랄랄라 하우스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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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는 집요하다. 하나의 생각이 떠오르면 그 생각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특히 그가 쓴 산문집을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는 냉소적이다. 그의 냉소에서 바로 유머가 나온다. 그가 지닌 냉소와 집요함이 결합할 때 ‘김영하스러운’ 산문이 완성된다. 내가 아는 김영하는 지금까지 이래왔다. 그래서 헌병 시절 군화 닦는 자신의 모습을 집요할 정도로 자세하게 묘사한다. (심지어 구두약 홈페이지 소개까지 하고 있고 자신이 몇 번째 방문객이었는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집요함 뒤에는 군대의 비효율성을 가볍게 냉소하는 김영하의 비웃음이 숨어있다. 그래서 김영하의 글은 집요함을 통해 냉소를 실현시킨다고 말할 수 있다. <랄랄라 하우스>에도 ‘랄랄라~’ 뒤에는 김영하의 냉소가 숨겨져 있다. 그래서 김영하스럽게 재밌다.


<랄랄라 하우스>는 김영하가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냥 편하게 쓴 글이다. 어떤 의미를 두고 쓴 글이 아니란 이야기다. 다르게 말하면 가볍게 읽어달라고 그는 독자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친구 집 놀러가서 친구가 올 때까지 남의 방에서 뒹굴며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기 좋아하는 분들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김영하는 이 책을 소개한다. 이처럼 김영하는 독자들이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썼다. 하지만 예의 김영하의 날카로움은 이 책 여기저기서 발견된다.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는 인상을 자주 주고 있다.


우선 이 책에서도 김영하의 날카로움은 냉소와 집요함을 무기로 등장한다. 야호에 관한 글을 보자. 김영하는 야호를 하지 말래도 하는 사람들을 기가 막히게 조소한다. 바로 그들에게 야호를 적극 권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여기서 김영하의 집요함은 시작된다. ‘문화시민은 야호를 합니다’에서부터 ‘57분 교통정보에서 “오늘 주말을 맞아 산에 가시는 분들 많으실 텐데, 야호 잊으시면 안되겠죠?”라고 멘트하도록 하자’는 말까지 10개 정도의 문구를 예로 들며 야호를 권장하라고 한다. 그리고 말한다. 이렇게 권장하면 그들도 안 할 거라고. 김영하가 집요하게 야호 권장 문구를 패러디하는 글을 계속 읽다보면 그의 재치에 웃지 않으려야 안 웃을 수가 없고 동시에 시원함도 느낀다. 펜으로써 규정을 어기는 등산객들을 풍자한다고나 할까.


김영하는 이런 식이다. 그는 유머를 안다. 직설적으로 비판하는 적은 없다. 그건 정공법이다. 효과는 둘째 치고 딱딱하다. 하지만 그는 웃음을 이용해 어렴풋하게 무언가를 비판하고 불평을 토해낸다. 그가 뛰어난 문학가인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 같다. 작가와 철학가의 차이는 이렇다. 철학가는 자기가 생각한 것을 그대로 표현해낸다. 하지만 작가는 철학가가 생각한 것을 생각함과 동시에 그것을 이야기의 형식에 담아서 표현한다. 독자가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지만 일단 이해하고 나면 문학작품의 메시지 전달 효과는 철학의 그것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김영하는 작가란 의미다. 그는 그가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냉소와 집요함, 그리고 유머란 포장지에 싸서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냉소와 집요함이 박민규 코드와 다르고 또 성석제 코드와 다른 것이다.


이렇게 대충대충 쓴 글들 같지만 중간 중간에는 날카로움과 진지함이 엿보이기도 한다. 태극기 단상에서는 좀 더 직접적으로 우리 사회에 남아있는 국가주의적 잔재에 대해 비판한다. 또한 불빛을 잡으려고 애쓰다 항상 허탕만 치는 사냥개 이야기를 들려주며 우리 인생의 허황됨을 이야기해준다. 막 웃으며 그의 글들을 읽다가도 중간 중간에 ‘잠깐 책을 덥고 이 부분은 생각해도 좋을 것 같아’라는 김영하의 말이 들리는 듯 하다. 그래서 김영하의 글을 웃고 끝나는 글과 다르다.


책은 처음에는 그가 기르던 고양이 이야기를 자세하게 하고 있다. 그 후 짧은 단상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자기가 쓴 문학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이처럼 자세하게 자신의 생각과 생활, 그리고 문학 이야기를 우리에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 이 책을 다 읽고나면 김영하의 서랍은 원 없이 뒤진 느낌이 든다. 대화 한 번 나눈 적 없는 모르는 사람이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그와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느낌마저 든다.


수능이 끝나고 책을 읽고 싶지 않지만 특별히 할일이 없는 사람, 또는 자기 전에 가볍게 읽을 책을 찾는 분들께 이 책을 권하고 싶다. 물론 심각함이 좋고 진지함이 좋다면, 좀 더 거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김영하의 책은 금물이다. 하지만 그 외 사람들이라면, 인생에서 유머를 중시하는 분이라면 정말 모두에게 이 책을 강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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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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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이른 아침의 차가운 서리는 꽃의 목을 벤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E. Dickinson)은 이 광경을 보고  시를 지었다. 그녀는 자연의 잔혹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을까? 아니면 포우(E. A Poe)처럼 아름다움이 죽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아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자연은 잔인하지도, 그렇다고 선하지도 않은 존재였다. 그랬다. 자연은 목적이 없었다. 그저 섭리에 따라 운행할 뿐이었다. 예쁜 꽃의 목을 벤 것도 자연의 섭리였을 뿐이었다.


디킨슨의 시는 삶에 대한 허무가 가득 담겨있다. 자연은 목적이 없다는 디킨슨의 말 뒤에 니체(F. Nietzsche)가 살며시 나타난다. 니체 역시 삶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음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을 이어 받은 실존주의 철학자들 역시 인간의 실존에 초점을 맞추며 삶의 무목적성을 이야기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소설가 카뮈(A. Camus)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인생을 대가 없는 노동으로 묘사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권악징선(勸惡懲善)이 존재하는 곳도 아니다. 단지 의미없이 시간은 흐르고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 곳일 뿐이다.


이 시대의 소설가 김훈은 인생의 그러한 특성을 예리한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집 <강산무진>에는 우리의 목을 이유 없이 베어가는 차가운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김훈의 단편 소설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는 바로 ‘삶의 무목적성’이다. 


강산무진의 주인공은 간암 말기 환자다. 삶을 정리하기 위해 그가 하는 일은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전처에게 위자료를 주며 자식들에게 발병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주인공의 세포는 하나하나 죽어간다. 하지만 삶은 그의 딱한 상황을 동정하지 않는다. 삶은 그저 계속 진행된다. 특별히 변화한 것은 없다. 여전히 아내에게 남은 위자료를 줘야하는 일이 남아있으며 주식을 처분하기 위해 상담원과 통화해야 한다. 피로를 느끼지 않을 만큼의 산책도 해야 하며 어머니의 묘자리도 정리해야 했다. 간암이 걸렸지만 삶은 변화가 없다.


화장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가 죽었다. 불치병 아내를 위해 수년간 간병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삶에 중요한 것은 광고 문구를 정하는 일이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려는 주민을 접대하는 일이다. 배웅의 주인공 역시 사랑했던 여인을 떠나보냄에도 사납금을 채워야 한다. 삶은 어떠한 목적 없이 흘러간다. 언니의 폐경의 주인공 역시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새로운 남자가 생겨도 시어머니의 팔순은 참여해야 하고 새 남자는 정리해고를 당한다. 주인공은 생리를 하고 패드를 산다. 바람피운 남편을 징벌하고 착한 언니를 권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김훈이 삶의 무목적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정밀묘사다. 각각의 주인공이 갖고 있는 직업에 대한, 주인공에 대한 주변 반응에 대한 정밀 묘사를 통해 삶의 무관심을 그려낸다. 그래서 김훈의 소설은 애정이 없어 보이며 잔인해 보인다. 항상 시작과 끝은 같다. 사건의 진행은 있어도 발전은 없다. 하지만 김훈에 대한 반응은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끊임없이 목적과 결과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목적이 없음은 그 자체로 가장 잔혹하다. 삶의 목적을 위해 종교, 과학 등 삶의 다양한 가치참조체계를 만든 인간에게 삶의 무목적성은 그 무엇보다 잔인하다. 니체의 철학이 파괴의 철학이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김훈도 마찬가지다. 김훈은 삶은 그저 있는 그래도 보여주려 할 뿐이다. 우리 삶 자체가 애정이 없으며 잔인하다.


아도르노(T. Adorno)와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는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예술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보기에 현대문화는 온통 달콤한 양념이 묻어있는 허구에 불과했다. 가난한 소녀가 성실함으로 성공을 하고, 정의의 주인공이 악을 물리치는 내용의 예술은 그야말로 기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김훈의 소설은 예술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묘사는 김훈 소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죽은 아내의 몸은 뼈와 가죽 뿐이었다. 엉덩이 살이 모두 말라버린 골반뼈 위로 헐렁한 피부가 늘어져서 매트리스 위에서 접혔다. 간병인이 아내를 목욕시킬 때 보니까, 성기 주변에도 살이 빠져서 치골이 가파르게 드러났고 대음순은 까맣게 타들어가듯이 말라붙어 있었다.” (화장, P.34)


보고 싶지 않은, 무시하고 싶은 모습이지만, 이것이 바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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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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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요즘 내 인생의 최대 화두다. 하지만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살면서 점점 ‘행복하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알랭드보통은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서 행복하기 어려운 이유로 여러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원인으로 그는 ‘연약한 육체, 변덕스러운 연애, 불성실한 사회생활, 위태로운 우정, 무뎌진 습관 등등을 꼽고 있다. 그런데 알랭드보통이 제시한 불행의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대부분의 불행이 외부(타인)에서 비롯된다는 것. 실제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에 대해서 잘 한 번 생각해보자. 가깝게는 말 안 듣는 가족들, 마음 안 맞는 선후배, 배신하는 연인, 더 나아가선 무능하면서 탐욕스런 기업인, 툭하면 시위하는 노동자, 머릿속에는 비리밖에 없는 정치인, 신의 이름으로 모두를 욕하는 일부 광신도들까지. 결국 내 삶과 연결된 타인의 행동들이 결국 내 행복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왜 불행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할까? 성인이 된 개인은 자신만의 세상을 굳건하게 만들어 놓고 그 안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철수의 세상’ ‘영희의 세상’. 한 번 세상이 형성되면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각 개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모습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사실. 더 나아가 개인이 만들어놓은 다양한 세상은 사회 속에서 불가피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 때 각 세계가 드러내는 이질성의 차이만큼 현실 속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작게는 ‘자장면이 맛있네, 짬뽕이 맛있네’의 문제에서부터 크게는 ‘기독교가 최고네, 이슬람교가 최고네’의 문제까지. 이질적인 개인들의 세상이 사회 속에서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고, 우리의 행복에 균열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불행의 원인은 대충 알았다. 그렇다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불행의 원인은 알지만 원인에 대한 해답은 아직 모른다. 과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부터의 내용은 행복을 찾기 위한 내 여정의 기록이다. 물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과정이다.  



우선 불행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타인들의 행동을 조절하는 방법이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는 방대하다. 나만해도 가족에 회사 사람들, 그리고 매일 운전하며 만나는 이름 모를 운전자들, 수위아저씨에 동네 상인까지.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질 일의 경우의 수만 따져봐도 2의 1000승은 족히 넘는다. 다시 말해 불행의 원인이 되는 외부 조건을 내 스스로 컨트롤하기엔 너무나 무리가 많이 따른 다는 것이다. 내 행복을 위해 상인의 바가지를 없앨 수도, 올림픽대로 운전자들의 운전태도를 교정할 수도, 더 나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의 태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다. 결국 외부 변인(타인의 행동) 조정으로 내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결국 행복을 위해선 내부 변인의 변화, 즉 ‘내 자신’의 변화가 필요하겠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이 되야 할까. 우선 도인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겠다. 일종의 초월주의자다. 이 세상의 짜증과 분노를 넘어서서, 어떠한 외부 요인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겠다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이 초야에 묻혀 살며 ‘남이사’를 주창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런 ‘남이사’파에도 문제는 있다. 이들에겐 히틀러의 파시즘도 아프리카 소년의 굶주림도 전부 남의 문제다. 즉, 이들은 행복하기 위해 초월이란 이름으로 외부의 갈등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으로 ‘남이사’파는 제외. 두 번째로 행복을 위해 절대적인 진리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부류의 대다수는 새로운 진리 속에서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았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내게 자신의 진리에 동참해보지 않겠냐며 권유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바로 상충되는 진리 속에 사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다. 물론 두 사람이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하며 각자의 진리 속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상관이 없는데, 대부분의 경우 ‘내가 진짜 진리다’라며 다투게 된다. 더 나아가 진리가 규정한 다양한 ‘~하지 마라’로 인해, 현실 속에서 무수한 외부 요인들과 갈등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으로 ‘진리파’도 제외.  



끝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내 안의 행복을 유지하는 것. 이 방법이 바로 최근에 내가 읽은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100퍼센트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방법들과는 달리 행복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은 분명하다. 우선 장자는 불행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아니, 그는 우리 삶 속에서 삶의 차이와 타자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말한다. “차이와 낯섦을 회피하면 우리는 결국 메추라기에 머물게 될 것이고, 차이와 낯섦에 끈덕지게 마주선다면 우리는 장자가 이야기했던 한 마리의 거대한 대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2) 결국 혼자 산 속에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끊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미다.  



좋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은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 걸까? 장자는 이 질문에도 답을 해준다. 바로 망각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사람들은 저마다의 세상을 구성해놓고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장자는 우선 자신의 세상을 해체하라고 말한다. 내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했던 무수한 가치들을 깨트리라는 것이다. 장자에는 노나라 임금이 자신이 사랑하던 바닷새 한 마리를 궁궐에 가둬놓고 최고 음식과 연회를 베풀어준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새는 슬퍼하기만 할 뿐 음식 한 점 먹지 않고 결국 죽어버린다. 장자는 여기서 비유적으로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나의 세상을 기준으로 타인을 대한다. 하지만 타인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호의를 베풀어도 타인에겐 피해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때문에 내가 구성해놓은 세상을 리모델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질적인 공동체와 조우했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기존의 성심(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타자와 관계할 수 있고, 아니면 새로운 성심을 구성하려는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119) 장자는 우리에게 모험을 권유한다.  



결국 소통을 위해선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다. 장자는 이를 위해 남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기 위해 부단히 수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 때까지 판단을 중지해야만 “타자에 부합되는 새로운 관점을 고안하고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터서 비워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195) 장자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진정한 이해를 통해 타인과 자신을 연결했다면, 이제는 완전한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국가의 그림자를 치워내고 소통과 이해 속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 행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행복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 것, 그야 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또 다른 방식인 셈이다.  



하늘이 아닌, 땅 위에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장자는 내 행복 탐험기에 좋은 이정표이자 단서가 되어주었다. 물론 장자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이 내 행복의 도달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수한 경험과 고민 끝에 비로소 온전한 나만의 깨달음을 얻어야 진정 행복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매 순간의 일상을 낯섦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차이의 갈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장자가 내게 가르쳐 준 깨우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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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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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공 필수 과목이었던 셰익스피어 수업을 듣던 학부시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셰익스피어만 특별 대접을 받는 것일까?” 당시 대부분의 전공 과목들은 “19세기 영소설의 이해” “중세 영문학의 이해” “현대영미소설” 과 같이 시대별, 장르별로 묶여있었다. 그런데 개별작가로는 유일하게 셰익스피어만 독립되어 전공 필수로 지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 근데 왜 셰익스피어가 중요한거죠?” 무식하지만 솔직한 질문이었다. 교수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절, 유럽은 엄청난 변화의 격동기를 겪고 있었어. 바로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계몽의 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였거든. 그 변화의 한 가운데를 살았던 인물이 바로 셰익스피어야. 자연히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시선도 급변했고. 셰익스피어는 이 같은 세상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 이를 뛰어난 작품으로 그려냈어. 다시 말해 세상을 날카롭게 읽어내고, 세상의 거대한 변화를 문학이라는 장르로 표현해 낸 것. 물론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기 자체가 매우 중요했다는 점도 있어.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예리하게 읽어낸 인문학적 안목과 변화를 이야기로 풀어낸 인문학적 상상력이 너무도 탁월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거란다.” 변화하는 세상을 읽어내고, 변화를 말로써 풀어내는 사람이라. 인문학자의 존재가 너무나 멋있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셰익스피어를 읽는다고 돈이나오냐 쌀이나오냐며 푸념하던 무식한 실용주의자가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도와주는 것, 바로 인문학자의 역할이었다. 
 


       진중권의 <이매진>을 보며 인문학자의 역할을 떠올렸다. 변화하는 세상의 키워드는 곳곳에 숨어있다. 변화하는 언어에, 신설되는 제도에, 그리고 다양한 대중문화에도 세상의 형태를 보여주는 블루프린트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키워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린 인문학자의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안목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일반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일상의 또 다른 변형에 불과하지만, 인문학자는 사소한 변화를 섬세한 감수성으로 읽어낸다. 이 때 인문학자의 지식회로가 빠르게 돌기 시작하고 곧, 작은 변화에 내포되어 있는 블루프린트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해석된 변화의 의미는 이제 쉽고 재밌는 언어를 타고 일반인들에게 제공된다. 일반인들의 눈과 머리는 인문학자의 도움으로 업데이트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 인식되지 않던 세상의 작은 변화들이 일반인들의 눈에도 포착되는 것이다. 진중권의 <이매진>은 이 같은 인문학자의 작업 결과다. 세상을 읽기 위해 사용한 매개는 영화다. 영화 속에 담겨있는 기술적 형식에서부터 철학적 이야기까지, 그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300>을 통해 대중의 관심이 논리적인 텍스트에서 미학적인 이미지로 변해감을 보여준다. “<300>은 시각적과잉을 통해 너무나 단순해서 무식하기까지 한 플롯의 빈곤함을 잊게하고, 나아가 그 바탕에 깔린 미국 우익 백인의 징그러운 남성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마저 덮어두게 만든다. 이미지는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도취시킬 뿐이다. 이성은 마비되고 그래서 정신은 황홀하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미지의 기술적 발전에 무작정 예찬하지 않는다. <폴라익스프레스>를 통해 관객들은 하이퍼 리얼리티를 재현해내는 기술에 거부감을 느낀다. “로봇이 점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친밀도가 증가하다가 어떤 계곡에 도달하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이런 관계를 섬뜩함의 계곡 (uncanny valley)이라 부른다. (중략) 한 마디로 어설프게 인간을 닮은 로봇은 친밀도의 나락으로 떨어져 시체나 좀비처럼 느껴진다는 얘기” 결국 <이매진>은 대중의 기호는 이미지에 열광하나, 여전히 아날로그적 서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읽는 그의 작업에서 특히 흥미로운 건 이야기의 대상을 택하는 그의 방식이다. 일반적인 경우,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처럼 애초에 인문학적 키워드를 많이 내포한 영화를 택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진중권은 지인에게 추천 받은 영화, 우연히 접한 영화, 심지어 할리우드공장에서 뻔하게 제작된 영화 등 ‘그냥’ 자신이 본 영화를 이야기의 소재로 삼는다. 이는 진중권이 애초에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에겐 ‘어떻게’ 이야기를 뽑아내는가가 관심사였던 것이다. 여기서 영화를 읽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진중권에게 일종의 놀이처럼 느껴진다. 우연히 마주친 영화 속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놀이말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글들이 도서관에서 어려운 자료들을 참조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진중권 자신이 영화를 보면서 순간 순간 읽어낸 키워드를 자유롭게 풀어낸 결과처럼 보인다. 때문에 과거 그가 쓴 책들에 비해 <이매진>의 전체적 내용 구성이 덜 치밀하고, 몇몇 글들에선 덜 고민했던 흔적들이 느껴진다. 하지만 한 편으론 <이매진>이 우연의 놀이 속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란 점에서 진중권이 갖고 있는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은 더욱 부각된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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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사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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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작년인가, 국회 기획재정위 국정감사가 열리던 기획재정부. 종부세를 둘러싸고 강만수 장관과 야당 의원들의 열띤 설전이 오가고 있었다. 야당의 김종률, 오재세 의원 등은 집중적으로 종부세 폐지의 부당성을 강조했고, 이에 강만수 장관은 종부세 자체의 부당성으로 맞섰다. 종부세 논의가 뜨거워질 즈음 민주당 양성조 의원이 종부세 폐지는 결국 서민 복지 축소로 이어져 서민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바로 그 때. 강만수 장관은 변신했다. 장관 강만수에서 자연인 강만수로. 만수 형님, 울컥하셨다. 그리고 외쳤다. “서민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고, 부자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은 괜찮다는 겁니까!” 그야말로 투사의 새로운 현현이었다. 목소리엔 부당함에 대한 정의의 울분이 묻어있었고, 머리 주변에선 분노의 광채가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이렇게 순수한 장관을 난 아직 본적이 없다. 그 말은 자연인 강만수의 말이었고, 욱하는 과정에서 튀어나온 현 정권의 커밍아웃이었다. 부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어떠한 일련의 과정도 막기 위해 탄생한 정권! 난 이 말과 함께 현 정권에 대한 감정적인 기대를 완전히 버렸다.


# 2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던 날. 그 날도 어김없이 청와대에선 브리핑이 이어졌고, 화북지역의 북방 중국인을 닮은 이동관 대변인이 등장했다.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 워낙에 큰 이슈였기에 그의 입에서도 미 대통령 선거에 대한 언급이 빠질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입에서 튀어 나온 내용은 최근 외신에 등장한 ‘머리 둘 달린 양’보다 더 엽기적이고 충격적이었다. “새로운 변화와 희망을 제시한 오바마와 변화와 개혁을 국정운영의 중요 가치로 삼아온 이 대통령은 공통된 철학을 공유하고 있다!” (헉. 정말. 현 정권이 돌았구나.) 청와대의 설명에 따르면 ‘이 대통령도 감세를, 오바마도 감세를 추진하니 다 비슷한 것 아니겠냐’라는 것이다. 이 정도의 아전인수라면 분명 악의는 아닐테다. 부유층을 대상으로 감세를 추진하는 현 정부와 달리 오바마는 상위 5%의 세금을 높여 나머지 95%의 국민 세금을 감세하겠다고 주장했다. 변화를 추진하는 것은 같을지 몰라도 왼쪽의 변화와 오른쪽의 변화는 180도 다른 변화다. 그걸 ‘어쨌든 변화는 변화니까 다 같은 편이지’라고 말한다면 이건 악의적인 눈속임이라기보다는 현 정권의 지적 수준을 드러낸 현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믿고 싶다.) 좌회전과 우회전도 결국 회전한다는 점에서 다 같다고 주장하는 정권! 난 이 말과 함께 현 정권에 대한 지적 기대를 완전히 저버리게 됐다.


# 3

나름대로의 원칙이 하나 있다. 감정적으로 일치할 가능성이 전혀 없으면서 동시에 지적으로도 교차점을 전혀 찾을 수 없는 사람과는 절대 논쟁하지 않는다는 것. 물론 현 정권과 내가 논쟁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다. 때문에 ‘논쟁하지 않겠다’는 원칙은 ‘비판하지 않겠다’로 바뀔 수 있겠다. 너무나 다른 정서와 지식을 지닌 현 정부에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야말로 남은 4년간 인고의 시절을 보내야말 할 뿐. 이럴 때 힘을 주는 사람이 있다. 바로 커트 보네거트와 그의 책 <나라 없는 사람>이다. 이 책은 절필을 선언한 후 나온, 보네거트의 최신작이다. 소설은 아니고 그의 에세이집인데, 글을 보다보면 할배가 뿔이 나도 엄청 뿔이났음을 알 수 있다. 82세의 노작가는 자기가 살아온 삶을 반추하며, 현재의 요지경같은 세상을 유머와 독설로 비판한다. 비판의 주요대상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치, 자본 권력들. 커트 보네거트는 <나라없는 사람>을 통해 감정적으로, 지적으로 전혀 일치할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대하는 법에 대해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유머와 독설의 만남, 바로 풍자다. 보통 이런식이다.


사람들은 두려워한다. 한 남자가 익명으로 편지를 보냈다.

만일 어떤 남자가 주머니에 총을 감추고 당신을 위협하고 있는데 당신이 보기에 그가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것 같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이라크가 우리를 위협할 뿐 아니라 전세계를 위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마당에 어떻게 아무런 위험이 없는 듯 그냥 앉아 있을 수 있을까요? (중략)

나는 이렇게 답했다.

제발 부탁하건데, 엽총을 들고 거리로 나가시오. 12구경 2연발총이면 딱 좋을거요. 거기 당신 동네에서 경찰은 제외하고 무장했을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의 머리를 날려버리시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용사이자 자연의 훼손을 누구보다 가슴아파하는 사람. 때문에 커트보네거트의 눈에 비친 문명은 그야말로 폭력의 정수다. 하지만 그는 유머 신봉자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유머는 ‘두려움에 대한 생리적 반응’이자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동시에 엿같은 세상에서 아스피린이 되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유머다. 때문에 보네거트는 노망든 노인의 우레같은 독설을 날리면서도 절대 유머를 잃지 않는다. 그것이 정상이 사라진 비정상의 사회 속에서 몇 남지 않은 정상인들이 날릴 수 있는 똥침이자 동시에 아스피린이 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82년을 살아온 그의 눈에 비친 희망은 점점 줄어들고 있는 듯 하다. 스스로 “너무 많은 충격과 실망을 겪은 탓에 이제 나는 더 이상 유머로 방어를 할 수가 없다”고 고백하고 있듯. 이 책에서 본 가장 슬프고 절망적인 문장이었다. 신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무신론자가 될 겁니다. 상황이 너무 심각하기 때문이죠.’라고 말하면서도 커트 보네거트는 항상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희망을 버리기엔 아직까지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비극을 희극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 점점 줄어드는 지금, 나 역시 작은 영웅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커트 보네거트의 존재도 폭력적인 문명이 전해주는 희망의 선물이다. 마크 트웨인과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생의 말년에 인류에 대한 희망을 버렸다고 한다. 특히 트웨인은 1차 대전을 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상위 5%의 대못질을 막기 위해 정책을 쏟아내며, 미국의 민주당과 공화당을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하는 정권밑에서 살아가는 나 역시 희망이 점점 작아지고 있다. 그럴 때마다 <나라없는 사람>을 읽는다. 위안을 받는다. 작은 희망을 되살린다. 일 9,500에 받는 최상의 서비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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