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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평점 :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우리의 비극은 여기서 시작된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소멸한다는 사실은 인간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때문에 태초부터 인간은 자신에게 부과된 비극적 숙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하다. 그렇다면 한정된 시간 속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죽음의 공포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이 때 철학과 종교가 등장한다. 종교와 철학이 제시한 답은 180도 다른 얘기였지만(누군가는 신의 구원을 통해-종교-, 또 다른 누구는 자신의 이성을 통해-철학- ‘인간은 죽는다’라는 비극을 극복했다.), 궁극적인 핵심은 어떻게 살아야 삶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는가에 관한 것이었다. 결국 종교와 철학은 우리에게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길잡이다. 때문에 종교와 철학은 단순한 개별 지식 습득을 넘어 행동으로 실현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예를 들어 ‘인생의 욕망을 줄여 삶의 번뇌를 떨쳐라’라고 알려주는 불교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만약 그가 불교철학을 단순한 지식으로 습득하고도 탐욕과 욕망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는 불교의 핵심사상을 제대로 안다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결국 사는 방법을 알려주는 종교와 철학의 지식은 행동과 분리될 수 없다.
우리나라엔 수많은 크리스천이 있다. 모두가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삶의 유한성을 극복하려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많은 종교인들은 앎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일례로 주말에 교회나 성당에 열심히 나가서 기도하면서도, 평일엔 매일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성당과 교회에서 열심히 기도하고 나오다가, 교회 주차장에서 차들이 엉키기라도 하면, ‘아저씨 빨리 차 빼라고’ ‘아니 이 아줌마는 뭐 차를 이따위로 댄 거야’란 말을 내뱉는다.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좋겠어. 주중에 죄짓고 주말에 기도 한 시간 하고 나면 또 죄가 없어지니까 말이야’라는 식의 비아냥거림이 등장한다. 실제로 많은 종교인이 습관처럼 교회나 성당에 나가, 습관처럼 기도를 하고, 습관처럼 남을 미워하고 욕을 하며 살아간다. 얼마 전 한 수녀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에게 전도를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사람에게 훌륭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억지로 전도할 필요 없죠.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자연스레 상대방은 당신의 종교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될 겁니다.” 종교인으로서 내 삶을 반성해보고, 삶과 종교의 괴리를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먼저 내가 믿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알아야 한다. 다시 말해 종교가 일러준, 사는 방법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크리스천이 배워야 할 사는 방법은 단순 명료하다. 바로 예수의 삶이다. 크리스천이 예수의 삶을 배우고 그의 삶에 가장 가깝게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때, 삶과 종교의 괴리는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김규항의 <예수전>을 집어 들었다. 김규항은 마르코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삶을 통해 과연 예수가 꿈꾸고 실현하려 했던 세상은 무엇이며, 크리스천이 예수의 삶을 따르기 위해선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지 묵상한다. 우선 김규항은 예수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 교리 속에 파묻힌 예수의 삶을 끄집어 내, 인간 예수의 모습을 그린다. 그렇게 그려낸 예수의 삶이 전하고자 하는 방식은 간단하고 명확하다. 바로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 더 나아가 법전이나 규칙 보다는 인간의 의식과 정신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제식적 의례를 무작정 엄격히 지키는 것 보다 실제 신앙인의 본질과 의미를 더 중시하라고 말씀하신다.(간음한 여성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 예수가 했던 말씀. ‘죄를 짓지 않은 자,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라는 말은 이런 예수의 생각을 잘 대변해준다. “하느님의 관심이 율법을 잘 지키는 경건한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먹고살기 위해선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들에게 있음을 선포한다” 예수에게 중요한 것은 율법이 아니라 내면의 사랑이었다. ‘하느님이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기 위해 율법을 준 게 아니라 사람을 더 사람답게 행복하게 살게 하기 위해 율법을 준 것이다. 사람을 괴롭히고 옥죄는 율법은 더 이상 하느님의 율법이 아니다’) 탄생부터 그는 약자의 대변자였다. 예수는 로마와 예루살렘의 지주로부터 이중의 착취를 당하던 갈릴래아에서 탄생한다. “갈릴래아에서 온 메시아. 그는 메시아이되 영광의 왕으로서의 메시아가 아니라 인민들의 고통스런 삶을 함께하는 메시아로서 예고된 것이다” “예수의 모든 행동은 모든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애끓는 마음에서 시작한다”는 김규항의 말처럼 예수는 당시 사회에서 천대받던 나병환자나 이방인들을 가족처럼 사랑한다. 마르코복음에는 예수가 행한 이웃사랑의 이야기가 무수하게 등장한다.
예수는 세상에 사랑을 전파하는 현인이자 동시에 잘못된 세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던 혁명가였다. 지금은 물론 예수가 전파하던 평등한 사랑이 당연하게 들리겠지만, 예수가 살던 당시만 하더라도 이는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그리스 전통에 따르면 모든 자연과 사람에겐 계급이 있었다. 더 존귀한 것과 천한 것의 구분이 있었고, 더 많은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야 한다는 것이 기존의 사상이었다. 때문에 모두가 형제라는 예수의 생각은 당시엔 혁명적인 사고였고, 그런 사고를 전파하던 예수의 행동은 기존 지배 체제에 심각한 위협을 가했다. 더 나아가 예수는 행동으로 불의에 저항하기도 했다. 예수는 강도들의 소굴로 변한 성전을 비판하며 과격하게 성전에서 환전상과 비둘기를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신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보듬지 못하는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직접 행동으로 저항한 것이다. 배금주의가 성전을 지배하는 시대 흐름에 맞서 예수는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순수함을 회복하려 애썼다. 결국 예수의 행동은 당시의 지배체제를 전복하려는 움직임이었으며, 그 전복의 핵심에는 고통 받고 차별받던 약자들을 삶의 중심으로 끌어 올리려는 마음이 깔려 있었다. 때문에 당시 지배체제는 정치적 혁명을 가져올 예수를 두려워 해, 십자가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삶을 떠올리며 다시금 한국의 대형 교회를 생각해본다. 몇 년 전 한 대형교회 목사는 쓰나미가 벌어진 동남아를 두고, 예수를 믿지 않는 지역에 대한 신의 징벌이란 표현을 사용했다. 재밌는 설교로 유명한 한 목사는 불교 믿는 국가는 다 가난하다며 타종교를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과연 그들에게 예수는 누구일까. 자식에게 엄청난 교회의 부를 세습하고 과거 독재자를 위해 매일 조찬 기도회를 열던 목회자들이 믿고 따르던 예수의 행동은 과연 무엇일까.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 항상 겸허한 마음으로 남을 섬기고 나눔을 베풀며 검소하게 살아가라는 것. 교리보다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을 실현하는 데 노력하라는 것. 분명 내 눈에 비친 한국 교회는 예수의 명료한 가르침에서 멀리 떨어져 보인다. 특히 앎과 행동의 일치가 종교의 전제 조건임을 고려할 때, 과연 한국의 대형 교회의 존재는 현세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내 머리론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들의 모습은 탈중심주의 철학을 공부하며 인종주의에 빠져있는 철학자 만큼이나 기이하다. ‘복되어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 나라가 그대들의 것이니./ 복되어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그대들은 배부르게 되리니/ 복되어라, 지금 우는 사람들/ 그대들은 웃게 되리니. (루가 6:20-21) 진정한 종교가 이 땅에 더 많아지길 진심으로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