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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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요즘 내 인생의 최대 화두다. 하지만 아직 답은 찾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살면서 점점 ‘행복하기’가 참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중이다. 실제로 알랭드보통은 <프루스트를 좋아하세요>에서 행복하기 어려운 이유로 여러 가지를 제시하는데, 그 원인으로 그는 ‘연약한 육체, 변덕스러운 연애, 불성실한 사회생활, 위태로운 우정, 무뎌진 습관 등등을 꼽고 있다. 그런데 알랭드보통이 제시한 불행의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대부분의 불행이 외부(타인)에서 비롯된다는 것. 실제로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요소에 대해서 잘 한 번 생각해보자. 가깝게는 말 안 듣는 가족들, 마음 안 맞는 선후배, 배신하는 연인, 더 나아가선 무능하면서 탐욕스런 기업인, 툭하면 시위하는 노동자, 머릿속에는 비리밖에 없는 정치인, 신의 이름으로 모두를 욕하는 일부 광신도들까지. 결국 내 삶과 연결된 타인의 행동들이 결국 내 행복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왜 불행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할까? 성인이 된 개인은 자신만의 세상을 굳건하게 만들어 놓고 그 안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철수의 세상’ ‘영희의 세상’. 한 번 세상이 형성되면 쉽사리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각 개인들이 만들어놓은 세상의 모습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사실. 더 나아가 개인이 만들어놓은 다양한 세상은 사회 속에서 불가피하게 부딪힐 수밖에 없다. 이 때 각 세계가 드러내는 이질성의 차이만큼 현실 속에서 갈등이 발생한다. 작게는 ‘자장면이 맛있네, 짬뽕이 맛있네’의 문제에서부터 크게는 ‘기독교가 최고네, 이슬람교가 최고네’의 문제까지. 이질적인 개인들의 세상이 사회 속에서 충돌하며 갈등을 일으키고, 우리의 행복에 균열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불행의 원인은 대충 알았다. 그렇다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불행의 원인은 알지만 원인에 대한 해답은 아직 모른다. 과연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부터의 내용은 행복을 찾기 위한 내 여정의 기록이다. 물론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과정이다.  



우선 불행의 직접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는, 타인들의 행동을 조절하는 방법이 있겠다. 하지만 우리가 맺고 있는 타인과의 관계는 방대하다. 나만해도 가족에 회사 사람들, 그리고 매일 운전하며 만나는 이름 모를 운전자들, 수위아저씨에 동네 상인까지.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벌어질 일의 경우의 수만 따져봐도 2의 1000승은 족히 넘는다. 다시 말해 불행의 원인이 되는 외부 조건을 내 스스로 컨트롤하기엔 너무나 무리가 많이 따른 다는 것이다. 내 행복을 위해 상인의 바가지를 없앨 수도, 올림픽대로 운전자들의 운전태도를 교정할 수도, 더 나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대통령의 태도를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다. 결국 외부 변인(타인의 행동) 조정으로 내 행복을 확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결국 행복을 위해선 내부 변인의 변화, 즉 ‘내 자신’의 변화가 필요하겠다. 그렇다면 어떤 인간이 되야 할까. 우선 도인이 되려는 사람들이 있겠다. 일종의 초월주의자다. 이 세상의 짜증과 분노를 넘어서서, 어떠한 외부 요인에도 평정심을 유지하겠다는 사람들이다. 대부분이 초야에 묻혀 살며 ‘남이사’를 주창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런 ‘남이사’파에도 문제는 있다. 이들에겐 히틀러의 파시즘도 아프리카 소년의 굶주림도 전부 남의 문제다. 즉, 이들은 행복하기 위해 초월이란 이름으로 외부의 갈등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으로 ‘남이사’파는 제외. 두 번째로 행복을 위해 절대적인 진리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부류의 대다수는 새로운 진리 속에서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았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내게 자신의 진리에 동참해보지 않겠냐며 권유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바로 상충되는 진리 속에 사는 사람을 만났을 경우다. 물론 두 사람이 ‘너는 너고 나는 나니까’하며 각자의 진리 속에서 행복감을 느낀다면 상관이 없는데, 대부분의 경우 ‘내가 진짜 진리다’라며 다투게 된다. 더 나아가 진리가 규정한 다양한 ‘~하지 마라’로 인해, 현실 속에서 무수한 외부 요인들과 갈등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으로 ‘진리파’도 제외.  



끝으로 타인을 이해하는 방법이 있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과의 소통을 통해 내 안의 행복을 유지하는 것. 이 방법이 바로 최근에 내가 읽은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에 나와있는 내용이다. 100퍼센트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다른 방법들과는 달리 행복의 정체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준 것은 분명하다. 우선 장자는 불행을 가져다 줄 수도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아니, 그는 우리 삶 속에서 삶의 차이와 타자성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는 말한다. “차이와 낯섦을 회피하면 우리는 결국 메추라기에 머물게 될 것이고, 차이와 낯섦에 끈덕지게 마주선다면 우리는 장자가 이야기했던 한 마리의 거대한 대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52) 결국 혼자 산 속에서 갈등을 야기할 수 있는 타인과의 관계를 끊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의미다.  



좋다. 그렇다면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은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 걸까? 장자는 이 질문에도 답을 해준다. 바로 망각이다. 위에서 언급했듯, 사람들은 저마다의 세상을 구성해놓고 살아간다. 그런데 세상의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충돌이 발생한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장자는 우선 자신의 세상을 해체하라고 말한다. 내가 당연히 옳다고 생각했던 무수한 가치들을 깨트리라는 것이다. 장자에는 노나라 임금이 자신이 사랑하던 바닷새 한 마리를 궁궐에 가둬놓고 최고 음식과 연회를 베풀어준다는 얘기가 나온다. 하지만 새는 슬퍼하기만 할 뿐 음식 한 점 먹지 않고 결국 죽어버린다. 장자는 여기서 비유적으로 타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는 언제나 나의 세상을 기준으로 타인을 대한다. 하지만 타인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아무리 호의를 베풀어도 타인에겐 피해가 될 수 있는 법이다. 때문에 내가 구성해놓은 세상을 리모델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질적인 공동체와 조우했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기존의 성심(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아 타자와 관계할 수 있고, 아니면 새로운 성심을 구성하려는 모험을 감행할 수도 있다.” (119) 장자는 우리에게 모험을 권유한다.  



결국 소통을 위해선 타인에 대한 이해가 핵심이다. 장자는 이를 위해 남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기 위해 부단히 수양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에 대한 온전한 이해가 가능할 때까지 판단을 중지해야만 “타자에 부합되는 새로운 관점을 고안하고 생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먼저 자신을 터서 비워야만 한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195) 장자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진정한 이해를 통해 타인과 자신을 연결했다면, 이제는 완전한 소통을 기반으로 하는 새로운 사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개인의 삶을 억압하는 국가의 그림자를 치워내고 소통과 이해 속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개인적 행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행복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 것, 그야 말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또 다른 방식인 셈이다.  



하늘이 아닌, 땅 위에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했다는 점에서 장자는 내 행복 탐험기에 좋은 이정표이자 단서가 되어주었다. 물론 장자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곳이 내 행복의 도달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수한 경험과 고민 끝에 비로소 온전한 나만의 깨달음을 얻어야 진정 행복의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인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매 순간의 일상을 낯섦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차이의 갈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장자가 내게 가르쳐 준 깨우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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