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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길게 살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인생에 대해 내가 깨달은 것들이 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삶의 큰 방향은 아주 사소한 우연의 조합에 의해 결정된다"라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중요하다고 느껴지는 전환 포인트들- 가령 진학, 결혼 등-이 순간적이고 집중적인 노력의 결과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은 무심코하는 작은 의사결정들과 자연발생적인듯한 사건들이 우리를 그렇게 되도록 만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가끔 내가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신기하여 어떻게 이럴 수 있었는지를 복기해보곤 한다. 아빠가 서울로 발령받은 것, 중학교 때 다녔던 과학 학원, 불어보다 독어가 더 쉽다는 거짓정보(그래서 난 독어를 선택했다), 쉬운 수리영역을 출제한 출제위원, (난 수학을 지지리도 못했다) 이런 건 오히려 잘 보이는 우연이다. 더 사소하게는 내가 선택했던 문제집의 46쪽 2번에 있던 문제가 수능에 약간 비슷하게 나오면서 내가 1.5점을 획득하는데 도움을 주는 등의 사건이 나도 모르게 발생했을 수 있다.
어쨌든 대학에 갔다는 건 좋은 일이고 일반적으로 좋은 일이 생기면 당연한 것으로 착각해 인과관계를 따지지 않고 지나가게 마련이다. 그런데 친구가 대문앞에서 창자가 드러나도록 칼부림을 당하고 죽으면 이게 누구 책임인지 왜 그런 일을 당했는지 따져보고 싶을 것이다. 작가는 그래서 이 책을 썼다고 한다. 내용은 대충 이렇다. 처녀가 아님이 밝혀져서 한 여자가 첫날밤 소박맞고 집으로 돌아온다. 여자의 오빠 둘은 '내 여동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여동생을 범했다는) A를 언제 어디서 죽일 것이다'라고 누누히 떠들고 다닌다. 마을 사람들은 거의 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작은 우연들에 의해 그 소식은 A를 피해가고, 결국 오빠들은 그 예고된 시간과 장소에서 A를 죽인다.
결국 그에게 처녀성을 뺐겼다고 진술한 여자를 비롯해서 살인 예고를 듣고도 착각하거나 무시하거나 잊어먹거나 실수한 마을 사람들 다수는 그 살인이 발생하는 데 책임이 없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고 책임이 있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직접 집도하셨던 두 청년만 살인자라고 명명된다. 집단의 도덕성이란 그렇게 우연성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따라서 집단은 쉽게 면책된다. 우리 주위에는 A에게 발생한 것과 같은 패턴으로 X이 되는 피해자들이 왕왕 생기는데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른다.
p.123 中
어느날 새벽 수탁 소리에 우리는 불현듯 그 터무니없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연쇄적 우연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여러가지 미스터리를 풀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