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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예비군을 또 다녀왔다. 예비군을 받아본 사람은 알겠지만 훈련은 정말 지겹다. 지겨움이 고문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시간을 보낼 무언가가 필요했다. 핸드폰 게임으로 그 긴 시간을 보내는건 아까웠다. 그래서 쉽게 읽을 수 있는 흥미로운 책을 찾았다. 그 때 성석제씨가 여름 휴가를 이 책과 함께 보내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책캉스 하기에 딱 좋은 책이란 의미였다. 좋아. 예비군 훈련 때 읽으려면 일단 중간중간에 잠깐 씩 읽어야 했고 내용이 단순해야 했다. 또 흡입력이 뛰어나야 했다. 성석제씨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 책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집어들었다. 터키의 최고 작가 오르한 파묵의 <내이름은 빨강>을.
책 이야기 하기 전에 잡소리 하나 하자. 소설의 매력 중 하나가 간접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 르네상스 시대 영국인의 삶을 살 수 있으며 피츠제랄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읽으면 재즈시대의 미국 분위기를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필립 K 딕의 소설을 읽으면 미래로 시간여행도 가능했다. 그런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독자들은 흥미로움을 느끼며 소설에 빠져든다. 이런 점이 바로 외국 소설의 강점이다. 하지만 이 강점은 동시에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히피 시대를 온 몸으로 겪은 사람이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는다면 그 감동이 자신의 경험과 어우러지면서 극대화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68혁명이 뭔지, 히피 문화가 뭐지 모르는 사람에게 이 소설은 그저 그런 소설과 다를 바 없게 느껴질 수도 있다. 우리가 프랑스 영화를 보며 잘 웃지 못 하는 것도 이국적인 문화의 차이에서 온다. 외국 소설에 나타나는 이국적인 측면은 독자의 몰입을 유도하면서 동시에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이게 바로 외국 소설의 딜레마다.
오르한 파묵의 소설은 이러한 딜레마를 고스란히 안고 있는 작품이다. 적어도 내겐 그랬다. 일단 책 표지에도 나타나있듯 이 작품은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연상시킨다. 궁정화가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도 비슷하고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예술에 관한 깊은 대화도 그렇다. 다시 말해 흥미로운 사건을 포장지로 사용하여, 자칫 쉽게 딱딱해질 수 있는 속 내용(메시지)의 부담을 던다. 게다가 형식도 특이하다. 멀티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고나 할까. 각각의 등장인물들은 각 장에서 자신의 목소리로 이야길 한다. 예를 들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내이름은 빨강 식으로 각색한다면 1장은 옥희가 이야기하고 2장은 엄마가 이야기하여 자신의 심리를 드러내고 3장에선 사랑방 손님의 목소리가 드러나고, 뭐 이런식이다. 그러니 각 인물들간의 미묘한 심리가 긴장을 일으킨다. 독자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통해 이야기의 퍼즐을 맞추어야 한다. 머리가 빨리 돌아가야 한다. 가끔은 개가 화자가 되기도 하고 죽음과 시체가 화자가 되기도 한다. 흥미롭다.
살인 사건도 흥미진진하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살인자가 등장한다. 파묵은 살인자의 정체는 보여주지 않은 채 살인자를 화자로 하는 몇몇 장을 만들어 놓는다. 살인자는 대놓고 묻는다. "여러분은 내가 아직도 누군지 모르겠지?" 참으로 뻔뻔하다. 어쨌든 흥미로운 사건이 흥미로운 형식을 만나면서 소설의 흥미로움은 배가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흥미로운 소설에 빠지지 않는 사랑이야기가 살인사건과 함께 나란히 진행된다. 그래서일까. 난 1권을 예비군 훈련 2일차에 완독했다.
게다가 중간 중간에 나오는 미술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야기의 질을 한 층 높인다. 개와 나무 그리고 악마, 화폐 등이 화자로 등장 하는 장에서 작가는 다양한 메시지를 숨겨 놓았다. 예술의 의미, 그리고 형식과 내용의 중요성에 대한 등장 인물들의 논쟁은 인문서적에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심도깊다.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통해 중세 교회와 이성의 충돌을 이야기했듯, 파묵은 소설을 통해 미술 형식의 중요성과 미술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예술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훈련 내내 읽으며 생각했다.'음.. 이 소설은 예술작품이야. 예술의 아우라가 느껴져.'
2권을 읽는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어떤 장은 읽다가 넘겨버렸다. 아니 그렇게 흥미롭던 책을 난 왜 그렇게 읽은 것일까? 일단 위에서 언급했던 소설의 이국적인 측면때문이다. 터기 문화는 내게 너무나 이국적이었다. 소설의 주요소재인 세밀화가와 금박 작가를 난 모른다. 중세 술탄이 지배하던 터기의 도시들을 머릿속에 그릴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이 소개하는 그림을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자연히 그림 이야기가 늘어갈수록 지루함은 커졌다. 범인을 잡기 위해 주인공 카라와 화원장 오스만이 술탄의 보물창고에 들어가는 장면은 지루함의 극치였다. 3장 가까이 할애되는 이 부분은 오스만이 술탄의 창고에서 그림을 보고 예찬하는 장면이 주가 된다. 그림 소개도 처음엔 흥미로웠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간 후 1시간 이상 지나면 모든 미술작품이 시시해 보이듯, 1쪽 이상을 할애하며 소개하는 그림들이 2권에선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물론 파묵의 소설을 내가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중간에 할애된 그림 이야기, 예술에 대한 논의 등은 이 소설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난 예비군 훈련에서 머리를 식힐 수 있는, 그러면서도 약간의 생각할거리와 감동을 줄 수 있는 책을 찾았었다. 이 책은 그런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너무 '고차원'적인 소설이었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읽는 마음가짐으로 이 책을 접햇다면 더 큰 감동과 재미을 맛봤겠지만, 난 박민규의 소설을 읽는 마음가짐으로 이 책을 만났다.
살인자의 정체도 너무 늦게 드러난다. 중간중간에 제시되는 힌트는 미술의 문외한인 내겐 너무 어려웠다. 여기저기 쪼개진 화자의 이야기를 맞추는 일도 피곤했으며 여러 화자의 이야기가 나오다보니 스토리 전개도 조금 더디단 느낌을 받았다.
결국 파묵의 소설은 내게 외국 소설이 갖고 있는 강점과 한계를 그래도 드러낸 작품이었다. 게다가 내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인해 이 소설은 내게 어떠한 사고와 감정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했다. 현재 쓰고 있는 내용도 형식적 측면의 이야기가 전부 아닌가. 책의 속성과 내 자세의 문제로 인해, 파묵의 작품은 내 기억 속에 요절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