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 - 시칠리아에서 온 편지
김영하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슬슬 집 장만을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어?” 요즘 주변에서, 그리고 내 마음 속에서 종종 들려오는 목소리다. 부모님은 작년 경제 위기 때 무리를 좀 해서라도 집을 사놨어야 했다며, 최근 부쩍 오른 집값을 바라보고 쓴맛을 다시기도 한다. 사실 우리 모두에겐 어렸을 때부터 막연하게 주입된 미래의 공식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한 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집을 장만한다.’ 언제나 공식의 마지막 장면엔 힘겹게 장만한 집을 바라보며 아내를 한 팔로 안고 다른 손으로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는 가장의 모습이 등장했다. 우리 사회에서 주택 구입은 어른의 궤도에 성공적으로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때문에 주변에선 ‘취업을 한 뒤, 결혼을 한’ 상태에 있는 내게 '아이 낳기‘와 ’집 구입‘을 빈번하게 요구했다. 하지만 집 장만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지곤 했다. 너무 희미해서 잘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 세상의 공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작은 꿈틀거림이었다.


김영하의 에세이집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를 읽었다. 책엔 김영하가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시절 했던, ‘자기 안의 어린 예술가를 구하라’는 강연이 소개되어 있다. 요지는 ‘예술을 순수하게 열망하던 내면의 어린 예술가가 모두에게 있다. 하지만 배움의 과정에서 어린 예술가는 외부의 평가와 반응에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 때문에 학생들의 첫 번째 임무는 어린 예술가가 상처받지 않도록 잘 보호하는 일, 배움은 다음 문제다’라는 것이었다.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내 안에서 꿈틀거렸던 작은 움직임의 실체가 드러났다. 바로 내 안의 어린 탐험가였다. 우리 내면엔 사소한 지루함과 일상의 짧은 반복을 견디지 못하는 역동적인 탐험가가 살고 있었다. 어린 탐험가는 초등학교 시절, 우리의 장래희망을 6개월에 한 번 꼴로 바꿔놓았고, 언제나 집 밖을 싸돌아다니는 사고뭉치로 만들었다. 그 시절 꿈은 원대했고, 꿈속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만으로도 하루가 모자라던 시절이었다. 북극과 남극을 탐험하는 모험가가 되기도 했고,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빛나는 세계 최고의 배우가 되기도 했으며, 질병의 원인을 밝히기 위해 정글로 들어가는 의사가 되기도 했다. 어린 탐험가가 왕성했던 시절, 세상의 모든 것이 호기심의 대상이었고, 32평짜리 아파트 장만이란 꿈은 어린 탐험가의 세상에 들어오기엔 너무나 사소했다.


하지만 세상은 어린탐험가에게 냉혹했다. 눈앞에 놓인 성적은 어린 탐험가의 꿈을 몽상으로 폄하했다. 대학도 못 갈 놈이 뭔 탐험가고 의사냐며 면박 줬다. 대학 졸업 후,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먹고 사는 문제는 어린 탐험가의 순수함을 철없음으로 바꿔놓았다. 소설가를 꿈꾸며 취업을 거부하는 친구는 현실에서 도태된 사람으로 치부됐고, 우리 모둔 사회가 지정해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용 썼다. 어린 시절, 저마다의 목소리를 내던 어린 탐험가는 현실 속에서 식물인간이 된 지 오래였다. 때문에 천차만별이던 어린 시절의 꿈은 점점 획일화됐고, 모두가 대기업에 입사라는, 또는 고시 패스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전력투구했다. 집 장만을 요구받는 지금, 인공호흡기를 달고 간신히 연명하는 어린탐험가의 목숨마저 위태로워 보인다. 집을 장만하기 위해 대출금을 얻고, 그러는 사이에 아이들은 돈 먹는 기계가 되어 꿈을 무럭무럭 키워가겠자. 갑자기 뛴 대출 금리에 대출금을 갚는 내 허리는 휘어갈 것이고. 대출금과 가족의 생계를 생각하면, 일단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할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자유는 사치니까. 똥을 된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 옆에서 비실비실 웃으며 ‘그렇죠. 손맛이 느껴지는 묵은 장이죠’라고 비위나 맞추며 살 수밖에 없다. 어린탐험가가 숨 쉴 공간은 도저히 있으려야 있을 수가 없는 현실이다.


픽사의 신작 애니메이션 <업>은 우리 내면에서 퇴회되다시피 한 어린 탐험가에 대한 이야기다. 주인공 칼은 아내와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폭포로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폭포에 도착했을 때만해도 칼의 어린 탐험가는 여전히 뇌사상태였다. 하지만 아내와의 추억이 담긴 물품을 집어 던지는 순간 칼은 내면의 어린 탐험가를 되살려낸다. 어린탐험가의 본질은 자유다. 오늘은 아르헨티나에서, 내일은 파라과이에서 보낼 수 있는 이동의 자유가 있어야 어린 탐험가가 살아갈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불필요한 욕망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소유를 추구하게 만든다. 양 손을 가득 채우고도 남는 엄청난 양의 소유물은 우리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법정스님이 <무소유>에서 밝혔듯, 소유에 대한 집착은 몸뿐만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도 속박한다. 무거워진 몸과 마음이 자유롭게 이동하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 때문에 칼이 자신의 물품을 내던지는 순간, 풍선 집은 떠오르고 칼은 자유롭게 하늘을 움직인다.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역시 김영하가 안정적인 주변 환경을 정리하고 어느 날 불쑥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섬으로 떠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다. 시칠리아로 떠나기 전 무수한 물품과 다양한 계약들을 정리하며 김영하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가진 그 수많은, 그러나 한 번 들춰보지도 않은 DVD들, 듣지 않은 CD들, 먼지 쌓인 책들, 도대체 왜 그렇게 많은 것들을 소유하려 애썼던 것일까?.......그렇게 모든 것이 막힘없이 흘러갔다면 내 삶은 좀 더 가벼워질 수 있었을 텐데, 더 많은 것이 샘솟았을지도 모르는데, 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인생을 흘러가는 삶, 스트리밍(Streaming) 라이프라고 부를 수는 없을까?”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더욱 정교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더욱 어린 나이에 내면의 어린 탐험가와 이별을 고하고, 다시는 그를 찾지 않는다. 일상의 무거움에 짓눌려 하루를 쳇바퀴 돌듯 힘겹게 사는 사람에게 어찌 보면 어린 탐험가를 찾는 일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업>의 주인공 칼처럼, 퇴직 전까진 죽어라 일하며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김영하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라는 이야기처럼 우리도 ‘네가 너의 곁에 잠시 살았다는 걸’이라고 이야기하는 어린 탐험가의 목소리를 기억해야 한다. 반드시 어린탐험가를 부활시킬 필요도, 어린탐험가와 함께 일상을 박차고 나설 필요는 없다. 다만 어린 탐험가의 존재 자체만을 인식하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자본주의 사회의 일상에 매몰되어 좀비처럼 살아가는 비극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시 집 장만 문제로 돌아가 보자. 지금 집을 구입한다면 대출금을 갚기 위해 지금보다 더 열심히 돈을 벌수도 있고, 남들보다 빨리 정착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내 안의 어린 탐험가는 현실의 짐에 짓눌려 빛의 속도로 사라질 수도 있다. 하여 수년 후, 내 자식이 ‘아버지 이젠 더 이상 전학가기 싫어요’라고 울기 전까진, 집 사는 문제는 좀 미뤄놓고, 내 안의 어린 탐험가를 되살리는 데 주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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