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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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10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다. 선거 후, 실망과 허망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감정은 막연했다. 한국시리즈 혈투 끝에 현대가 삼성을 꺾고 우승했던 2004년 한국시리즈가 끝났을 때의 허망함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아직까지 대통령이 바뀌는 문제는 남의 나라 일이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다. 세상의 변화가 내 눈 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회사 사장이 이해 안 가는 이유로 잘렸다. 곧이어 새 정권에 우호적이던 선배들이 새로운 간부가 됐다. 그리고 몇 달 뒤, 내가 일하던 팀이 사라졌다. 이전 사장 때 생겨난 팀이라는 게 주된 이유 같았다. 나를 포함한 팀원들은 매일 아침 피켓을 들었으며, 간부들을 찾아가 항의했다. 일부 언론은 우리의 항의를 기사화했다. 세상은 조금씩 우리의 행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한 달여의 투쟁 끝에 팀은 사라졌다. 선배들은 격정의 눈물을 쏟았고, 감정적으로 메마른 내 가슴 한 편에도 큰 구멍이 뚫렸다. 휑한 가슴을 문지르며, 전에 없던 분노와 슬픔, 그리고 무기력함과 패배감을 맛봤다. 어느새 난 세상의 변화가 가져온 파도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사회의 변화는 나 같은 사회 초년병의 삶까지 흔들어 놓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회와 나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연수의 장편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살았던 개인들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민주화 투쟁으로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 소련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로 하나의 가치관이 붕괴되던 시절(이 시대를 두고 김연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1991년 5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었다.’), 그 속에 살던 개인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개인의 삶은 혼란스런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때문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91년 5월 투쟁 중 학생국장의 쇠파이프에 어깨를 맞은 주인공은 북한 밀입국을 위해 베를린으로 떠나게 됐고, 무등산 야바위꾼에게 모든 돈을 다 잃게 된 이길용은 한민복과 안기부 직원들을 만나 강시우라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에 있었던 헬무트 베르크의 삶도, 팔라우에서 일본군에 소속돼 전쟁을 경험한 주인공의 할아버지의 삶도 전신국 폭파 사건을 목도했던 정민의 삼촌의 삶도,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도달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엔 애초부터 목적지가 정해져있지 않았다.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자 하는 관성도 없었다. 그저 혼란스런 사회가 이끄는 대로 흘러갔고, 그 목적지는 비합리적인 세상만큼이나 우울했다. 개인의 삶은 사회 변화의 종속 변수였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사회는 개인의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는 관념적 주제를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려놓는다. 김연수가 들려주는 펄떡이는 활어처럼 생생한 이야기는 우리 삶이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 지를 보여준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 하나가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때문에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잘 따라가다 보면, 감춰진 개인의 사연이 하나씩 드러나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요즘따라 무척 네가 우울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럼 그 사람에게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도미노 현상을 설명해주면 되는 것 처럼 말이다. ‘2007년 대통령이 바뀌었고->장관들이 바뀌었고->고위 공무원들이 바뀌었고->우리 사장이 바뀌었고->간부들이 바뀌었고->내가 일하던 팀이 사라졌고->난 투쟁을 했고->성과는 없었고->패배감을 느끼게 됐고->요즘 부쩍 우울해졌고.’ 때론 전 세대에 발생했던 사건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십사대 이로 불리하게 싸웠던 두 처의 러시아 함대가 기적적으로 일본 함대를 물리치고 공해상으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해 개전 초기에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더라면 내가 독일까지 가게 되는 일도 없었던 게 아닌가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일본열도를 환호작약하게 만든 이 소식으로 당시 이십팔 세였던 후지이 긴타로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강시우와 레이의 인연을 소개하는 데 왠 후지이 긴타로인가. 후지이 긴타로는 레이의 할아버지다. 제물포전으로 인해 레이의 할아버지 후지이 긴타로는 군산으로 건너왔고, 마침 강시우의 할아버지도 군산에 있었다. 강시우와 레이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 함께 군산으로 여행을 갔다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회의 다양한 사건은 누적되어 다음 세대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하물며 제물포 전쟁의 한 가운데 있었던 개인의 삶이야 얼마나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겠는가. 모든 사람의 삶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광주항쟁은 남한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죽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미팅을 하고 섹스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지극히 단순했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팀이 해체된 후 실제로 한 동안 내가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간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내 몸의 적응 DNA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내 가치관과 소신을 뒤로 미룬 채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따라 쫒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혹독한 자기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가 내게 준 상처는 깊었다. 팀이 사라진 뒤, 정기적으로 예전 팀원들을 만난다. 한 달간의 투쟁 때문인지, 아니면 각자 공통된 상처를 안고 있어서인지 다들 서로 각별했다. 예전 팀원들과 함께 있으면 주변에 온기가 돌았다. 마치 사회가 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생기는 따스함 같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따르면 섭동에서 비롯된 온기라고 할 수 있다.

‘섭동에 대한 문장도 그때 외웠다.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 별들은 중심 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는 다른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때 두 천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충돌이라 하고, 진행경로를 바꾸면서 서로 비켜가는 경우를 조우라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는 섭동을 통해 서로 간에 에너지의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경로와 속도가 변하게 된다.’

분명 사회 전체를 지배한 에너지의 움직임은 암울했다. 하지만 중력의 흐름 속에서 진행 경로를 바꿔 조우를 하는 별처럼, 팀원들은 진행경로를 바꾸고 서로에게 희망의 에너지를 건냈다. 아래로 끌어당기는 중력에 맞선 상승의 에너지가 팀원들 사이에 있었고, 때문에 우린 함께 있으면 사회의 암울함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관계 속엔 행복이 숨어있었다. 예전 팀의 선배 중 하나는 항상 찡그리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늘 후배들에겐, ‘역사는 항상 발전하는 거니까, 실망할 필요는 없어’라고 말하곤 했다. 선배의 말이 과연 옳은지는 의문이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핵심은 선배의 말을 통해 섭동의 따뜻한 에너지가 전달된다는 사실이니까. 사회의 강은 종종 부조리의 호수를 향해 흘러간다. 우리의 삶 역시 강의 급류에 휘말려 함께 부조리의 비극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린 삶에 희망을 놓을 수 없다. 그 속에 섭동의 에너지가 숨쉬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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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방 - 우리 시대 대표 작가 6인의 책과 서재 이야기
박래부 지음, 안희원 그림, 박신우 사진 / 서해문집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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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대할 무렵,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를 모르면 순도100% 복학생 취급을 받았었다. 너도나도 미니홈피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침대도 사고 가구도 샀다. 액자를 걸어놓는 사람도 있었고 분홍색 벽지로 도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랬다. 그곳은 사이버 공간의 방이었다. 사람들은 방을 꾸미듯 미니홈피를 꾸몄다.
 

 난 미니홈피가 싫었다. 미니홈피가 내 은밀한 관음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있었겠다. 하지만 내게 미니홈피는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미니홈피의 안에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하다. 항상 웃고 있다. 방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사람들은 미니홈피를 통해 '난 세상에서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를 내세우고 있는 듯 했다.  실연당한 후 전 여친의 싸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가 늘어났다. 난 이렇게 괴로운데 쟤는 행복하네. 미니홈피는 자신의 생을 가장 아름답고 수준높게 꾸며주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그 가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답은 하나다. 미니홈피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었다는 사실. 이로 인해 미니홈피에는 진실성이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면 진짜 우리 방은 어떠한가. 방은 나를 오롯이 드러내는 공간이다. 내가 생활하는 곳이다.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간이다. 내 생활과 인생이 방 곳곳에 스며든다. 그래서 친한 친구나 연인의 방에 가면 그 사람의 성향이나 특징을 예측할 수 있다.  방에는 나의 진실이 숨쉬고 있다. 그 진실은  아름답기도 추하기도 하다. 그러나 상관없다. 나만을 위한 공간이기에. 개인적 공간이 줄어드는 요즘, 방은 사생활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다. 나를 완전히 드러내주는 공간이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방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식과 정치가 인간관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방이라는 내 나부를 보여주는 일은 교섭과 협상에 불리하다.
 

 그런데 박래부 기자가 작가들의 방을 차례로 침공(?)했다. 물론  건축학적 의미를 찾기 위해 방을 침공한건 아니다. 방은 작가들을 소개해주는 매개체로 사용됐다. 방을 통해, 방의 장식물을 통해, 방에 있는 책들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고 그들의 삶을 인식 할 수 있었다. 사실 난 이 책을 특별한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그림과 사진이 많길래 금방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집어들었다.) 하지만 어떤 인터뷰집보다 이 책은 진실됐다. 방을 통해 작가의 삶과 생각을 몰래 훔쳐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난 <작가의 방>이 참 좋았다.
 

작가의 방에는 6명의 작가가 나온다. 이문열, 김영하(사실 김영하는 빼야한다. 교수연구실과 방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 교수연구실은 누구나 드나드는 공간 아니던가.),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이 그들이다. 각각의 작가마다 개성이 뚜렷했다. 그래서 각 장을 읽을 때마다 느껴진 감흥도 천차만별이었다.
 

 먼저 이문열. 한 때 진보 세력이 생각하는 공공의 적이었다. 나 역시 열정이 이성을 지배하던 시기에 이문열을 싫어했다. (지금도 그의 정치적 생각은 싫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방에는 사회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나 가치, 주장 등은 없다.  모든 이데올로기 위에 존재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 이문열의 방에 보수꼴통은 없다. 그저 거장의 숨결이 방 곳곳에 뿜어져 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추억, 지식에 대한 열의, 수많은 책 등이 서재를 지배하고 있다. 소설에 대한 열정도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싸우면서 생긴 상처도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선비 특유의 검소함과 담백함도 느낄 수 있었다. 


 김영하는 빼고. 다음 작가는 강은교. 강은교 시인의 방은 평범해 보인다. 교수라면 의당 있을 서재도 뚜렷한 특징이 없다. 방이 좀 지저분한거? 그건 오히려 교수 서재의 전형 아닌가. 그냥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방이다. 그의 서재 처럼 강은교 시인 역시 평범해 보였다. 이 말은 칭찬이다. 강은교 시인은 문학가들 특유의 우월의식이 없어 보였다. 그저 강의하고 시 쓰고 쓴 시를 딸에게 보여주고 시 낭송의 밤에 참가하는 옆집 이웃 같았다. 모든 시인이 랭보다란 생각은 지독한 선입견이었다. 그래서일까. 강은교 시인은 다른 작가에 비해 유달리 시의 대중화를 강조했다. 그래도 서재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은포. 그곳은 그냥 창터이다. 하지만 시인이 가끔 창을 내려다 보기 위해 또는 책을 읽기 위해 앉는 공간이다. 거기서 시상을 떠올리기도 하고 지친 몸을 쉬기도 한다. 즉 강은교 시인만의 휴식처다. 거기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작가의 사진을 보면 '참 착하다'란 말이 떠오른다. 연신 땀을 흘리는 저자에게 미안해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그의 서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강은교 작가와 공지영 작가의 방은 참 대조적이다. 강은교 작가의 방이 조맹부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면 공지영 작가의 방은 에공쉴레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공지영 작가는 정말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속에 엄청난 열과 에너지를 품고 사는 사람 같았다. 그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노동운동을 했으며 소설을 쓰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풍스럽게 보이는 조용한 방은 공작가의 에너지를 간신히 틀어 안고 방안의 정적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공지영 작가의 세세한 노동운동 설명을 통해 난 그 어떤 역사서적 보다 더 가깝게 80년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공지영 작가의 방황하던 젊은 시절 이야기도 가슴으로 읽을 수 있었다.  


 김용택 시인도 독특하다. 왜사냐면 웃지요란 시구가 떠오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한 반에 3명인 학급의 담임이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다. 창 밖에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으며 사계절마다 모습을 바꾸는 산들이 텅빈 배경을 채우고 있다. 그곳에 김용택 시인이 있다. 조선시대 세력가들이 김용택 시인의 모습을 본다면 저런 지독한 귀양살이는 없을 것이다란 말이 나올 수도. 하지만 도시에서 살기 위해 하루하루 살고있는 내 눈에, 김용택 시인의 삶은 이태백의 행복을 향유하는 그것이었다. 그냥 읽는 순간 그렇게 사는 것도 참 행복하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서재는 세 곳이 소개된다. 그 중 고향집 서재가 김용택 시인과 가장 닮아있다. 책꽂이가 없어 레고처럼 수북히 쌓여있는 책들. 그 책들 안에 있는 책상에서 책을 읽는 시인. 내 방이 곧 나다란 말이 다시 한번 떠오른다.  


  신경숙 시인과의 인터뷰는 시원찮은 것 같다. 내용이 앞의 것들에 비해 부실한 감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방은 얼마나 나를 표현하고 있을까란 생각을 했다. 과연 내 방에도 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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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비낚시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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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룩말의 세계에 사자인 척 하며 얼룩말 말을 완벽하게 구사하는 샴고양이가 나타난다. 샴고양이는 얼룩말 말로 경계심이 낮아진 얼룩말들을 쉽게 잡아먹는다. 얼룩말들은 공포에 빠진다. 일부는 사자의 유령이 나타났다고 믿는다. 한편 얼룩말 이야기꾼은 얼룩말 말을 하는 샴고양이를 소재로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그 때 샴고양이가 나타난다. 하지만 얼룩말 이야기꾼은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기분이 불쾌하다며  뒷발로 샴고양이를 차서 죽인다. 스펜서 홀스트(Spencer Holst)의 '얼룩말 이야기꾼<The Zebra Ztoryteller>'에 나오는 짧막한 우화다.

 

스펜서 홀스트는 얼룩말 이야기꾼을 통해 소설의 의의를 설명한다. 여기서 샴 고양이는 우리를 현혹시키는(deceptive) 현실을 상징한다. 이야기꾼은 그런 거짓 현실을 미리 상상한다. 우리는 이야기꾼의 상상(소설)을 통해 예상하지 못한 현실에 맞딱뜨렸을 때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일반인은 현실을 제한적이고 고정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왜곡해서 받아들인다. 얼룩말이 샴고양이의 위협을 사자의 유령이라고 잘못 파악하듯이 우리도 기만적인 세계에 쉽게 농락당하곤 한다. 하지만 홀스트는 "소설과 이야기는 예상하기 어려운(unexpected) 현실에 우리가 대응할 수 있게 해준다"고 말한다. 즉 우리는 소설을 통해 현실 이면에 있는 진실 인식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가는 세상을 둘러싸고 있는 허구의 외투를 뚫어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야기 형식으로 말이다.

 

김영하의 <굴비낚시>를 읽다가 예전에 읽었던 홀스트의 짧은 우화가 떠올랐다. <굴비낚시>를 한번 천천히 읽고 있으면 왜 내가 김영하를 이 시대의 얼룩말 이야기꾼으로 생각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굴비 낚시>는 '영화 이야기'란 형식을 빌리고 있다. 하지만 다른 영화 서적처럼 영화를 설명해주는 책이 아니다. 여기서 영화는 단순한 매개체다. 추억의 매개체이며 세상을 파헤치는 수단이다. <바람과함께사라지다>를 통해 그는 고3 때 만난 간호사를 추억하며 <대부>를 통해 인간관계의 정치를 파헤친다. 다시 말해 이 책에는 자세한 영화이야기는 없다.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쉽사리 이해 안 가는 부분도 있다. 그렇다. <굴비 낚시>는  세상읽기 형식의 에세이집이다.

 

내가 <굴비 낚시>를 읽고 얼룩말 이야기 꾼을 떠올린 이유는 김영하의 날카로운 눈 때문이다. 다시 말해 사자행세를 하고 얼룩말 말을 구사하는 샴고양이를 보고 그는 샴고양이의 실체를 정확하게 이야기해준다. 그의 날카로운 눈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는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만약 또 다른 이야기꾼이 머리 둘에 날개가 달린 요상한 괴물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다면? 일반 얼룩말들은 그의 이야기를 통해 특별한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얼룩말들도 생각하고 있다. 얼룩말 말을 구사하지만 모양은 사자도 아닌 존재, 뭔가 이상하다. 이 때 이야기꾼이 말한다. 저건 얼룩말 말을 하는 샴고양이야. 그 때 우리는 간지럽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즐거움을 맛본다. 맞다. 저건 샴고양이구나. 샴고양이가 얼룩말 말을 하다니...

 

난 김영하의 날카로움 이면에 솔직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우리도 그가 생각한 내용들을 이미 알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하얀 도화지에 비친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애써 무시하고 싶었을게다. 우리 모두 자신의 욕망을 마주치지 않으려 하지 않는가. 하지만 김영하는 거침없다. 직접 바라보고 상세하게 얘기해준다. 그래서 스스로 자신을 미학적 마조히스트라 칭하지 않던가.

 

특히 <대부>를 읽는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는 대부에 열광한다. 이탈리아 갱들의 후까시에 매료되고 그들 사이에 흐르는 암투를 즐긴다. 형이 동생을 죽이려하고 동생이 형을 죽이는 냉혹한 세계. 김영하는 우리가 <대부>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대부>속에는 절대적으로 선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다.........."우리는 똑같은 위선에 살아갑니다.".....그의 아내 케이는 마이클의 살인을 비난하지만 그것이 먹히지 않자 뱃속의 아이를 살해하는 것으로 그에게 맞선다. 결국 그들은 손에 피만 묻히지 않았다 뿐 똑같은 살인자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그는 정치적 드라마의 밑바닥에 서정이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배신 당할 줄 알면서도 사랑하고, 끊임없이 우리 삶을 피곤하게 만드는 가족에게 애틋함을 느끼며, 등에 칼을 꽂은 친구를 비난하면서 그리워한다." 이렇게 김영하는 소설가의 눈으로 인간관계를 해부하고 있었다.

 

날카로움만 있다면 그게 뭐 대수겠는가. 역시 뛰어난 이야기꾼 답게 짧은 에세이에도 재미란 요소를 잊지 않는다. <주유소습격사건>을 이야기할 때는 여러명의 입을 빌려 이야기한다. 자신이 소설가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고 싶은 듯하다. <매트릭스>를 이야기하며 다리를 걷던 자신의 경험을 재밌게 묘사한다. <부기나이트>는 롤라걸과 바퀴라는 애매모호한 대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소설을 읽는 느낌이다. 재밌다는 의미다.

 

산문집을 읽다보면 작가가 천착하는 문제, 고민하는 생각들이 얼핏 들어난다. 그의 단편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 남자는...>을 샀다. <굴비 낚시>에서 조금은 직접적으로 얼룩말 말을 하는 샴고양이를 드러냈었다. <엘리베이터...>에선 어떤 방식으로 우리 주위를 어슬렁거리는 희긔한 샴고양이를 설명해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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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기막힌 발견 - 머릿속으로 뛰어든 매혹적인 심리 미스테리
스티븐 후안 지음, 배도희 옮김, 안성환 그림 / 네모북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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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장 극악한 범죄자의 뇌, 그러니까 살인범이 뇌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 걸까? 이들에게는 무의식적으로 살인행위를 통해 각성수준을 높이려는 생리적 경향이 있는 걸까? 예를 들어 스릴을 위한 살인 같은 것이 과연 있는 걸까?  


 행동과학 및 의학계의 입장은 다소 모호하다. 따라서 우리는 '범죄적 극치감'을 추구하는 사라들로 부터 대략 추정할 뿐, 살인범의 뇌가 이렇다하고 정확하게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는 계속되고 있기에, 현상에 대한 그림은 점점 명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내용은 <뇌의 기막힌 발견> 중 '살인범의 뇌1'이란 챕터의 서두다. 난 이 짧은 두 문단이 <뇌의 기막힌 발견>이 어떠한 책인지를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글쓰기 전략 중 '티저쓰기'가 있다. 서두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제시하여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이다. 수많은 글들이 나오는 상황에서 시작부터 재미가 없다면 독자들은 아예 읽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티저가 흥미롭다고 꼭 좋은 것 만은 아니다. 티저는 말그대로 끌어들임이다. 티저가 흥미로우면 흥미로울수록 독자는 내용에 대한 기대감을 높인다. 하지만 티저에 걸맞는 내용이 나오지 않는다면? 허무하다. 아예 글을 읽지 않았을 때보다 더 큰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 내가 이런걸 읽으려고 시간 낭비를 했다니. '북한이 미사일을 쏘았다'로 시작하는 글이나 '미국의 FTA공세가 시작됐다;로 시작하는 글은 적어도 성격을 분명히 하지 않는가. 시간 낭비할 일은 없다.

 

뇌는 배신감을 강하게 주는 책이다. 일단 제목부터 흥미롭다. 뇌의 기막힌 발견이라니. 그동안 뇌라 하면 우리 인간을 지배하는 기관쯤으로 생각해왔는데. 기막힌 발견에는 무엇이 있을까. 독자들은 자연히 제목에 끌려든다. 책을 편다면? 마찬가지다. 여전히 흥미롭다. 21세의 존이 이유도 없이 71세의 베티를 폭행한 장면이 나오고 사람이 늑대인간과 흡혈귀가 되는 사례가 소개된다. 자. 흥미는 더욱 커졌다. 왜? 일단 여기에 뇌가 연관되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 사례를 통해 드디어 뇌의 기막힌 발견을 소개하는구나. 흥미로움과 기대감이 절정에 달한다. 그리고 책은 말한다. 이것은 '~~장애' 때문이다. 이게 왜 생기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뇌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순간 인파를 피해 화장실로 가서 위에 가득찬 가스를 배출하려던 찰나, 가스가 위 속으로 삽입되는 그 느낌, 소화가 안 되 소화제를 먹고 트림을 하려던 찰나, 트림의 기운이 사그라드는 느낌이 떠오른다. 100에 달하던 기대감과 흥미로움은 단 번에 사라진다.  

 

이 책은 계속 이런 식이다. 사례를 소개하고, 그게 어떤 장애인지 설명하고, 그게 왜 발생하는지는 연구 중임을 밝히고, 그와 유사한 사례를 다시 들며, 충분히 예측가능한 원인을 밝히는 식이다. 예를 들어 살인자의 뇌에 관한 장을 보자. 이 책은 엄청난 연구진들을 소개한다. 이 연구자들은 오랜 연구 끝에 살인자들은 대체로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제대로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못어울렸으며 친구들과 자주 싸우는 사람들 출신임을 밝힌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고 알콜중독인 경우도 있다. 엄청난 연구진이 오랜 시간을 들여 우리가 쉽게 예상할 수 있는 논리적 결과를 증명해 준 것이다.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없다. 다만 내가 그동안 추측해오던 것들이 미국의 연구진에 의해 증명되었다는 사실만을 알았을 뿐. 새로운 정보를 알기 위해, 특히 뇌에 대한 많은 사실을 알고자 한 독자에게 이 책은 용두사미처럼 보인다.

 

물론 캡그라스 증후군이라는 등 다양한 증후군의 정보를 알려주는 점은 좋다. 게다가 우리가 흔히 마음에 문제라고 생각했던 컴플렉스 등이 뇌와 연관이 있다는 정보는 신선하다. 의지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영역이 의지 밖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 동안 의지박약아로, 난폭자로 낙인 찍힌 많은 사람들이 결국 환자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은 이 책을 읽고 느낀 작은 성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에 대한 피상적 정보만을 알려준 점(한 챕터가 일단 너무 짧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한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점(아직 모른다. 밝혀지지 않았다 등)은 이 책의 커다란 문제로 여겨진다. 같은 문제점이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면서 결국 이 책을 마무리하지 못했다. 여기 까지 읽은게 약간 아깝긴 했지만 매몰비용으로 생각하고 빨리 책에서 손털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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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예비군을 또 다녀왔다. 예비군을 받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훈련은 정말 지겹다. 지겨움이 고문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시간을 보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핸드폰 게임으로 그 긴 시간을 보내는건 아까웠다. 그래서 쉽게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을 찾았다. 그 때 성석제씨가 여름 휴가를 이 책과 함께 보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캉스 하기에 딱 좋은 책이란 의미였다. 좋아. 예비군 훈련 때 읽으려면 일단 중간중간에 잠깐 씩 읽어야 했고 내용이 단순해야 했다. 또 흡입력이 뛰어나야 했다. 성석제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책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어들었다. 터키의 최고 작가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을.

 

책 이야기 하기 전에 잡소리 하나 하자. 소설의 매력 중 하나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 르네상스 시대 영국인의 삶을 살 수 있으며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 재즈시대의 미국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필립 K 딕의 소설을 읽으면 미래로 시간여행도 가능했다. 그런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독자들은 흥미로움을 느끼며 소설에 빠져든다. 이런 점이 바로 외국 소설의 강점이다. 하지만 이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히피 시대를 온 몸으로 겪은 사람이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는다면 그 감동이 자신의 경험과 어우러지면서 극대화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68혁명이 뭔지, 히피 문화가 뭐지 모르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그저 그런 소설과 다를 바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가 프랑스 영화를 보며 잘 웃지 못 하는 것도 이국적인 문화의 차이에서 온다.  외국 소설에 나타나는 이국적인 측면은 독자의 몰입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이게 바로 외국 소설의 딜레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이러한 딜레마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작품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일단 책 표지에도 나타나있듯 이 작품은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궁정화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도 비슷하고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예술에 관한 깊은 대화도 그렇다. 다시 말해 흥미로운 사건을 포장지로 사용하여, 자칫 쉽게 딱딱해질 수 있는 속 내용(메시지)의 부담을 던다. 게다가 형식도 특이하다. 멀티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고나 할까.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각 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길 한다. 예를 들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내이름은 빨강 식으로 각색한다면 1장은 옥희가 이야기하고 2장은 엄마가 이야기하여 자신의 심리를 드러내고 3장에선 사랑방 손님의 목소리가 드러나고, 뭐 이런식이다. 그러니 각 인물들간의 미묘한 심리가 긴장을 일으킨다. 독자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의 퍼즐을 맞추어야 한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야 한다. 가끔은 개가 화자가 되기도 하고 죽음과 시체가 화자가 되기도 한다. 흥미롭다.

 

살인 사건도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살인자가 등장한다. 파묵은 살인자의 정체는 보여주지 않은 채 살인자를 화자로 하는 몇몇 장을 만들어 놓는다. 살인자는 대놓고 묻는다. "여러분은 내가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지?" 참으로 뻔뻔하다. 어쨌든 흥미로운 사건이 흥미로운 형식을 만나면서 소설의 흥미로움은 배가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흥미로운 소설에 빠지지 않는 사랑이야기가 살인사건과 함께 나란히 진행된다. 그래서일까. 난 1권을 예비군 훈련 2일차에 완독했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나오는 미술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야기의 질을 한 층 높인다. 개와 나무 그리고 악마, 화폐 등이 화자로 등장 하는 장에서 작가는 다양한 메시지를 숨겨 놓았다. 예술의 의미, 그리고 형식과 내용의 중요성에 대한 등장 인물들의 논쟁은 인문서적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심도깊다.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통해 중세 교회와 이성의 충돌을 이야기했듯, 파묵은 소설을 통해 미술 형식의 중요성과 미술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예술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훈련 내내 읽으며 생각했다.'음.. 이 소설은 예술작품이야. 예술의 아우라가 느껴져.'

 

2권을 읽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떤 장은 읽다가 넘겨버렸다. 아니 그렇게 흥미롭던 책을 난 왜 그렇게 읽은 것일까? 일단 위에서 언급했던 소설의 이국적인 측면때문이다. 터기 문화는 내게 너무나 이국적이었다. 소설의 주요소재인 세밀화가와 금박 작가를 난 모른다. 중세 술탄이 지배하던 터기의 도시들을 머릿속에 그릴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이 소개하는 그림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자연히 그림 이야기가 늘어갈수록 지루함은 커졌다.  범인을 잡기 위해 주인공 카라와 화원장 오스만이 술탄의 보물창고에 들어가는 장면은 지루함의 극치였다. 3장 가까이 할애되는 이 부분은 오스만이 술탄의 창고에서 그림을 보고 예찬하는 장면이 주가 된다. 그림 소개도 처음엔 흥미로웠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간 후 1시간 이상 지나면 모든 미술작품이 시시해 보이듯, 1쪽 이상을 할애하며 소개하는 그림들이 2권에선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물론 파묵의 소설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중간에 할애된 그림 이야기, 예술에 대한 논의 등은 이 소설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난 예비군 훈련에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그러면서도 약간의 생각할거리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책을 찾았었다. 이 책은 그런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고차원'적인 소설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읽는 마음가짐으로 이 책을 접햇다면 더 큰 감동과 재미을 맛봤겠지만, 난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 마음가짐으로 이 책을 만났다. 

 

 살인자의 정체도 너무 늦게 드러난다. 중간중간에 제시되는 힌트는 미술의 문외한인 내겐 너무 어려웠다. 여기저기 쪼개진 화자의 이야기를 맞추는 일도 피곤했으며 여러 화자의 이야기가 나오다보니 스토리 전개도 조금 더디단 느낌을 받았다.

 

결국 파묵의 소설은 내게 외국 소설이 갖고 있는 강점과 한계를 그래도 드러낸 작품이었다. 게다가 내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인해 이 소설은 내게 어떠한 사고와 감정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현재 쓰고 있는 내용도 형식적 측면의 이야기가 전부 아닌가. 책의 속성과 내 자세의 문제로 인해, 파묵의 작품은 내 기억 속에 요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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