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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10년 만에 정권이 바뀌었다. 선거 후, 실망과 허망함이 몰려왔다. 하지만 감정은 막연했다. 한국시리즈 혈투 끝에 현대가 삼성을 꺾고 우승했던 2004년 한국시리즈가 끝났을 때의 허망함과 비슷했다고나 할까. 아직까지 대통령이 바뀌는 문제는 남의 나라 일이었다. 하지만 난 더 이상 학생이 아니었다. 세상의 변화가 내 눈 앞에서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먼저 회사 사장이 이해 안 가는 이유로 잘렸다. 곧이어 새 정권에 우호적이던 선배들이 새로운 간부가 됐다. 그리고 몇 달 뒤, 내가 일하던 팀이 사라졌다. 이전 사장 때 생겨난 팀이라는 게 주된 이유 같았다. 나를 포함한 팀원들은 매일 아침 피켓을 들었으며, 간부들을 찾아가 항의했다. 일부 언론은 우리의 항의를 기사화했다. 세상은 조금씩 우리의 행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국 한 달여의 투쟁 끝에 팀은 사라졌다. 선배들은 격정의 눈물을 쏟았고, 감정적으로 메마른 내 가슴 한 편에도 큰 구멍이 뚫렸다. 휑한 가슴을 문지르며, 전에 없던 분노와 슬픔, 그리고 무기력함과 패배감을 맛봤다. 어느새 난 세상의 변화가 가져온 파도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사회의 변화는 나 같은 사회 초년병의 삶까지 흔들어 놓고 있었다. 처음으로 사회와 나의 거리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김연수의 장편 소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살았던 개인들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보여준다. 민주화 투쟁으로 세상이 시끄럽던 시절, 소련의 붕괴와 독일의 통일로 하나의 가치관이 붕괴되던 시절(이 시대를 두고 김연수는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991년 5월 이전까지만 해도 대뇌의 언어로 말하던 사람들이 1992년부터 모두 성기의 언어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1991년 5월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의 내면 풍경이었다.’), 그 속에 살던 개인의 삶은 그 어느 때보다 혼란스러웠다. 개인의 삶은 혼란스런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때문에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91년 5월 투쟁 중 학생국장의 쇠파이프에 어깨를 맞은 주인공은 북한 밀입국을 위해 베를린으로 떠나게 됐고, 무등산 야바위꾼에게 모든 돈을 다 잃게 된 이길용은 한민복과 안기부 직원들을 만나 강시우라는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 2차 대전 당시 유태인 수용소에 있었던 헬무트 베르크의 삶도, 팔라우에서 일본군에 소속돼 전쟁을 경험한 주인공의 할아버지의 삶도 전신국 폭파 사건을 목도했던 정민의 삼촌의 삶도, 사회가 흘러가는 방향에 따라 예상하지 못한 곳에 도달했다. 소설 속 인물들의 삶엔 애초부터 목적지가 정해져있지 않았다.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자 하는 관성도 없었다. 그저 혼란스런 사회가 이끄는 대로 흘러갔고, 그 목적지는 비합리적인 세상만큼이나 우울했다. 개인의 삶은 사회 변화의 종속 변수였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사회는 개인의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친다’는 관념적 주제를 손에 잡힐 듯한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려놓는다. 김연수가 들려주는 펄떡이는 활어처럼 생생한 이야기는 우리 삶이 얼마나 불안정한 토대 위에 세워져 있는 지를 보여준다. 사회에서 벌어지는 작은 사건 하나가 우리의 삶 전체를 변화시킬 수 있다. 때문에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잘 따라가다 보면, 감춰진 개인의 사연이 하나씩 드러나게 된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요즘따라 무척 네가 우울한 이유를 잘 모르겠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럼 그 사람에게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의 도미노 현상을 설명해주면 되는 것 처럼 말이다. ‘2007년 대통령이 바뀌었고->장관들이 바뀌었고->고위 공무원들이 바뀌었고->우리 사장이 바뀌었고->간부들이 바뀌었고->내가 일하던 팀이 사라졌고->난 투쟁을 했고->성과는 없었고->패배감을 느끼게 됐고->요즘 부쩍 우울해졌고.’ 때론 전 세대에 발생했던 사건이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하면 십사대 이로 불리하게 싸웠던 두 처의 러시아 함대가 기적적으로 일본 함대를 물리치고 공해상으로 빠져나가는 데 성공해 개전 초기에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더라면 내가 독일까지 가게 되는 일도 없었던 게 아닌가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일본열도를 환호작약하게 만든 이 소식으로 당시 이십팔 세였던 후지이 긴타로의 삶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다.”
강시우와 레이의 인연을 소개하는 데 왠 후지이 긴타로인가. 후지이 긴타로는 레이의 할아버지다. 제물포전으로 인해 레이의 할아버지 후지이 긴타로는 군산으로 건너왔고, 마침 강시우의 할아버지도 군산에 있었다. 강시우와 레이는 그 사실을 알게 되고, 함께 군산으로 여행을 갔다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회의 다양한 사건은 누적되어 다음 세대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하물며 제물포 전쟁의 한 가운데 있었던 개인의 삶이야 얼마나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겠는가. 모든 사람의 삶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광주항쟁은 남한에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우연한 존재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이 죽지 않고 대학에 들어가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미팅을 하고 섹스를 할 수 있었던 까닭은 지극히 단순했다. 1980년 5월 광주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팀이 해체된 후 실제로 한 동안 내가 세상 밖으로 튕겨져 나간 느낌을 받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내 몸의 적응 DNA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내 가치관과 소신을 뒤로 미룬 채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따라 쫒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혹독한 자기검열이 시작된 것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가 내게 준 상처는 깊었다. 팀이 사라진 뒤, 정기적으로 예전 팀원들을 만난다. 한 달간의 투쟁 때문인지, 아니면 각자 공통된 상처를 안고 있어서인지 다들 서로 각별했다. 예전 팀원들과 함께 있으면 주변에 온기가 돌았다. 마치 사회가 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생기는 따스함 같았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 따르면 섭동에서 비롯된 온기라고 할 수 있다.
‘섭동에 대한 문장도 그때 외웠다.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 별들은 중심 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는 다른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때 두 천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히는 것을 충돌이라 하고, 진행경로를 바꾸면서 서로 비켜가는 경우를 조우라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는 섭동을 통해 서로 간에 에너지의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경로와 속도가 변하게 된다.’
분명 사회 전체를 지배한 에너지의 움직임은 암울했다. 하지만 중력의 흐름 속에서 진행 경로를 바꿔 조우를 하는 별처럼, 팀원들은 진행경로를 바꾸고 서로에게 희망의 에너지를 건냈다. 아래로 끌어당기는 중력에 맞선 상승의 에너지가 팀원들 사이에 있었고, 때문에 우린 함께 있으면 사회의 암울함에서 잠시 벗어나 있을 수 있었다. 관계 속엔 행복이 숨어있었다. 예전 팀의 선배 중 하나는 항상 찡그리고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늘 후배들에겐, ‘역사는 항상 발전하는 거니까, 실망할 필요는 없어’라고 말하곤 했다. 선배의 말이 과연 옳은지는 의문이지만, 그건 중요치 않다. 핵심은 선배의 말을 통해 섭동의 따뜻한 에너지가 전달된다는 사실이니까. 사회의 강은 종종 부조리의 호수를 향해 흘러간다. 우리의 삶 역시 강의 급류에 휘말려 함께 부조리의 비극에 도달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린 삶에 희망을 놓을 수 없다. 그 속에 섭동의 에너지가 숨쉬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