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쩌다 보니 '운명 결정론' 적인 논조를 가진 책을 또 읽었다. 바로 이 '제5도살장'인데, 여기 주인공 빌리는 심지어 과거 현재 미래로 시간이동을 할 수 있다. 4차원의 세계를 볼 수 있는 '트라팔마도어'인들에게 잡혀 배운 덕분이다. 4차원으로 세상을 본다는 건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본다는 것이다. 가령 3차원만 볼 수 있는 우리가 배용준을 볼 때 태왕사신기의 몸짱 광개토대왕으로만 보이겠지만 트라팔마도어인들은 그가 막 태어나 원숭이랑 구분이 안 가는 시절부터 데뷔초 유재석과 구분이 안 가는 시절 그리고 나아가 그 근육이 쇠퇴하여 오늘내일하시는 할아버지 배용준까지 동시에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배옹 께서 오늘내일하시다가 돌아가신다 해도 별 일이 아니다. 시퍼렇게 살아있는 배용준 어린이 역시 동일한 공간안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3차원의 세계에서 배용준과 장동건이 한 공간에 존재하듯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말이다.  

외계인과 시간여행이 나오는데다 문체도 웃겨서 금새 읽었다. 이렇게 말하면 매우 즐거운 책인듯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건 사실 시간 이동이 아니고 죽음이다. 책 속에서는 드레스덴 폭격으로 죽은 135,000명을 비롯해서 많은 인간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죽어나간다. 어떤 것으로도 설명이 안 되는 참담한 죽음들 앞에서, 작가는 인간의 이성에 의한 정의된 인과관계에 코웃음치며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라는 비관적 운명론을 주장하고 있다. (트라발마도인의 비유를 빌리자면 호박 안에 갖힌 곤충이 '왜 하필 나냐'라고 물을 때 대답해줄 이유가 없는 것처럼.) 그렇게 작가가 고안해 낸 대충 과학적이고 상당히 환상적인 '4차원 세계'를 인정할 때의 장점은 미리 정해진 죽음들 앞에서 놀라거나, '어떻게 이런 일이' 하며 억울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쏟아지는 죽음에 대한 빌리(혹은 작가)의 코멘트는 이 문장 뿐이다. '그렇게 가는 거지.'

영문과를 졸업한 신랑의 설명에 따르면, 커트 보네거트는 대표적인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라고 한다. 가뜩이나 이성을 믿지못하는데 이성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2차 세계대전에서 드레스덴 폭격같이 제정신으로 못할 짓들을 보고 이성을 더 혐오하게 되었다는 게 신랑의 설명이다. 또 평화주의자이자 반전 운동가였다고 하는데 이런 사실은 이 시니컬한 글로 봐서는 안 어울리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래 문구를 통해 별로 탐탁치 않은 세상이지만 그런 대로 애착을 같고, 최소한 3차원 밖에 못보는 인간으로서 약간의 희망이라도 갖고 바꿀 수 있는 부분은 바꿔가며 살아보려고 했던 작가의 태도를 읽을 수 있다.  

.... 기도문은 생에 대한 열정이 없음에도 그런 대로 살아가게 해 주는 방법을 표현하고 있었다. 기도문을 본 많은 환자들은 빌리에게 그 기도가 자기들이 살아가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기도문은 이랬다. 

하느님, 저에게 허락하소서.
내가 바꾸지 못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꾸는
용기와
늘 그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 제5도살장 中 p.75 -

P.S 이 책에서 성경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게 너무 웃기다. 내용을 발췌해서 써볼까 했는데 아무래도 직접 읽어야 제맛일듯 하다. 130쪽-131쪽인데 작가의 재치와 세계관과 도덕관이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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