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브라이슨 발칙한 미국학 - 미국인도 모르는 미국 이야기 빌 브라이슨 시리즈
빌 브라이슨 지음, 박상은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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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탐앤탐스 안이다. 글을 쓰기 위해 왔으며, 날이 더워 그린티톰앤치노란 생소한 이름의 아이스 음료를 주문했다. 얼핏 보기엔 그린티프라푸치노와 비슷하다. 문제는 주문한 지 30분이 다 돼가지만, 톰앤치노를 한 모금도 제대로 못 먹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내 모습은 병 안에 들어있는 바나나를 먹기 위해 낑낑대는 침팬지의 모습과 흡사하다. 일단 빨대로 한 모금 빨면 딱 한 모금에서 40% 부족한 양이 들어온다. 그린티톰앤치노는 컵에 가득한데, 아무리 빨아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떠먹을 수도 없다. 빨대로 애를 써서 얼음을 떠봤다. 얼음을 바지에 흘렸다. 간신히 떠서 먹은 소량의 그린티톰앤치노는 우리 집 냉장고에 들어있는 얼음 맛과 비슷했다. 아까 한 모금에서 40% 부족한 양의 내용물을 먹은 게, 그린티톰앤치노의 알맹이만 쏙 빼먹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한 모금도 안 되는 액체를 10분에 한 번씩 빨아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카운터에 가서 ‘그린티톰앤치노를 떠먹으려고 하는 데 혹시 숟가락 있나요.’라고 묻기도 힘들고, 그린티톰앤치노가 녹을 때 까지 기다려 그린티라테처럼 마시기도 쉽지 않다. 이럴 때면 짜증이 시작된다. ‘이렇게 먹기 힘든 음료를 누가 만든 거야’ 그렇다고 정색을 하고 비판하기도 어렵다. ‘톰앤치노는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아. 왜냐하면 잘 안 나오거든.’ 아무래도 모양새가 빠진다. 카운터에 가서 ‘제가 30분간 애를 써봤는데 이 그린티톰앤치노는 불량품인 것 같아요. 교환해주세요.’라고 요구하는 것도 뭔가 아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정작 내 평정심을 흔드는 일들은 톰앤치노처럼 지극히 사소한 일들이 많다. 2차선 도로에서 비상등을 켜놓고 여유 있게 청과물 가게에서 장을 보시는 아주머니, 자기 의자에는 에어 충격 완충 장치를 설치해놓고 난폭하게 만원 버스를 모는 5412번 버스 운전사, 글 쓰는 내 옆에서 ‘아침에 오일을 안 발라서 각질이 일어난다’며 큰 소리로 수다 떠는 청년(청년이다. 아가씨가 아니다)과 그냥 태어날 때부터 너무 목소리가 커서 마치 내 귀에 대고 얘기하는 것 같은 아저씨, 중요한 통화 중에 방전되는 부실한 핸드폰 배터리와 오후 6시만 되면 전화 응대를 칼같이 멈추는 핸드폰 A/S 센터. 분명 방금 전 까지 유턴하라 해놓고 직진이라 말 바꾸는 엉터리 내비게이션, 매일 아침 내 심장을 벌렁거리게 만드는 선배의 우레 같은 재치기(알레르기성 비염이라 시도때도없이 터져나온다), 좋은 와인을 추천해준다며 온통 로마네콩티나 샤토페트뤼스, 샤토 라피트로쉴드, 샤토마고 등만 소개해놓은 기사, 작업하던 인터넷 창 10개를 동시에 사라지게 만들어놓고 ‘알 수 없는 오류 어쩌고’라며 뻔뻔하게 이야기하는 윈도우, 매일 밤 내 차 와이퍼 아래 집요하게 꽂혀있는 안마 광고지까지. 하루에도 수십 차례 사소한 짜증이 마음의 평화를 깨버린다. 물론 황희정승처럼 ‘허허. 그래 오일을 안 바르면 각질이 일어나 짜증나지’ ‘허허. 주차 실력이 부족하면 두 칸을 차지할 수도 있는 거지’ ‘허허. 목소리가 장군같이 크구나’라며 모든 상황을 넓은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행하게도 내 속은 밴댕이다. 예전에 내 사촌 동생은 기자를 지망하던 내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형은 기자하면 잘할 거야’ ‘왜?’ ‘난 형처럼 불평이 많은 사람을 본 적이 없거든. 지금 집에서 나와 버스타기까지 한 10가지 정도의 불평을 한 것 같은데, 기자되면 그게 다 기사가 될 거 아냐.’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일단 불평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짜증내는 일들의 대부분은 근엄한 신문지상에 기사형태로 비판하기엔 너무 짜잘한 경우가 많다. 그린티톰앤치노처럼 말이다. 그러니 정작 기자가 됐다 하더라도 쓸 기사는 거의 없었을 것이 확실하다

     얼마 전 나의 스승뻘 되는 인물을 만났다. 빌 브라이슨. 국적은 미국. 아내는 영국인.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영국에서 산 언론인. 20년만에 미국으로 귀향한 인물. 그런데 보통 불평쟁이가 아니다. <발칙한 미국학>에 실린 그의 불평 소재를 열거해보면, 우편서비스, TV프로그램, 고급 레스토랑과 점원들, 야구팀 구단주, 각종 서비스센터, 이발소, 신발, 정크푸드, 호텔 룸서비스, 컵홀더, 걷기 싫어하는 사람, 광할한 미국 영토, 할리우드 여름 영화, 덥고 추운 날씨, 해변으로 놀러가기, 크리스마스, 겨울스포츠, 전자제품, 소형 비행기, 쇼핑, 다이어트, 자동차 렌트, 그리고 끝으로 미국의 모든 공무원들과 자질구레한 규칙들. 여기에 분류할 수 없는 더 자질한 불평을 모아 ‘삶의 미스터리들’이란 글을 썼다. 물론 환경오염이나 사생활 감시 같은,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큰 주제들도 있지만, 대부분 그가 하는 불평 대상은 공감 가는 사소한 문제들이다. 일단 그는 일상에서 불평할만한 소재를 찾아내는 천부적인 재질을 갖고 있다.

 ‘엘리베이터엔 왜 ’정격하중 550kg‘같은 문구가 쓰여있을까. 그 문구는 왜 엘리베이터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 부착되어 있는가? 이 정보를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동승자들을 향해 “저는 몸무게가 95kg쯤 됩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신가요?”라고 물어야 하는가? 몸무게가 더 많이 나가는 사람들에게 내려달라고 말해야 하는가?’ (삶의 미스터리 중)

 ‘경기 시작 전 우리는 매표소 앞에 길게 늘어서 있는 줄 끝에 가서 섰는데, 잠시 후에 어떤 사람이 다가와서 말했다. “표를 사려고 기다리시는 중인가요?” 나는 “아니요. 그냥 줄을 더 길게 만들려고 여기 서 있답니다”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물론 “그런데요?”라고 대답했다’ (친철한 사람들 중)

     보통 불평꾼은 부정적인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빌브라이슨은 불평꾼이 어떤 덕목을 갖춰야 하는지, 진정한 멋진 불평꾼의 모습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우선 불평꾼은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이거 진짜 필요한가? 불이 들어오는 회전식 옷걸이를 살 바엔 그냥 불을 켜고 옷을 거는 것이 낫지 않을까?’같이 항상 의심하다 보면, 분명 우리 주변엔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것들이 득실거림을 알 수 있게 된다. 보통 거기서 발전적인 문제의식이 시작된다. 빌 브라이슨 선배(어느 새 선배가 됐다.)같은 경우 불이 들어오는 회전식 옷걸이에서 시작해, 과도한 편리 추구와 거기서 비롯된 에너지 낭비와 환경 훼손의 문제까지 발전시키고, 가끔은 ‘사람들은 편리성에 중독된 나머지, 노동력을 절감해주는 기구를 더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더 열심히 일해야 하고, 더 열심히 일할수록 노동력을 절감해주는 기구를 더 많이 갖춰야하겠다고 느끼는 악순환에 빠져있다.’같은 진지한 사회철학자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바람직한 불평꾼의 자세다. 관리비 고지서가 날아오면, 그냥 총액만 확인하고 관리비를 내는 사람보다는 관련 항목을 꼼꼼히 확인하고 ‘재건축 소송비에 7,230원이 지출됐네. 이거 뭐야. 우린 전센대 왜 재건축 소송을 한다는거야’라고 불평하고 확인하는 것이 불평꾼이 되는 첫걸음이다.

     물론 불평하고 짜증내고 화내고 끝내면, 사회와 주변 환경은 어느정도 개선될진 몰라도 개인의 삶은 너무 피폐해진다. 이 때 필요한 것이 유머다. 일종의 비아냥인데, 빌 브라이슨은 이 부분의 대가다. 위에 인용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모든 불평사항을 유머로 승화시킨다.

‘요전 날 나는 너무 놀라서 들고 있던 탄산음료를 셔츠에 쏟은적이 있다. 내가 그렇게 놀란 이유는 관공서, 정확하게 말하면 미국 사회보장국에 전화를 걸었는데 누군가가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중략) 전화벨이 정확히 270번 울린 뒤 진짜 사람 목소리가 나왔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겠는가.’ (관료주의 중)

‘H-4a에서 H-5까지의 굴대 받침대를 사용하여 용수철 따리쇠 D1과 D2를 중심축 J에 붙입니다.같은 문구가 쓰여 있는 안내 책자를 만드는 것은 불법이다.’ (삶의 규칙 중)

‘나에 관한 한 나이 들어간다는 것에는 세 가지 장점이 있다. 앉아서도 잠을 잘 수가 있고, <사인펠드> 재방송을 이미 본 것인지도 모르고 몇 번씩 다시 볼 수 있으며, 세 번째가 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래된 뉴스 중)

간혹 이야기를 전달하는 방식 때문에 불평의 내용 전체가 헛소리로 매도되기도 한다. 이럴 때 적절한 유머나 은근한 비아냥을 섞어준다면 주변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웃음은 덤이다.

     궁합이 잘 맞는 수필가를 만나는 일은 인생의 크나큰 행운이다. 빌브라이슨을 불평계의 형님으로 삼기위해서라도, 그가 썼던 다른 책들을 우선 찾아봐야겠다. 그럼 난 일단 주문해놓은 그린티톰앤치노를 마시는 방법을 좀 더 강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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