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과학 분야의 책을 꾸준히 읽어줄 필요가 있어.” 아내의 선배가 했던 말이란다. 아마도 나이가 들수록 사람이 사변적으로 변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 과학 서적을 읽으란 의미일 게다. 실제로 내 블로그의 글을 살펴보니, 올해의 글들은 대부분 행복/자본주의/인생 등의 얘기가 많다. 몸이 현실에 깊숙이 박히면 박힐수록, 머리는 현실을 떠나 뜬 구름 위의 얘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걸까. 사실 행복과 인생,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의 부조리는 그 모습이 명확하지 않다. 다시 말해 어제 산 포도의 형태는 내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자본주의와 행복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때문에 누구는 행복이 쾌락에 있다고 말하고, 누구는 사회적 성공에 있다고 주장한다. 서로의 말은 180도 다르지만, 누가 진리인지는 쉽게 결판이 나지 않는다. 여기에 인문/사회 분야의 답답함이 있다. 반면에 과학은 다르다.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눈으로 본다. ‘F=ma'라는 주장과 ’F=mb‘라는 주장이 부딪힐 리 없다. 과학의 진리는 분명하다. 때문에 아내의 선배는 백날 떠들어 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에만 질퍽거리는 것보다는, 가끔 명징한 답이 보이는 과학의 세계를 추천한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장대익 교수의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책은 한 순간에 내 단순한 사고를 산산조각내고 있었다. 책은 과학의 세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불분명한 세계인지 얘기한다.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에 따르면 내가 생각한 주장은 과학의 한 영역, 바로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과학이었다. 논리 실증주의자들은 오직 경험만이 의미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그들은 하이데거의 ‘무’ 개념과 헤겔의 ‘이성’개념이 얼마나 비논리적인지를 비꼬았고,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유명한 경구를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논리 실증주의자들의 주장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만약 누군가가 ‘난 80년 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까마귀를 조사해봤더니 까마귀는 모두 검더라’라고 말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까마귀는 검다’는 과연 진리인가. 아니다. 그가 전 세계 모든 곳을 한 곳도 빠짐없이 경험했다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겠는가. 만약 그가 우연히 빼놓고 온 지역에 하얀 까마귀가 산다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깔끔한 진리를 찾아 과학의 세계에 왔건만, 이쪽도 철학이나 사회의 영역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이후 과학의 진리를 깔끔하게 정리하기 위한 과학사가들의 노력은 계속된다. 포퍼는 경험적으로 반박할 수 있는 진술만 과학적 진술이라고 주장한다. ‘까마귀는 검다’는 주장 역시 경험으로 반박할 수 있기 때문에(흰 까마귀를 직접 본다면) 이 문장은 과학적 진술이다. 포퍼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래.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전부 경험 할 수 없으니, “까마귀는 검다”는 문장은 “입증되었다”라고 말하지 말고, “반증을 견뎌냈다”고 말하자’ 다시 말해 ‘까마귀가 검다’는 하얀 까마귀를 발견한 사람이 나오기 전까지는 진리로 인정해줘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포퍼의 주장에도 문제점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도킨스가 얘기한 이기적 유전자 주장이나 블랙홀의 존재 유무는 경험적으로 반증할 수 없으니(유전자를 눈으로 본 사람이 있나?) 비과학적 진술이란 말인가. 이 때 쿤이 등장한다. 그의 주장은 과학혁명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파격적이었다. 쿤은 이야기한다. ‘반증가능성은 진리랑 상관없다. 원래 과학이란 게 과학자의 심리에 따라 변하거든. 예를 들어 뉴턴의 과학을 보자. 한 동안 뉴턴의 과학은 진리였다.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는 패러다임이었단 말이지. 과학자들은 뉴턴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연구 결과가 나와도 과학자들은 패러다임의 정확성을 의심하기보다는 자신의 부정확한 연구를 질타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패러다임에 맞지 않는 사실들이 늘어나기 시작한다. 그런 의심들이 누적되다보면 과학자들은 심리적 위기감을 느끼게 되고, 그 때 펑~하고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 이제 새 패러다임이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하고 새로운 진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과학이 형성되는 과정이다’
헉. 그렇다면 이제 과학이 그처럼 강조하는 명징한 진리는 한 순간에 누더기로 변할 수밖에 없다. 쿤의 주장대로라면 이제 ‘세계란 우리가 패러다임을 통해 인식하는 바로 그것일 뿐, 과학 이론은 더 이상 자연의 거울이 아니’기 때문. 패러다임이 진리를 만든다면, 과연 어떤 패러다임이 진리에 가까운지 판별하는 일은 불가능해진다. 때문에 쿤의 주장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파이어아벤트라는 학자는 어차피 도그마로서의 진리만이 존재한다면, 도그마의 격투 장에 점성술이나 마법도 전부 참여할 수 있게 하자는 극단적인 주장을 펴기도 한다. 이쯤 되면 ‘과학의 세계를 명징한 진리의 세계’라고 부르기 어렵다. 일부 사회학자들은 아예 과학의 진리도 사회적 권력 다툼에서 발생한 산물이라고 주장한다. 결국 과학이라는 것도 사회적 권력 유지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란 의미다. (하지만 이는 일부의 사례를 과학 전체의 특성인양 부풀림 감이 없지 않다. 그렇다면 내가 망원경으로 관측한 달은? 태양 주변을 도는 지구의 궤적은?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물이 된다는 화학공식은? 전부 권력의 쌈박질에서 이긴 사람의 주장이란 말인가. 지나치게 극단적인 주장이다.)
잠시 복잡해진 머리를 추스르고 처음으로 돌아 가보자. 애초에 인간은 호기심을 갖고 태어났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이 궁금해졌다. 경험과 논리로 인간은 자연의 실체를 하나씩 파헤쳤고, 그 과정에서 과학이 탄생했다. 자연의 비밀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호기심, 이것이야 말로 과학의 원동력이다. 때문에 과학이 밝혀낸 자연의 비밀을 두고, 단순히 사회적으로 만들어 진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의 호기심에 대한 모독이다. 그렇다고 논리실증주의자들이 보여준 한계처럼, 지금 우리가 밝혀낸 과학적 사실이 모두 진리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다. (뉴턴의 진리가 바뀌었듯, 언제 아인슈타인의 진리가 바뀔지 모른다.) 그렇다면 자연은 어떤 존재고 과학은 무엇을 하는 존재란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장대익 교수의 멋진 정리를 한 번 들어보자. ‘이 자연은 말랑말랑한 고무 찰흙이라기보다는 엄청나게 큰 코끼리인지 모른다. 코끼리의 존재야말로 과학을 뭔가 특별하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 것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는 차라리 장님이리라!’ (상대주의자들의 주장. 세상은 단순히 거대한 고무찰흙이다. 다만 아이들이 찰흙으로 똥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들듯, 과학의 진리도 자연을 똥과 자동차로 설명할 따름이다. 그 누구도 ’고무 찰흙의 원래 모양은 이거다‘라고 말할 수 없듯, 과학자도 ’자연의 참 모습은 이거다‘라고 말 할 수 없다. 장 교수가 말한 고무찰흙은 이런 의미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렇다. 자연이라는 코끼리의 형태는 명확히 존재하고 인간이라는 장님의 호기심은 집요하게 코끼리의 형태를 추구한다. 고무찰흙이 아닌, 코끼리를 탐구하는 과학, 때문에 과학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고무찰흙의 애매한 모양을 두고, 저건 모자다, 자동차다 설왕설래하는 횟수가 늘어나는 요즘이 바로 코끼리의 모양을 밝히는 과학의 세계에 빠질 적기다. 이제 말 싸움은 좀 지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