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방 - 우리 시대 대표 작가 6인의 책과 서재 이야기
박래부 지음, 안희원 그림, 박신우 사진 / 서해문집 / 2006년 6월
평점 :
품절


내가 제대할 무렵, 싸이월드의 미니홈피를 모르면 순도100% 복학생 취급을 받았었다. 너도나도 미니홈피를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침대도 사고 가구도 샀다. 액자를 걸어놓는 사람도 있었고 분홍색 벽지로 도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랬다. 그곳은 사이버 공간의 방이었다. 사람들은 방을 꾸미듯 미니홈피를 꾸몄다.
 

 난 미니홈피가 싫었다. 미니홈피가 내 은밀한 관음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있었겠다. 하지만 내게 미니홈피는 가식적으로 느껴졌다. 미니홈피의 안에 사람들은 모두가 행복하다. 항상 웃고 있다. 방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사람들은 미니홈피를 통해 '난 세상에서 정말 행복한 사람이야'를 내세우고 있는 듯 했다.  실연당한 후 전 여친의 싸이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이가 늘어났다. 난 이렇게 괴로운데 쟤는 행복하네. 미니홈피는 자신의 생을 가장 아름답고 수준높게 꾸며주는 공간이다. 그렇다면 그 가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답은 하나다. 미니홈피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공간이었다는 사실. 이로 인해 미니홈피에는 진실성이 희박해 보인다.


 그렇다면 진짜 우리 방은 어떠한가. 방은 나를 오롯이 드러내는 공간이다. 내가 생활하는 곳이다. 오직 나만을 위한 공간이다. 내 생활과 인생이 방 곳곳에 스며든다. 그래서 친한 친구나 연인의 방에 가면 그 사람의 성향이나 특징을 예측할 수 있다.  방에는 나의 진실이 숨쉬고 있다. 그 진실은  아름답기도 추하기도 하다. 그러나 상관없다. 나만을 위한 공간이기에. 개인적 공간이 줄어드는 요즘, 방은 사생활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라 할 수 있다. 나를 완전히 드러내주는 공간이기에 사람들은 자신의 방을 보여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가식과 정치가 인간관계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방이라는 내 나부를 보여주는 일은 교섭과 협상에 불리하다.
 

 그런데 박래부 기자가 작가들의 방을 차례로 침공(?)했다. 물론  건축학적 의미를 찾기 위해 방을 침공한건 아니다. 방은 작가들을 소개해주는 매개체로 사용됐다. 방을 통해, 방의 장식물을 통해, 방에 있는 책들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숨결을 느끼고 그들의 삶을 인식 할 수 있었다. 사실 난 이 책을 특별한 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그림과 사진이 많길래 금방 볼 수 있을거라 생각하고 집어들었다.) 하지만 어떤 인터뷰집보다 이 책은 진실됐다. 방을 통해 작가의 삶과 생각을 몰래 훔쳐본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 난 <작가의 방>이 참 좋았다.
 

작가의 방에는 6명의 작가가 나온다. 이문열, 김영하(사실 김영하는 빼야한다. 교수연구실과 방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 교수연구실은 누구나 드나드는 공간 아니던가.),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이 그들이다. 각각의 작가마다 개성이 뚜렷했다. 그래서 각 장을 읽을 때마다 느껴진 감흥도 천차만별이었다.
 

 먼저 이문열. 한 때 진보 세력이 생각하는 공공의 적이었다. 나 역시 열정이 이성을 지배하던 시기에 이문열을 싫어했다. (지금도 그의 정치적 생각은 싫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방에는 사회에서 드러나는 이데올로기나 가치, 주장 등은 없다.  모든 이데올로기 위에 존재하는 인간만 있을 뿐이다. 이문열의 방에 보수꼴통은 없다. 그저 거장의 숨결이 방 곳곳에 뿜어져 있다. 어린 시절 겪었던 아버지의 추억, 지식에 대한 열의, 수많은 책 등이 서재를 지배하고 있다. 소설에 대한 열정도 여기저기를 장식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싸우면서 생긴 상처도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선비 특유의 검소함과 담백함도 느낄 수 있었다. 


 김영하는 빼고. 다음 작가는 강은교. 강은교 시인의 방은 평범해 보인다. 교수라면 의당 있을 서재도 뚜렷한 특징이 없다. 방이 좀 지저분한거? 그건 오히려 교수 서재의 전형 아닌가. 그냥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방이다. 그의 서재 처럼 강은교 시인 역시 평범해 보였다. 이 말은 칭찬이다. 강은교 시인은 문학가들 특유의 우월의식이 없어 보였다. 그저 강의하고 시 쓰고 쓴 시를 딸에게 보여주고 시 낭송의 밤에 참가하는 옆집 이웃 같았다. 모든 시인이 랭보다란 생각은 지독한 선입견이었다. 그래서일까. 강은교 시인은 다른 작가에 비해 유달리 시의 대중화를 강조했다. 그래도 서재에 한 가지 특징이 있다. 은포. 그곳은 그냥 창터이다. 하지만 시인이 가끔 창을 내려다 보기 위해 또는 책을 읽기 위해 앉는 공간이다. 거기서 시상을 떠올리기도 하고 지친 몸을 쉬기도 한다. 즉 강은교 시인만의 휴식처다. 거기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작가의 사진을 보면 '참 착하다'란 말이 떠오른다. 연신 땀을 흘리는 저자에게 미안해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그의 서재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강은교 작가와 공지영 작가의 방은 참 대조적이다. 강은교 작가의 방이 조맹부의 수묵화를 연상시킨다면 공지영 작가의 방은 에공쉴레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그만큼 공지영 작가는 정말 치열한 삶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속에 엄청난 열과 에너지를 품고 사는 사람 같았다. 그 에너지를 원동력으로 노동운동을 했으며 소설을 쓰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고풍스럽게 보이는 조용한 방은 공작가의 에너지를 간신히 틀어 안고 방안의 정적을 유지하고 있는 듯했다. 공지영 작가의 세세한 노동운동 설명을 통해 난 그 어떤 역사서적 보다 더 가깝게 80년대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공지영 작가의 방황하던 젊은 시절 이야기도 가슴으로 읽을 수 있었다.  


 김용택 시인도 독특하다. 왜사냐면 웃지요란 시구가 떠오르는 삶을 살고 있었다. 한 반에 3명인 학급의 담임이다.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는다. 창 밖에는 섬진강이 흐르고 있으며 사계절마다 모습을 바꾸는 산들이 텅빈 배경을 채우고 있다. 그곳에 김용택 시인이 있다. 조선시대 세력가들이 김용택 시인의 모습을 본다면 저런 지독한 귀양살이는 없을 것이다란 말이 나올 수도. 하지만 도시에서 살기 위해 하루하루 살고있는 내 눈에, 김용택 시인의 삶은 이태백의 행복을 향유하는 그것이었다. 그냥 읽는 순간 그렇게 사는 것도 참 행복하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서재는 세 곳이 소개된다. 그 중 고향집 서재가 김용택 시인과 가장 닮아있다. 책꽂이가 없어 레고처럼 수북히 쌓여있는 책들. 그 책들 안에 있는 책상에서 책을 읽는 시인. 내 방이 곧 나다란 말이 다시 한번 떠오른다.  


  신경숙 시인과의 인터뷰는 시원찮은 것 같다. 내용이 앞의 것들에 비해 부실한 감이 있다.

 책을 읽는 내내 내 방은 얼마나 나를 표현하고 있을까란 생각을 했다. 과연 내 방에도 내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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