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 신대륙 발견부터 부시 정권까지, 그 진실한 기록
하워드 진.레베카 스테포프 지음, 김영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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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들과 함께 싸웠어. 하지만 승리의 대가는 자주 독립이라는 허울뿐인 명분에 불과했어. 대륙의회는 장교들에 한해서만 원래 받던 급료의 절반을 평생 제공해준다는 법을 제정했지. 우리에겐 아무 것도 돌아오지 않았어. 하지만 지도자들은 식민지의 승리를 위해서란 명분으로 얼마나 많은 세금을 우리에게 앗아갔나. 계속되는 빚에 법정은 우리의 토지와 소를 압수해갔지. 영국 정부에 대항해 싸운 혁명전쟁의 결과가 바로 이런 거였지. 곳곳에서 ‘폭정은 폭정일 뿐. 누가 해먹어도 마찬가지구나’란 말이 나오기 시작했지. 견딜 수가 없었던 우리는 들고 일어났어. 감옥을 부수고 나머지 빚 때문에 갇힌 농민들을 풀어줬지. 보스턴 차사건을 이끌었던 새뮤얼 애덤스가 법을 준수하라고 말하더군. 돈이 없는 우리는 ‘당신들도 보스턴 차 사건이 발생하던 당시 법을 어기지 않았냐’고 항변했지. 700명의 베테랑 군인들을 중심으로 저항을 시작했어. 물론 우리가 무슨 힘이 있었겠나. 결국 나는 사면됐지만 함께 싸웠던 12명은 사형에 처해졌지. 당시 법원은 이렇게 말하더군. “왕에 대한 반란은 용서받아야 하지만 공화국 법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자는 죽어 마땅하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일궈낸 시기에 농민 폭동을 주도했던 다니엘 셰이즈(Daniel Shays)의 이야기다. 자유 독립을 쟁취했던 기쁨의 순간에 다니엘 셰이즈와 농민들은 가장 힘겨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를 잘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하지만 미국사의 아이러니는 이뿐만이 아니다. 평등과 자유를 찾아 영국을 떠나 온 청교도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미국의 독립과 함께 체로키족은 눈물의 행로를 통해 백인들이 지정해놓은 곳으로 이동해야만 했다. 가는 도중 4000명 이상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또한 ‘명백한 사명(manifest destiny)’이라는 기치아래 팽창하던 미국의 움직임에 수많은 미국 군인들과 멕시코인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다. 오하이오 주의 하원의원이었던 조슈아 기딩스는 미국의 팽창 움직임에 대해 ‘침략적이고 성스럽지도 못하고 정당성도 없는 전쟁’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미국은 승리했고 멕시코에게 1,500만 달러를 지급하고 뉴멕시코 일대와 캘리포니아를 얻었다. 다음날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고 한다. “우리가 강제로 정복해서 빼앗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께 감사드리자”


백인들을 중심에 놓고 역사를 바라보자면 미국의 역사는 영광의 역사이자 승리의 역사이다. 무한히 성장하고 발전하는 역사였다. 그 결과 현재 미국은 팍스 아메리카나 시대를 연 최강국이 되었다. 약 200년이라는 짧은 역사를 고려한다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한 셈이다. 하지만 그 200년의 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무수한 미국인들의 삶을 현미경으로 살펴보면 너무나도 많은 착취와 억압, 그리고 이로 인한 피와 눈물이 겹겹이 쌓여있다. 자본가에게 억압받던 노동자들의 눈물도 있을 것이며, 아직까지도 보이지 않는 차별에 힘들어하는 흑인들의 울부짖음도 있다. 1960년이 돼서야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여성의 서러움과 주인에서 이방인으로 전락한 원주민들의 한도 있다. 수많은 눈물 위에 팍스 아메리카나라는 영광스런 미국의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미국의 살아있는 양심이자 행동하는 지식인 하워드 진의 <살아있는 미국역사>는 미국 역사의 아이러니를 소개한다. 우리가 그동안 배워왔던 백인 엘리트 중심의 역사에서 벗어나, 그는 미국 역사의 기저에 깔려있는 어둠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전하는 역사의 뒷면을 바라보고 있자니 서글퍼진다. 헤겔의 말과 달리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역사는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대량살상무기를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부시 정권의 정책은 서부 영토를 위해 멕시코를 도발하고 무수한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포크너 정권의 팽창 정책과 지독하게 닮아있다.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닌 듯해서 더 답답하다. 1970년대 한국과 지금의 한국. 정권은 무수히 바뀌고 역사의 외관은 화려하게 성장하고 있는데 서민들의 삶은 항상 어려우니 말이다. 지도자들은 국가 발전이란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정책의 실패가 가져다주는 고통은 고스란히 서민들에게 지워진다. 후세의 역사가 지금의 미국과 한국을 어떻게 평가할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제2의 하워드진의 현미경으로 이 시가의 굴곡을 살펴본다면 1800년대, 1900년대를 살았던 미국인의 눈물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음은 확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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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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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드보통 글의 소재는 일상이다. 일상은 무미건조하다. 일상은 습관의 무의식적 반작용이 만들어낸 삶의 모습이다. 파블로프의 개가 음식 앞에서 침을 흘리듯, 우리도 습관처럼 일어나 밥을 먹고 회사에 간다. 밥을 먹는 행위와 회사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는 일에는 우리의 자유의지가 결여되어 있다. 때문에 일상은 무미건조함과 동시에 무색무취다. 특색이 없다. 하지만 알랭드보통은 특별한 능력을 지녔다. 바로 무색무취의 일상 속에 스며들어있는 파스텔톤 색깔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알랭드보통이라는 압착 증류기를 통과한 일상은 완전히 응축이 되어 자신의 정수를 드러낸다. 그 정수는 때론 달콤하고 화려하며, 때론 쓰고 우울하다. 그 형태는 다양하나 확실한 한 가지 사실은 알랭드보통의 눈을 거친 일상은 절대 무미건조하거나 무색무취가 아니라는 점. 동시에 그 어떤 스펙타클한 광경보다 많은 메시지가 일상 속에 숨어있음을 알랭드보통의 글을 통해 발견할 수 있다. 정말 부럽고도 대단한 능력이다.


예전에 일본에 갔을 때다. 야심차게 마음을 먹고 서울을 떠났다. 일본에 향하는 동안, 내 머릿속에는 다양한 낭만적 상황들이 떠올랐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카피문구처럼 내 자신이 답답한 일상을 벗어나는 도시의 자유인처럼 여겨지기도 했고, 일본에서 만나는 낯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방전된 내 안의 배터리를 충전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닥 낭만적이지 못했다. 도착한 순간부터 길을 찾지 못해 헤맸으며, 낯선 사람은커녕 일주일 내내 외롭게 도쿄의 밤거리를 음습하게 서성거려야 했다. 돈과 버스표도 잃어버렸고, 폭풍이 들이쳐 하루는 종일 숙소에 머물러야만 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도시의 전문직 남성은 순식간에 여행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풋내기 대학생 외톨이로 전락해버리는 상황이었다. 땅을 치고 괴로워 할 때, 아내가 날 위로한다고 알랭드보통의 글을 소개했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는데, 순간 고베 대지진 수준의 감정의 진폭이 있었음을 지금에야 고백한다.  

“<기대에 대하여>라는 글이야. 내용은 대충 이런 거야. 여행지 사진들을 보거나 하면 사람들은 설레잖아. 일상에서 아주 먼 곳으로 가서 가뿐하게 그곳을 즐기고 싶단는 생각을 하잖아. 근데 막상 여행을 가면 그곳에서도 일상임은 변함없이 일상이라는 거야. 발리 해변을 보고 발리 해변에 앉아서 일광욕 하는 나를 기대하며 그곳에 가지만, 결국 발리 해변까지 가려면 비행기를 갈아타고, 더운 곳에서 호텔을 찾아 헤매고, 옷을 갈아입고, 찐득거리는 썬크림을 바르고 뭐 그런 식의 세세한 일이 다 기다리고 있다는 거지.”

알랭드보통은 남들이 지니지 못한 더듬이를 갖고 있는 것 같다. 그 더듬이는 항상 우리가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일상에서 의미를 뽑아낼 수 있는 상황을 포착해낸다. 물론 그가 섬세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방대한 인문학적, 예술적 지식으로 더듬이가 포착해낸 일상의 상황을 맛있는 메뉴로 만들어 놓는다. 지식에 뛰어난 표현력이 더해지는 것은 물론이다. 산문집 <동물원가기>는 그런 알랭드보통의 대표 수필을 모아놓은 책이다. 때론 사랑의 진정성에 대해 남녀의 유쾌한 상황을 통해 이야기하고,(‘진정성) 때론 ‘일과행복’이라는 맑스적 사회 주제에 대해 무겁게 논하기도 한다. ‘따분한 장소’(취리히)와 공항에 간다는 일상적 상황(‘공항에 가기’)에서 예의 의미 뽑아내기 실력을 발휘하기도 하고, ‘슬픔이 주는 기쁨’이라는 인문학적 역설을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통해 기가 막히게 설명하기도 한다. 알랭드보통은 ‘글쓰기’란 수필을 통해서 글에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놓는다. 내가 보기엔 적어도 그의 글쓰기는 본인이 원하는 수준에 거의 도달하지 않았나 싶다

위대한 책의 가치는 우리 자신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나 사람들의 묘사에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이들을 훨씬 더 잘 묘사하는 능력 또한 중요하다. 독자가 읽다가 이것이 바로 내가 느꼈지만 말로 표현을 못하던 것이라고 무릎을 쳐야 하는 것이다.

아마 알랭드보통의 능력은 선천적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사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부터 예민한 더듬이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던가. 우리가 무생물이지 않는 이상, 매 순간 우리는 일상의 모습을 보며 수많은 생각과 감정을 지닌다. 단지 이를 인식하지 못했을 뿐. 하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 몸에 나있던 예민한 촉수를 거세하려 한다. 우리의 삶은 내 자신을 삶의 일상 속에 매몰시키려 한다. 결국 의식하지 않으면, 더 나아가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 모두는 ‘세상을 바라보는 감각’이 마비된 이성의 불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난 알랭드보통의 타고난 더듬이 밑에는 세상과 인간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관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있다면 거세된 더듬이를 다시 되돌릴 수 있을 것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눈을 가지려 노력해야 한다. 눈보라 몰아치는 아스팔트 도로 위에 핀 작은 노란 꽃과 취업의 스트레스 속에서도 캠퍼스를 붉게 수놓고 있는 단풍나무의 화려한 위용을 볼 수 있는 그런 눈을 말이다. 알랭드보통을 통해 배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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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 & 포퍼 :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지식인마을 25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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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과학 분야의 책을 꾸준히 읽어줄 필요가 있어.” 아내의 선배가 했던 말이란다. 아마도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사변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 과학 서적을 읽으란 의미일 게다. 실제로 내 블로그의 글을 살펴보니, 올해의 글들은 대부분 행복/자본주의/인생 등의 얘기가 많다. 몸이 현실에 깊숙이 박히면 박힐수록, 머리는 현실을 떠나 뜬 구름 위의 얘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걸까. 사실 행복과 인생,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의 부조리는 그 모습이 명확하지 않다. 다시 말해 어제 산 포도의 형태는 내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자본주의와 행복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누구는 행복이 쾌락에 있다고 말하고, 누구는 사회적 성공에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의 말은 180도 다르지만, 누가 진리인지는 쉽게 결판이 나지 않는다. 여기에 인문/사회 분야의 답답함이 있다. 반면에 과학은 다르다.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눈으로 본다. ‘F=ma'라는 주장과 ’F=mb‘라는 주장이 부딪힐 리 없다. 과학의 진리는 분명하다. 때문에 아내의 선배는 백날 떠들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만 질퍽거리는 것보다는, 가끔 명징한 답이 보이는 과학의 세계를 추천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장대익 교수의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책은 한 순간에 내 단순한 사고를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책은 과학의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불분명한 세계인지 얘기한다.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에 따르면 내가 생각한 주장은 과학의 한 영역, 바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과학이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오직 경험만이 의미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하이데거의 ‘무’ 개념과 헤겔의 ‘이성’개념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비꼬았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경구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만약 누군가가 ‘난 80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까마귀를 조사해봤더니 까마귀는 모두 검더라’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까마귀는 검다’는 과연 진리인가. 아니다. 그가 전 세계 모든 곳을 한 곳도 빠짐없이 경험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가 우연히 빼놓고 온 지역에 하얀 까마귀가 산다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깔끔한 진리를 찾아 과학의 세계에 왔건만, 이쪽도 철학이나 사회의 영역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후 과학의 진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한 과학사가들의 노력은 계속된다. 포퍼는 경험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진술만 과학적 진술이라고 주장한다. ‘까마귀는 검다’는 주장 역시 경험으로 반박할 수 있기 때문에(흰 까마귀를 직접 본다면) 이 문장은 과학적 진술이다. 포퍼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래.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전부 경험 할 수 없으니, “까마귀는 검다”는 문장은 “입증되었다”라고 말하지 말고, “반증을 견뎌냈다”고 말하자’ 다시 말해 ‘까마귀가 검다’는 하얀 까마귀를 발견한 사람이 나오기 전까지는 진리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포퍼의 주장에도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도킨스가 얘기한 이기적 유전자 주장이나 블랙홀의 존재 유무는 경험적으로 반증할 수 없으니(유전자를 눈으로 본 사람이 있나?) 비과학적 진술이란 말인가. 이 때 쿤이 등장한다. 그의 주장은 과학혁명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파격적이었다. 쿤은 이야기한다. ‘반증가능성은 진리랑 상관없다. 원래 과학이란 게 과학자의 심리에 따라 변하거든. 예를 들어 뉴턴의 과학을 보자. 한 동안 뉴턴의 과학은 진리였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패러다임이었단 말이지. 과학자들은 뉴턴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연구 결과가 나와도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의 정확성을 의심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정확한 연구를 질타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사실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런 의심들이 누적되다보면 과학자들은 심리적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그 때 펑~하고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 이제 새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하고 새로운 진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헉. 그렇다면 이제 과학이 그처럼 강조하는 명징한 진리는 한 순간에 누더기로 변할 수밖에 없다. 쿤의 주장대로라면 이제 ‘세계란 우리가 패러다임을 통해 인식하는 바로 그것일 뿐, 과학 이론은 더 이상 자연의 거울이 아니’기 때문. 패러다임이 진리를 만든다면, 과연 어떤 패러다임이 진리에 가까운지 판별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때문에 쿤의 주장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파이어아벤트라는 학자는 어차피 도그마로서의 진리만이 존재한다면, 도그마의 격투 장에 점성술이나 마법도 전부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쯤 되면 ‘과학의 세계를 명징한 진리의 세계’라고 부르기 어렵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아예 과학의 진리도 사회적 권력 다툼에서 발생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과학이라는 것도 사회적 권력 유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란 의미다. (하지만 이는 일부의 사례를 과학 전체의 특성인양 부풀림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망원경으로 관측한 달은? 태양 주변을 도는 지구의 궤적은?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물이 된다는 화학공식은? 전부 권력의 쌈박질에서 이긴 사람의 주장이란 말인가. 지나치게 극단적인 주장이다.)


잠시 복잡해진 머리를 추스르고 처음으로 돌아 가보자. 애초에 인간은 호기심을 갖고 태어났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궁금해졌다. 경험과 논리로 인간은 자연의 실체를 하나씩 파헤쳤고, 그 과정에서 과학이 탄생했다. 자연의 비밀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호기심, 이것이야 말로 과학의 원동력이다. 때문에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비밀을 두고, 단순히 사회적으로 만들어 진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호기심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다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보여준 한계처럼, 지금 우리가 밝혀낸 과학적 사실이 모두 진리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뉴턴의 진리가 바뀌었듯, 언제 아인슈타인의 진리가 바뀔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연은 어떤 존재고 과학은 무엇을 하는 존재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장대익 교수의 멋진 정리를 한 번 들어보자. ‘이 자연은 말랑말랑한 고무 찰흙이라기보다는 엄청나게 큰 코끼리인지 모른다. 코끼리의 존재야말로 과학을 뭔가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는 차라리 장님이리라!’ (상대주의자들의 주장. 세상은 단순히 거대한 고무찰흙이다. 다만 아이들이 찰흙으로 똥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듯, 과학의 진리도 자연을 똥과 자동차로 설명할 따름이다. 그 누구도 ’고무 찰흙의 원래 모양은 이거다‘라고 말할 수 없듯, 과학자도 ’자연의 참 모습은 이거다‘라고 말 할 수 없다. 장 교수가 말한 고무찰흙은 이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 자연이라는 코끼리의 형태는 명확히 존재하고 인간이라는 장님의 호기심은 집요하게 코끼리의 형태를 추구한다. 고무찰흙이 아닌, 코끼리를 탐구하는 과학, 때문에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고무찰흙의 애매한 모양을 두고, 저건 모자다, 자동차다 설왕설래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요즘이 바로 코끼리의 모양을 밝히는 과학의 세계에 빠질 적기다. 이제 말 싸움은 좀 지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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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베르테르의 기쁨 - 알랭 드 보통의 유쾌한 철학 에세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명진 옮김 / 생각의나무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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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좋은 제목을 이렇게 의역해놨을까. 이 책은 철학이 우리의 삶에 주는 위안을 적은 책이다. 철학이 있었다면 젊은 베르타르가 슬픔 대신 기쁨을 맛봤을 것이란 이야긴가본데, 별로 감흥이 없다. 원제가 훨씬 좋다. 어설픈 제목만큼이나 번역도 별로고. 읽기 참 힘들었던 책. 역시 번역서에서 번역의 중요성이란....)

 

Q)

       얼마 전 결혼을 약속했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습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안정적인 직장을 갑자기 때려 치려 했던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약 1년 전, 새로운 꿈이 생겼거든요. 법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로스쿨이 생기면서 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전 회사일을 뒤로한 채 1년 가까이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로스쿨의 문은 턱없이 좁았습니다. 마지막 결과가 발표 나던 날, 술을 마시고 여자 친구에게 전화 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고 제대로 로스쿨 준비를 해보고 싶다고요. 여자 친구는 그런 절 쉽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몇 달 뒤, 여자 친구는 결국 이별을 통보했습니다. 저보고 현실을 너무 모른다고 하더군요. 로스쿨 준비로 회사 일을 뒤로 미뤄놨던지라, 이미 회사에선 선배 동료들과 멀어질 대로 멀어진 상태였고요. 친구들조차 제 로스쿨 도전을 두고 ‘무모하다’고 말하며, 절 한심하게 쳐다봤습니다. 외톨이가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나이 30을 훌쩍 넘어가지고 갑자기 회사를 때려 치고 새로운 꿈을 찾으려는 도전이 과연 그렇게 잘못된 건가요? 여자친구는 떠나가고, 성적은 도통 오르지 않고. 정말 괴롭습니다.  

 

1) 소크라테스

       음. 일단 진정 하시고요. 로스쿨 도전에 대한 주변의 반응이 정말 싸늘하군요. 하지만 외로워 할 필요 없습니다. 일단 우리 주변을 둘러보죠. 현실은 당신에게 끊임없이 인생의 로드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면 취업을 하고, 돈을 벌어 결혼을 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서 행복하게 살고, 등등... 이것이 바로 당신이 사는 세상의 상식일 겁니다. 그러니 현실에 발을 담근 30대 중반의 남성이 새롭게 꿈을 꾸자 비난이 이어지는 겨죠. 하지만 당신을 비난하는 그 상식의 기준이 과연 온당할까요. 전 2000년 전, 고대 그리스의 비합리적인 상식과 사회적 관습을 탈피하기 위해 거리에서 여러 사람에게 질문을 하곤 했습니다. 그들이 믿는 상식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식이었죠. 일부는 제 질문을 듣고 잘못된 상식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수는 상식에 도전하는 절 불편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 그리스 젊은이들을 현혹시켰다는 이유로 독살 형에 처해졌습니다. 참으로 억울했죠. 하지만 분명한 건 상식이란 것이 다수가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우리의 사고와 삶의 방식이 어떤 반대에 봉착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을 그릇된 것으로 확신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49)’는 것이죠. 반대의 양은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계속 정진하십시오. 

2) 에피쿠로스

       또 그 놈의 돈이군요. 사랑이 현실이란 이름의 돈 앞에 무릎 꿇는 일을 수없이 지켜봤습니다. 여자 친구는 돈을 벌지 못하는 남편을 받아들일 수 없었겠죠? 돈.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죠. 그러나 돈이 가장 중요할까요? 그 부분은 조금 달리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요. 행복이죠. 그렇다면 무엇이 우릴 행복하게 만들어줄까요. 전 세 가지를 꼽습니다. 당신이 내뱉은 말을 이해해 줄 우정, 변덕스러운 자의 요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자유, 불안을 다스려줄 사색, 이 세 가지면 충분합니다. 실제로 저희 학파는 최소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기반 위에서 함께 모여 사색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2000년 전에도, 상업 활동이 있었지만, 우리는 검소한 삶을 사는 대가로 노동을 버리고 자유를 택했습니다. 그 결과 우린 인생에서 쾌락을 즐기는, 쾌락주의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장 돈을 벌지 못하는 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혹시 돈을 벌지 못한다고 해도, 꿈을 쫒아가는 일이 더욱 행복하다면, 더 큰 쾌락을 쫒아가는 일은 당연한 겁니다. ‘기분을 모든 선한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삼아라.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쾌락이다.’(115) 힘내십시오.
 

3)세네카

       당신은 현재 좌절했군요. 음. 사실 모든 좌절은 우리의 희망과 그 실현을 가로막고 있는 현실 사이에서 빚어지는 갈등이 핵심입니다. 당신은 로스쿨에 합격하기를 희망했고, 또 설령 낙방하더라도 여자 친구가 당신의 결정을 환영해 줄 것이라 희망했습니다. 물론 현실은 낙방과 이별이었지만요. 그 간극에서 좌절이 발생하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 당신만 좌절을 겪는 건 아닙니다. 어차피 현실과 사람의 희망은 정확히 일치할 수 없는 거거든요. ‘만약 당신이 모든 근심을 날려버리길 원한다면, 당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그 일이 분명히 일어날 거라고 생각하십시오.’(153) 이를 통해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고요. 또 무엇보다 차분한 상태에서 실제로 당신의 걱정을 분석해본다면, 그 걱정이 얼마나 사소했는지 깨달을 수 있을 겁니다. 당신의 문제도 마찬가집니다. 당신은 애초부터 혼자였습니다. 연인과의 이별은 결국 원래대로 돌아온 것일 뿐, 그리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지금의 슬픔이 이를 못 느끼게 만드는 겁니다. 변화 불가능한 현실을 파악하고, 이를 평온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입니다. 슬픔과 좌절은 더 큰 슬픔을 부르는 법. 평정심을 하루 빨리 되찾으시길 바랍니다.

4)몽테뉴

       간단하게 두 가지만 말씀드리죠. 첫 째, 진리로 여겨지는 사회적 관습, 전부 상대적인 진리일 뿐입니다. 소크라테스 선생 말씀대로 사회적 관습이 모두 옳은 건 아니란 말입니다. 어떤 부족 사회에선 40넘도록 일을 하지 않는 가장이 전혀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젊었을 적, 2년 가까이 유럽 전역을 여행해봤기 때문에 아는 겁니다. 때문에 갑자기 직장을 때려치우려는 당신의 행동이 21세기 한국 사회의 눈에는 이상할 수도 있지만 중세의 눈, 또는 아프리카 부족의 눈엔 당연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는 사실 명심하고요. 두 번째로, 로스쿨 성적에 너무 집착하지 마세요. 당신은 현재의 어려움을 통해 법전 한 권을 다 외워도 얻을 수 없는 인생의 지혜를 습득하는 과정이니까요. ‘지혜란 어느 인생에서 발견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야기들이 제아무리 소박하다 하더라도 옛날의 그 많은 책에서보다 우리 자신에게서 더 위대한 통찰력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264) 저 역시 제 명저 <수상록>을 쓰면서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자주 혼동했는데요. 그게 뭐 중요한가요? 확실하지도 않는 사회적 관습에 얽매여, 다양한 경험과 사고를 통한 지혜의 습득을 놓치는 것이 분명 더욱 불행한 일일 겁니다.

5)쇼펜하우어

       사랑.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사랑의 실상을 한 번 들어보면 생각이 조금 바뀔 수도 있을걸세. 혹시 자네, 내가 말한 ‘생에 대한 의지’라고 아나. 우리 삶은 바로 맹목적이고 비합리적인, 생에 대한 의지로 가득 차있지. 우리 몸은 생에 대한 의지의 하인에 불과해. 우리의 의식은 무언가를 주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라 믿겠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게 무의식을 지배하는 생에 대한 의지의 작용으로 이뤄지는 거니까. 결국 생에 대한 의지는 삶에 대한 맹목적 요구고, 그 의지가 우리를 사랑하게 만드는 거야. 우리의 종족을 더욱 번식하게 만들기 위한 맹목적인 생의 의지가 사랑이란 형태로 나타나는 거란 말이지. 결국 자네 여자 친구가 자넬 버린 것도 그녀의 생에 대한 의지가 자넬 거부한 것일 뿐이야. 더 나은 종족 번식에 자네가 도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거고. ‘사랑이란 것은 생에 대한 의지가 이상적인 상대를 발견했다는 것을 의식 밖으로 드러내는 것에 다름 아니거든.’ (299) 그러니까 이봐. 사랑이란 게 애초부터 자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었어. 평생 어둠 속에서 흙을 파야 하는 두더지의 삶이나, 사랑을 추구하고 카페에서 잡답이나 나누고, 아기를 가지는 것이나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312) 그러니 특별히 힘들어하지 말게. 원래 삶이 그런 거니까.

6)니체

       너무나도 괴로운 당신. 몽테뉴 선생이 말씀하신대로 자네가 겪고 있는 고통이 자네에게 어떤 지혜를 안겨줄지 한 번 생각해보지 않겠나? 고통은 결코 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네. 왜냐하면 인간의 완성이란 ‘고통을 피함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의 역할을 “선한 무엇인가를 이루는 과정에 겪는 자연스럽고 또 피할 수 없는 단계”로 인정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라네.’(333) 다시 말해, 자네가 겪는 실연, 낙방, 그리고 외면 같은 고통을 통해 자넨 한층 더 강해지고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 나가는 거란 말일세. 산에 오르는 것이랑 비슷한 걸세. 오르는 과정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그 결과를 겪어야만 정상이라는 달콤함을 맛볼 수 있는 거지. ‘우리가 만약에 과실을 많이 맺는 비옥한 들판이라면, 어떤 것이든 다 흡수하지 않고 그저 흙바닥을 통과하게 내버려두는 일은 없을 것이며, 어떤 사건이나 사물, 사람에서도 유익한 비료를 발견할 것일세.' (354) 중요한 것은 고통이 아닌, 고통을 어떻게 위대함으로 끌어올리느냐 일세. 좌절 속에 나락으로 떨어진다면 그건 산에 오르다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주저 않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거든. 고통을 긍정의 힘으로 성숙시켜 더 위대한 인물이 되게. 그럼 그 고통은 고통이 아닌 축복이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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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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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집 장만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어?” 요즘 주변에서,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종종 들려오는 목소리다. 부모님은 작년 경제 위기 때 무리를 좀 해서라도 집을 사놨어야 했다며, 최근 부쩍 오른 집값을 바라보고 쓴맛을 다시기도 한다. 사실 우리 모두에겐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주입된 미래의 공식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장만한다.’ 언제나 공식의 마지막 장면엔 힘겹게 장만한 집을 바라보며 아내를 한 팔로 안고 다른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가장의 모습이 등장했다. 우리 사회에서 주택 구입은 어른의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때문에 주변에선 ‘취업을 한 뒤, 결혼을 한’ 상태에 있는 내게 '아이 낳기‘와 ’집 구입‘을 빈번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집 장만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지곤 했다. 너무 희미해서 잘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 세상의 공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은 꿈틀거림이었다.


김영하의 에세이집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를 읽었다. 책엔 김영하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시절 했던, ‘자기 안의 어린 예술가를 구하라’는 강연이 소개되어 있다. 요지는 ‘예술을 순수하게 열망하던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배움의 과정에서 어린 예술가는 외부의 평가와 반응에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 때문에 학생들의 첫 번째 임무는 어린 예술가가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호하는 일, 배움은 다음 문제다’라는 것이었다.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내 안에서 꿈틀거렸던 작은 움직임의 실체가 드러났다. 바로 내 안의 어린 탐험가였다. 우리 내면엔 사소한 지루함과 일상의 짧은 반복을 견디지 못하는 역동적인 탐험가가 살고 있었다. 어린 탐험가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장래희망을 6개월에 한 번 꼴로 바꿔놓았고, 언제나 집 밖을 싸돌아다니는 사고뭉치로 만들었다. 그 시절 꿈은 원대했고, 꿈속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북극과 남극을 탐험하는 모험가가 되기도 했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세계 최고의 배우가 되기도 했으며, 질병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정글로 들어가는 의사가 되기도 했다. 어린 탐험가가 왕성했던 시절, 세상의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32평짜리 아파트 장만이란 꿈은 어린 탐험가의 세상에 들어오기엔 너무나 사소했다.


하지만 세상은 어린탐험가에게 냉혹했다. 눈앞에 놓인 성적은 어린 탐험가의 꿈을 몽상으로 폄하했다. 대학도 못 갈 놈이 뭔 탐험가고 의사냐며 면박 줬다. 대학 졸업 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먹고 사는 문제는 어린 탐험가의 순수함을 철없음으로 바꿔놓았다. 소설가를 꿈꾸며 취업을 거부하는 친구는 현실에서 도태된 사람으로 치부됐고, 우리 모둔 사회가 지정해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용 썼다. 어린 시절,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던 어린 탐험가는 현실 속에서 식물인간이 된 지 오래였다. 때문에 천차만별이던 어린 시절의 꿈은 점점 획일화됐고, 모두가 대기업에 입사라는, 또는 고시 패스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전력투구했다. 집 장만을 요구받는 지금, 인공호흡기를 달고 간신히 연명하는 어린탐험가의 목숨마저 위태로워 보인다. 집을 장만하기 위해 대출금을 얻고,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돈 먹는 기계가 되어 꿈을 무럭무럭 키워가겠자. 갑자기 뛴 대출 금리에 대출금을 갚는 내 허리는 휘어갈 것이고. 대출금과 가족의 생계를 생각하면, 일단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할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자유는 사치니까. 똥을 된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옆에서 비실비실 웃으며 ‘그렇죠. 손맛이 느껴지는 묵은 장이죠’라고 비위나 맞추며 살 수밖에 없다. 어린탐험가가 숨 쉴 공간은 도저히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는 현실이다.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업>은 우리 내면에서 퇴회되다시피 한 어린 탐험가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칼은 아내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폭포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폭포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칼의 어린 탐험가는 여전히 뇌사상태였다. 하지만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물품을 집어 던지는 순간 칼은 내면의 어린 탐험가를 되살려낸다. 어린탐험가의 본질은 자유다. 오늘은 아르헨티나에서, 내일은 파라과이에서 보낼 수 있는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어린 탐험가가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불필요한 욕망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소유를 추구하게 만든다. 양 손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엄청난 양의 소유물은 우리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법정스님이 <무소유>에서 밝혔듯, 소유에 대한 집착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도 속박한다. 무거워진 몸과 마음이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 때문에 칼이 자신의 물품을 내던지는 순간, 풍선 집은 떠오르고 칼은 자유롭게 하늘을 움직인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역시 김영하가 안정적인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어느 날 불쑥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으로 떠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시칠리아로 떠나기 전 무수한 물품과 다양한 계약들을 정리하며 김영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가진 그 수많은, 그러나 한 번 들춰보지도 않은 DVD들, 듣지 않은 CD들, 먼지 쌓인 책들,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 애썼던 것일까?.......그렇게 모든 것이 막힘없이 흘러갔다면 내 삶은 좀 더 가벼워질 수 있었을 텐데, 더 많은 것이 샘솟았을지도 모르는데,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생을 흘러가는 삶, 스트리밍(Streaming) 라이프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더욱 어린 나이에 내면의 어린 탐험가와 이별을 고하고, 다시는 그를 찾지 않는다. 일상의 무거움에 짓눌려 하루를 쳇바퀴 돌듯 힘겹게 사는 사람에게 어찌 보면 어린 탐험가를 찾는 일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업>의 주인공 칼처럼, 퇴직 전까진 죽어라 일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라는 이야기처럼 우리도 ‘네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린 탐험가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반드시 어린탐험가를 부활시킬 필요도, 어린탐험가와 함께 일상을 박차고 나설 필요는 없다. 다만 어린 탐험가의 존재 자체만을 인식하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에 매몰되어 좀비처럼 살아가는 비극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집 장만 문제로 돌아가 보자. 지금 집을 구입한다면 대출금을 갚기 위해 지금보다 더 열심히 돈을 벌수도 있고, 남들보다 빨리 정착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내 안의 어린 탐험가는 현실의 짐에 짓눌려 빛의 속도로 사라질 수도 있다. 하여 수년 후, 내 자식이 ‘아버지 이젠 더 이상 전학가기 싫어요’라고 울기 전까진, 집 사는 문제는 좀 미뤄놓고, 내 안의 어린 탐험가를 되살리는 데 주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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