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전공 필수 과목이었던 셰익스피어 수업을 듣던 학부시절, 문득 한 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왜셰익스피어만 특별 대접을 받는 것일까?” 당시 대부분의 전공 과목들은 “19세기 영소설의 이해” “중세 영문학의 이해” “현대영미소설” 과 같이 시대별, 장르별로 묶여있었다. 그런데 개별작가로는 유일하게 셰익스피어만 독립되어 전공 필수로 지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교수님을 찾아갔다. “교수님, 근데 왜 셰익스피어가 중요한거죠?” 무식하지만 솔직한 질문이었다. 교수님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셰익스피어가 살던 시절, 유럽은 엄청난 변화의 격동기를 겪고 있었어. 바로 중세에서 르네상스를 거쳐 계몽의 시대로 넘어가던 시기였거든. 그 변화의 한 가운데를 살았던 인물이 바로 셰익스피어야. 자연히 세상과 인간에 대한 시선도 급변했고. 셰익스피어는 이 같은 세상의 변화를 정확히 읽고 이를 뛰어난 작품으로 그려냈어. 다시 말해 세상을 날카롭게 읽어내고, 세상의 거대한 변화를 문학이라는 장르로 표현해 낸 것. 물론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시기 자체가 매우 중요했다는 점도 있어. 하지만 시대의 변화를 예리하게 읽어낸 인문학적 안목과 변화를 이야기로 풀어낸 인문학적 상상력이 너무도 탁월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높은 평가를 받는거란다.” 변화하는 세상을 읽어내고, 변화를 말로써 풀어내는 사람이라. 인문학자의 존재가 너무나 멋있게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셰익스피어를 읽는다고 돈이나오냐 쌀이나오냐며 푸념하던 무식한 실용주의자가 눈을 뜨는 순간이었다.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도와주는 것, 바로 인문학자의 역할이었다. 
 


       진중권의 <이매진>을 보며 인문학자의 역할을 떠올렸다. 변화하는 세상의 키워드는 곳곳에 숨어있다. 변화하는 언어에, 신설되는 제도에, 그리고 다양한 대중문화에도 세상의 형태를 보여주는 블루프린트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키워드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때문에 우린 인문학자의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안목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일반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일상의 또 다른 변형에 불과하지만, 인문학자는 사소한 변화를 섬세한 감수성으로 읽어낸다. 이 때 인문학자의 지식회로가 빠르게 돌기 시작하고 곧, 작은 변화에 내포되어 있는 블루프린트를 해석하기 시작한다. 해석된 변화의 의미는 이제 쉽고 재밌는 언어를 타고 일반인들에게 제공된다. 일반인들의 눈과 머리는 인문학자의 도움으로 업데이트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넓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 인식되지 않던 세상의 작은 변화들이 일반인들의 눈에도 포착되는 것이다. 진중권의 <이매진>은 이 같은 인문학자의 작업 결과다. 세상을 읽기 위해 사용한 매개는 영화다. 영화 속에 담겨있는 기술적 형식에서부터 철학적 이야기까지, 그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300>을 통해 대중의 관심이 논리적인 텍스트에서 미학적인 이미지로 변해감을 보여준다. “<300>은 시각적과잉을 통해 너무나 단순해서 무식하기까지 한 플롯의 빈곤함을 잊게하고, 나아가 그 바탕에 깔린 미국 우익 백인의 징그러운 남성 우월주의 이데올로기마저 덮어두게 만든다. 이미지는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도취시킬 뿐이다. 이성은 마비되고 그래서 정신은 황홀하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미지의 기술적 발전에 무작정 예찬하지 않는다. <폴라익스프레스>를 통해 관객들은 하이퍼 리얼리티를 재현해내는 기술에 거부감을 느낀다. “로봇이 점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친밀도가 증가하다가 어떤 계곡에 도달하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이런 관계를 섬뜩함의 계곡 (uncanny valley)이라 부른다. (중략) 한 마디로 어설프게 인간을 닮은 로봇은 친밀도의 나락으로 떨어져 시체나 좀비처럼 느껴진다는 얘기” 결국 <이매진>은 대중의 기호는 이미지에 열광하나, 여전히 아날로그적 서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읽는 그의 작업에서 특히 흥미로운 건 이야기의 대상을 택하는 그의 방식이다. 일반적인 경우, <블레이드 러너>나 <매트릭스>처럼 애초에 인문학적 키워드를 많이 내포한 영화를 택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하지만 진중권은 지인에게 추천 받은 영화, 우연히 접한 영화, 심지어 할리우드공장에서 뻔하게 제작된 영화 등 ‘그냥’ 자신이 본 영화를 이야기의 소재로 삼는다. 이는 진중권이 애초에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그에겐 ‘어떻게’ 이야기를 뽑아내는가가 관심사였던 것이다. 여기서 영화를 읽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진중권에게 일종의 놀이처럼 느껴진다. 우연히 마주친 영화 속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놀이말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글들이 도서관에서 어려운 자료들을 참조해 쓰여졌다기 보다는, 진중권 자신이 영화를 보면서 순간 순간 읽어낸 키워드를 자유롭게 풀어낸 결과처럼 보인다. 때문에 과거 그가 쓴 책들에 비해 <이매진>의 전체적 내용 구성이 덜 치밀하고, 몇몇 글들에선 덜 고민했던 흔적들이 느껴진다. 하지만 한 편으론 <이매진>이 우연의 놀이 속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란 점에서 진중권이 갖고 있는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은 더욱 부각된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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