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산무진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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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꽃이 피었다. 이른 아침의 차가운 서리는 꽃의 목을 벤다.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E. Dickinson)은 이 광경을 보고  시를 지었다. 그녀는 자연의 잔혹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했을까? 아니면 포우(E. A Poe)처럼 아름다움이 죽을 수밖에 없는 비극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아니다. 그녀의 눈에 비친 자연은 잔인하지도, 그렇다고 선하지도 않은 존재였다. 그랬다. 자연은 목적이 없었다. 그저 섭리에 따라 운행할 뿐이었다. 예쁜 꽃의 목을 벤 것도 자연의 섭리였을 뿐이었다.


디킨슨의 시는 삶에 대한 허무가 가득 담겨있다. 자연은 목적이 없다는 디킨슨의 말 뒤에 니체(F. Nietzsche)가 살며시 나타난다. 니체 역시 삶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음을 주장했다. 그의 사상을 이어 받은 실존주의 철학자들 역시 인간의 실존에 초점을 맞추며 삶의 무목적성을 이야기했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소설가 카뮈(A. Camus)는 <시지프스 신화>에서 인생을 대가 없는 노동으로 묘사했다. 우리가 사는 인생은 권선징악(勸善懲惡)의 법칙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그렇다고 권악징선(勸惡懲善)이 존재하는 곳도 아니다. 단지 의미없이 시간은 흐르고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 곳일 뿐이다.


이 시대의 소설가 김훈은 인생의 그러한 특성을 예리한 관찰력과 표현력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집 <강산무진>에는 우리의 목을 이유 없이 베어가는 차가운 자연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김훈의 단편 소설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단어는 바로 ‘삶의 무목적성’이다. 


강산무진의 주인공은 간암 말기 환자다. 삶을 정리하기 위해 그가 하는 일은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전처에게 위자료를 주며 자식들에게 발병 사실을 알리는 것이다. 주인공의 세포는 하나하나 죽어간다. 하지만 삶은 그의 딱한 상황을 동정하지 않는다. 삶은 그저 계속 진행된다. 특별히 변화한 것은 없다. 여전히 아내에게 남은 위자료를 줘야하는 일이 남아있으며 주식을 처분하기 위해 상담원과 통화해야 한다. 피로를 느끼지 않을 만큼의 산책도 해야 하며 어머니의 묘자리도 정리해야 했다. 간암이 걸렸지만 삶은 변화가 없다.


화장 주인공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가 죽었다. 불치병 아내를 위해 수년간 간병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삶에 중요한 것은 광고 문구를 정하는 일이며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려는 주민을 접대하는 일이다. 배웅의 주인공 역시 사랑했던 여인을 떠나보냄에도 사납금을 채워야 한다. 삶은 어떠한 목적 없이 흘러간다. 언니의 폐경의 주인공 역시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새로운 남자가 생겨도 시어머니의 팔순은 참여해야 하고 새 남자는 정리해고를 당한다. 주인공은 생리를 하고 패드를 산다. 바람피운 남편을 징벌하고 착한 언니를 권하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김훈이 삶의 무목적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하는 전략은 정밀묘사다. 각각의 주인공이 갖고 있는 직업에 대한, 주인공에 대한 주변 반응에 대한 정밀 묘사를 통해 삶의 무관심을 그려낸다. 그래서 김훈의 소설은 애정이 없어 보이며 잔인해 보인다. 항상 시작과 끝은 같다. 사건의 진행은 있어도 발전은 없다. 하지만 김훈에 대한 반응은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그것과 유사하다. 끊임없이 목적과 결과를 추구하는 인간에게 목적이 없음은 그 자체로 가장 잔혹하다. 삶의 목적을 위해 종교, 과학 등 삶의 다양한 가치참조체계를 만든 인간에게 삶의 무목적성은 그 무엇보다 잔인하다. 니체의 철학이 파괴의 철학이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사실에 기인한 것이다. 김훈도 마찬가지다. 김훈은 삶은 그저 있는 그래도 보여주려 할 뿐이다. 우리 삶 자체가 애정이 없으며 잔인하다.


아도르노(T. Adorno)와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는 <계몽의 변증법>을 통해 예술은 삶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이 보기에 현대문화는 온통 달콤한 양념이 묻어있는 허구에 불과했다. 가난한 소녀가 성실함으로 성공을 하고, 정의의 주인공이 악을 물리치는 내용의 예술은 그야말로 기만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기준에서 볼 때 김훈의 소설은 예술의 역할을 그대로 수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 묘사는 김훈 소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죽은 아내의 몸은 뼈와 가죽 뿐이었다. 엉덩이 살이 모두 말라버린 골반뼈 위로 헐렁한 피부가 늘어져서 매트리스 위에서 접혔다. 간병인이 아내를 목욕시킬 때 보니까, 성기 주변에도 살이 빠져서 치골이 가파르게 드러났고 대음순은 까맣게 타들어가듯이 말라붙어 있었다.” (화장, P.34)


보고 싶지 않은, 무시하고 싶은 모습이지만, 이것이 바로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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