. 적어도 내 경우 윤성희의 소설이 잘 읽히지 않았는데, 아마도 손민호 기자의 말대로 밀도가 높은 소설의 구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김경욱의 소설을 두고 ‘냉정한 논리와 차가운 분석으로 조직한 구조물’이라고 표현한 분석엔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김경욱의 소설을 읽고 떠올린 내용을 한 문장으로 멋있게 압축했다.

기자들이 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무엇일까. 바로 현장성이다. 그들은 현장에서 정보를 수집하는 사람이다. 책을 읽고 정보를 얻은 사람들의 책과 달리 기자들의 책엔 현장의 생생한 상황이 펄떡거리는 활어처럼 살아 숨 쉰다. 그리고 <문학터치2.0>은 기자가 지닌 강점을 극대화 한 작품이다. 손 기자의 분석도, 문장도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건, 그가 시인, 소설가들과 술을 마시며 나눈 문학 현장의 이야기였다. 그 중에서도 압권은 김연수와 문태준의 축사 복수 혈전(?). 오랜 고향(김천) 친구인 두 사람은 각각 미당 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을 받고, 서로에게 축사를 하게 됐다. (물론 손민호 기자의 기획이다.) 먼저 김연수. 문태준이 자신의 습작시를 들고 선배 시인인 김연수에게 찾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자네. 이대로만 쓰면 곧 등단할 것이네.” 그랬더니 문군은 정말로 다음 달에 등단을 했습니다. 그 때부터 저는 시에 흥미를 잃고 소설을 써야만 했습니다.’ 다음은 문태준. 잡지에 시 청탁을 받은 김연수가 문태준에게 원고를 보여준 이야기였다. ‘1994년엔 제가 그에게 시를 점검받았지만, 이제는 그가 저에게 점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저는 “그게 좀 그렇다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생략) 아무튼 오늘로써 김연수의 시에 대한 미련이 상당부분 종료되길 바랍니다. 전문 영역인 소설만 잘 써주기를 친구로서 바랍니다.’ 이 외에도 책에는 손민호가 만나서 경험하고 느낀 작가들의 소소한 이야기가 도처에 숨어있다. 책을 읽고 놀란 사실 하나 더.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의 박민규는 OB(현 두산) 팬이란다. 유주얼 서스펙트급 반전 아닌가. 어쩐지 철전지 원수 같다던 소년 OB팬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 섬세하더라.

     손 기자의 글에는 젊은 한국 문학가들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른다. 그는 젊은 문학가들의 지닌 다양한 강점을 잘 뽑아낸다. 그 누구보다 든든한 지원사격가다. 동시에 젊은 작가들에 대한 부당한 비판에 대해선 대신해서 맞서 싸운다. 기본적으로 그는 이론을 무기로 문학의 다양성을 침해하는 경직된 사고의 공격을 막아내는, 젊은 작가들의 보디가드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한 가지 아쉽다. 난 책을 읽으며 손민호 기자의 애정 어린 비판을 기대한 게 사실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작가들에 대한 상찬이 이어지다보니, 나중엔 이유 없는 뒤틀림과 함께 삐딱한 시선이 생겨나기도 했다. 외국의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작품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실험들과 비교할 때, 과연 박민규가 보여준 작업이 진정 파격을 넘어선 이단일까. (그렇게 우리 문단은 보수적이었나.) 어떤 공식(아마도 논리겠지)에 의해 제작된 것 같은 완벽함이 때론 김경욱의 소설을 한계 짓는 건 아닐까. 정이현의 소설엔 피상적인 생각들로 가득하다는 일부 20-30대 여성의 비판은 마냥 부당한 걸까. ‘난 시 안에서 엄마 갖고 노는 게 재밌으니까, 당신들은 제발 신경 끄셔’ 라고 말한다면, 과연 비평은 남의 집 식탁에 '감 놔라 배 놔라'하는 참견꾼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까. 처음부터 삐딱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한한 애정을 이번에 선보였다면, 앞으론 좀 더 의도적으로 비판적인 시선으로 젊은 문학을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문학터치 2.0>이 오프라윈프리 쇼 같은 수준 높은 토크쇼였다면, 다음 그의 책에선 무릎팍도사 같은 솔직하고 적나라한 코미디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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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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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게 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인생에 대해 내가 깨달은 것들이 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삶의 큰 방향은 아주 사소한 우연의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전환 포인트들- 가령 진학, 결혼 등-이 순간적이고 집중적인 노력의 결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무심코하는 작은 의사결정들과 자연발생적인듯한 사건들이 우리를 그렇게 되도록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가끔 내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신기하여 어떻게 이럴 수 있었는지를 복기해보곤 한다. 아빠가 서울로 발령받은 것, 중학교 때 다녔던 과학 학원, 불어보다 독어가 더 쉽다는 거짓정보(그래서 난 독어를 선택했다), 쉬운 수리영역을 출제한 출제위원, (난 수학을 지지리도 못했다) 이런 건 오히려 잘 보이는 우연이다. 더 사소하게는 내가 선택했던 문제집의 46쪽 2번에 있던 문제가 수능에 약간 비슷하게 나오면서 내가 1.5점을 획득하는데 도움을 주는 등의 사건이 나도 모르게 발생했을 수 있다. 

어쨌든 대학에 갔다는 건 좋은 일이고 일반적으로 좋은 일이 생기면 당연한 것으로 착각해 인과관계를 따지지 않고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친구가 대문앞에서 창자가 드러나도록 칼부림을 당하고 죽으면 이게 누구 책임인지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따져보고 싶을 것이다. 작가는 그래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처녀가 아님이 밝혀져서 한 여자가 첫날밤 소박맞고 집으로 돌아온다. 여자의 오빠 둘은 '내 여동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여동생을 범했다는) A를 언제 어디서 죽일 것이다'라고 누누히 떠들고 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작은 우연들에 의해 그 소식은 A를 피해가고, 결국 오빠들은 그 예고된 시간과 장소에서 A를 죽인다. 

결국 그에게 처녀성을 뺐겼다고 진술한 여자를 비롯해서 살인 예고를 듣고도 착각하거나 무시하거나 잊어먹거나 실수한 마을 사람들 다수는 그 살인이 발생하는 데 책임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책임이 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직접 집도하셨던 두 청년만 살인자라고 명명된다. 집단의 도덕성이란 그렇게 우연성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따라서 집단은 쉽게 면책된다. 우리 주위에는 A에게 발생한 것과 같은 패턴으로 X이 되는 피해자들이 왕왕 생기는데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p.123 中

어느날 새벽 수탁 소리에 우리는 불현듯 그 터무니없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연쇄적 우연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여러가지 미스터리를 풀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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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다 보니 '운명 결정론' 적인 논조를 가진 책을 또 읽었다. 바로 이 '제5도살장'인데, 여기 주인공 빌리는 심지어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이동을 할 수 있다. 4차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트라팔마도어'인들에게 잡혀 배운 덕분이다. 4차원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본다는 것이다. 가령 3차원만 볼 수 있는 우리가 배용준을 볼 때 태왕사신기의 몸짱 광개토대왕으로만 보이겠지만 트라팔마도어인들은 그가 막 태어나 원숭이랑 구분이 안 가는 시절부터 데뷔초 유재석과 구분이 안 가는 시절 그리고 나아가 그 근육이 쇠퇴하여 오늘내일하시는 할아버지 배용준까지 동시에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옹 께서 오늘내일하시다가 돌아가신다 해도 별 일이 아니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배용준 어린이 역시 동일한 공간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에서 배용준과 장동건이 한 공간에 존재하듯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말이다.  

외계인과 시간여행이 나오는데다 문체도 웃겨서 금새 읽었다. 이렇게 말하면 매우 즐거운 책인듯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사실 시간 이동이 아니고 죽음이다. 책 속에서는 드레스덴 폭격으로 죽은 135,000명을 비롯해서 많은 인간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죽어나간다.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참담한 죽음들 앞에서, 작가는 인간의 이성에 의한 정의된 인과관계에 코웃음치며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라는 비관적 운명론을 주장하고 있다. (트라발마도인의 비유를 빌리자면 호박 안에 갖힌 곤충이 '왜 하필 나냐'라고 물을 때 대답해줄 이유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작가가 고안해 낸 대충 과학적이고 상당히 환상적인 '4차원 세계'를 인정할 때의 장점은 미리 정해진 죽음들 앞에서 놀라거나, '어떻게 이런 일이' 하며 억울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쏟아지는 죽음에 대한 빌리(혹은 작가)의 코멘트는 이 문장 뿐이다. '그렇게 가는 거지.'

영문과를 졸업한 신랑의 설명에 따르면, 커트 보네거트는 대표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라고 한다. 가뜩이나 이성을 믿지못하는데 이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2차 세계대전에서 드레스덴 폭격같이 제정신으로 못할 짓들을 보고 이성을 더 혐오하게 되었다는 게 신랑의 설명이다. 또 평화주의자이자 반전 운동가였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은 이 시니컬한 글로 봐서는 안 어울리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래 문구를 통해 별로 탐탁치 않은 세상이지만 그런 대로 애착을 같고, 최소한 3차원 밖에 못보는 인간으로서 약간의 희망이라도 갖고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바꿔가며 살아보려고 했던 작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 기도문은 생에 대한 열정이 없음에도 그런 대로 살아가게 해 주는 방법을 표현하고 있었다. 기도문을 본 많은 환자들은 빌리에게 그 기도가 자기들이 살아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기도문은 이랬다.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 제5도살장 中 p.75 -

P.S 이 책에서 성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너무 웃기다. 내용을 발췌해서 써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읽어야 제맛일듯 하다. 130쪽-131쪽인데 작가의 재치와 세계관과 도덕관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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