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살 인생 - MBC 느낌표 선정도서
위기철 지음 / 청년사 / 200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아홉수라는 말이 있다. 아홉,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마흔 아홉.... 그런데 그 아홉이라는 숫자가 갖고 있는 느낌은 참 묘하다. 그 아홉을 넘기면 새로운 숫자의 의미가 따라오기 때문일까?  아홉에서 열로, 열아홉에서 스물로,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서른 아홉에서 마흔으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도 있지만 그말에 그렇구나 고개 끄덕이며 진정으로 수긍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숫자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느끼고 싶을 뿐일게다. 아무래도 스물아홉과 서른 아홉의 차이는 확실하게 다를테니 말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아홉수라는 게 일상적으로 씌여지는 의미가 그리 좋지만은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이제 다른 숫자의 인생을 살게 될테니 좀 더 열심히 살라는 뜻은 아니었을까?

자전적인 소설인 듯 보여진다. 자신이 지나왔던 길을 반추해보며 다시 한번 글로 옮긴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을텐데 이 책은 정말이지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나는 아홉살에 뭘 했지? 내가 지나쳐 온 아홉살적의 기억을 나는 온전히 갖고 있기나 한가?  어느 순간에 나는 이렇게 묻고 있다. 작가가 살아온 아홉살 인생은 정말이지 파란만장하다. 아이가 아이다울 때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생활이라는 가면속에서는 아이가 어른처럼 살아가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지나치게 행복했던 사람이 아니라면, 아홉 살은 세상을 느낄 만한 나이이다"... 이 말에 나 역시도 공감한다. 지나치게 행복했던 사람이 아니었던 까닭에.. 그리고 삶이 나에게 아이처럼 살지 말아야 한다고 끝도 없이 속삭였던 까닭에..

작가가 살아냈던 책속의 세상은 지금의 아이들이 이해하기에 조금은 역부족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앞선다.  지금의 아이들이 살아가는 세상과 그 시절의 아홉살 아이가 겪어야 했던 세상은 너무도 다른 까닭이다.  여러 갈래의 길로 나를 인도해 주는 작가의 아홉살적 삶은 나에게도 한편의 영화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자식들 손에 흙안묻게 한다고 도시로 올라오셨다는 우리 부모님.. 그 때부터 우리도 산꼭대기 집을 오르락 내리락거렸다. 눈이라도 올라치면 그 비탈길을 내려갈 엄두가 나지 않아 집에서부터 연탄재 한장을 들고 나와 그것을 깨뜨리고 부수며 길을 내려 갔었는데 단지 우리뿐만이 아니라 그 산동네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그때가 연탄재를 치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었다.  여름이면 그 언덕길을 한번 올라갈 때마다 땀으로 목욕을 했었고 흔하지 않았던 물때문에 속시원히 샤워조차도 하지 못했었다.

"얘야, 너도 어른이 되어 보면 세상에 화가 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이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다른 사람한테 화를내게 되는 일이 있어도 그건 결국 자신한테 화를 내는 거란다. 자신이 밉기 때문이지.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108쪽)

가난은 죄가 아니란다. 하지만 아홉살 인생을 거쳐 마흔 아홉의 인생을 바라보는 이만큼의 세월을 살아보니 가난은 역시 죄다. 좀 서글픈 얘기지만 가난했기에 내가 겪어야 했던 그 많은 일들을 돌이켜보아도 역시 가난은 죄였다. 살다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들도 많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아니 이해할 수 없는 일, 이해하기 싫은 일들도 참 많다.  비록 어린나이였다 할지라도.. 엄청 화가 나서 이세상이 한번쯤 뒤집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여러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내가 생각했었던 것은 작가의 말처럼 내 자신이 미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거였다. 어른이 되면 달라지겠지 했던 그 마음들이 어느순간 눈처럼 녹아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채고나면 그때부터 온전하게 다가오던 내 몫의 인생이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그렇게 내 앞에 놓여진다.

- 여러분, 검은제비는 잘 있습니까?
슬픔과 외로움과 가난과 불행의 정체를 알아보려 하지도 않은 채, 제 피붙이와 제 자신을 향해 애꿎은 저주를 퍼붓고 뾰족한 송곳을 던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도저히 용서해선 안될 적들은 쉽사리 용서하면서, 제 피붙이와 제 자신의 가슴엔 쉽사리 칼질을 해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 검은제비는 잘 있습니까? 혹시, 당신이 검은제비 아닙니까? (183쪽)

참 많이 아프다. 어찌 저리도 날카로운 칼끝을 들이대는지... 제 자신의 삶을 어쩌지 못한 채 가족들을 못살게 굴며 제 자신의 인생을 원망하던 검은제비의 아버지는 어느날 싸늘한 죽음으로 길가에서 발견되지만 그 아들 검은제비에게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원망과 고통만을 안겨주었었다. 장남이니까 이제는 돈벌러 가야한다고 말하던 동네 대빵 검은 제비는 그 나이에 애어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아홉살 인생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저마다에게 주어진 몫만큼만 살아냈던 것 같다. 아프도록 자신을 원망하면서... 하지만 작가는 그 처절함속에서조차 희망은 있다고 말한다. 혹시 당신이 검은제비가 아니냐고 물으면서 결코 그래서는 안되는거라고 되새김질 해 주고 싶어하는 것 같다. 절망이 내 안에서 시작되었듯이 희망 또한 내 안에서 비롯되어지는 거라고 그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그가 살았던 아홉살 인생길에서 나는 내 지난날의 환영을 만났다. 이제는 아파하면 안되는거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떠난 내 아홉살 인생... 이 책을 쓴 작가의 아홉살 인생때문에 한동안 아플 것 같다. 그리고 그 아픔이 다시 내게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찾아 올 것을 믿어보려 한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호텔 선인장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사사키 아츠코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아무래도 에쿠니 가오리하면 《냉정과 열정사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채화같았던 그 사랑이야기를 얼마나 가슴 졸이며 읽었었는지.. 읽고 난 책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나만의 규칙을 깨면서까지 그 소설에 매료되어서 결국 영화까지 보고야 말았지만 두번의 선택 모두 나에게는 참으로 멋지게 다가왔었다. 꿈같지만 결코 꿈같지 않은 이야기로 느껴지던 그 매력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 《호텔 선인장》을 선택하면서도 에쿠니 가오리라는 이름 하나때문에 망설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는 한줄의 글귀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호텔 선인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아하! 한다.  이름이 '호텔 선인장'인 낡은 아파트안에서 생겨나는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그 낡은 아파트의 3층 구석방에는 '모자'가 살고, 2층 구석방에는 '오이'가 살며, 1층 구석방에는 숫자'2'가 산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친구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책속의 세 주인공들 역시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웃과 친해진다는 그 절차를 무리없이 밟게 된다.  윗층에서 들려오는 소음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1층의 숫자 '2'는 결국 '오이'가 살고 있는 2층의 구석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게 된다. 그 소음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오이'를 이끌고 숫자 '2'는 다시 3층의 '모자'를 찾아 나선다. 그 이유는 딱 한가지다. 아래층의 내가 이렇게 시끄러우니 바로 윗층의 너 역시도 시끄럽지 않느냐는 동의를 얻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3층의 '모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상관없다고..  그렇게해서 아래윗층의 세사람은 친구가 된다. 서로 다른 성격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세사람이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와 사랑을 나누어가게 되는 그 시간속에는 즐겁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살풋 나의 마음속에 비릿하게 전해져오는 서글픔도 있었다.  어찌 삶이 즐겁기만 하겠는가!

혼자일 때는 몰랐던 많은 감정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어올 때 그들이 대처하는 방식 또한 눈물겹다. 생각의 차이가 있고 직업조차도 서로 달랐던 이들이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 또한 정한 이치대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분히 평범하게 보여지는 일상속에서 다분히 평범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동화를 읽고 있는 것인지, 우화를 읽고 있는것인지, 성인용 소설을 읽고 있는것인지 조금 난해할 때가 있다.  경마장에 가던 날, 소심한 성격의 숫자 '2'만이 겨우 차비를 남겼을 뿐인채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 운동을 좋아하던 '오이'는 아파트까지 천천히 달려서 돌아오게 되지만, 차비가 없어 난처해진 '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숫자 '2'가 할 수 없이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해서 한사람 몫의 요금만으로 둘이 함께 돌아올 수 있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였지만 나는 뭔가 한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이때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가며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의인화 소설같기도 하면서 또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 참 묘하다. 세사람의 일상속에 숨겨져 있는 아주 솔직한 우리의 모습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숫자 '2'의 생일날 '2'가 태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장면은 묘하게도 한참을 머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2의 아버지는 숫자 '14'이며, 어머니는 숫자 '7'이었습니다. 두사람이 나눗셈을 하였기에 2가 태어난 것입니다. 덧셈을 했다면 21이, 곱셈을 했다면 98이 태어났을 테죠. 그렇지만 2의 부모님은 나눗셈이 좋았던 모양인지, 2의 누나도 형도, 두 여동생도 모두 '2'입니다... 덧셈도, 곱셈도 아닌 나눗셈이라는 말에 나는 왠지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왜 그랬는지는 묻지 말자. 왠지 저 짧은 문장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니... 우리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그 무언가가 저 짧은 문장속에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니... 세사람이 모두같이 '오이'의 고향으로 여행을 떠나던 날의 설레임은 우리의 삶속에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일탈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길들여진 것에 대한 소홀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늘 곁에 있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내 생활의 배경쯤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길들여진 것들에 대한 의미... 그들의 여행길을 따라나섰던 나에게는 그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주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도시생활이 좋아 도시로 떠났던 '오이'에게는 그 고향에서의 시간들이 특별할 게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돌아온다. 일탈은 그저 일탈일 뿐이다.

낡은 아파트를 철거해야 한다는 말에 세사람의 의견은 엇갈리지만 그러면서도  제각각 살아가야 할 곳을 찾아 하나씩 준비를 해 나간다. 호텔 선인장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들은 이제 다시 각자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 당혹스러웠고, 이미 서로가 서로를 만나고 알게 되어버린 그 순간에는 그들에게 서로가 없는 장소와 있는 장소의 의미가 어쩔 수 없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만남이 있었으니 헤어짐이 있다는 규칙은 철저하다. 그 아쉬움에 '어쩐지 수상쩍어서' 혹은 '위험스러워서' 다가가지 않겠다고 마음 먹고 있는 부근의 술집으로 몰려가던 날 '2'가 말했었다.  "희한한 일이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방해가 되지 않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방해가 되지 않는 우리의 일상... 참으로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는 단 한줄의 글귀앞에서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춰야 했다. 무심함일게다. 처절하리만치 개인적인 우리의 삶을 저토록 힘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숫자 '2'와 '오이'와 '모자'.. 이들 세사람이 안고 있는 특성속에는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치와 이웃과 이웃이 함께 맺어져 살아가는 삶의 고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멀리 떠나왔어도 늘 마음속에 깊은 사랑으로 자리하는 가족에 대한 의미등... 특별하지 않은 문체로 아주 특별하게 그려주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만의 매력이 듬뿍 묻어나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선인장', 이것이 이  아파트의 이름이었습니다. 호텔이 아니라 아파트인데도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호텔 선인장에는 일찍이, '모자'와 '오이'와 숫자 '2'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당에는 검은 고양이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그리운 아파트는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편의 전설이 되어버린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설처럼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와 지금의 우리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듯이 우리의 이야기 또한 그렇게 전설처럼 기억되어지리라... 그들 세사람의 이야기처럼. 평범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처럼. 

책을 읽는 동안 볼 수 있었던 몇 편의 삽화가  나에게는 참으로 멋진 상상의 날개를 선물로 준 것 같다. 사실적인 묘사가 이 책속의 문체와 어쩌면 그리도 찰떡 궁합인지.. 그림조차도 이 책의 이야기처럼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그림이 안고 있는 느낌들이 너무 포근하고 좋았다. 어디로든 시선만 돌리면 언제든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그림들은 이 책속의 주인공들과 좀 더 친근해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준 것 같기도 하고... 우리 가슴속에, 가족 이상으로 소중한 이웃사촌과 친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수선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역자 후기처럼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아이비생각

  책속의 삽화하나.. 사사키아츠코 작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녁놀 지는 마을
유모토 카즈미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먹먹하다.  가슴속을 무언가가 쓰윽 훑고 지나간 것만 같다. 저마다의 몫으로 살아내야 할 삶의 무게가 다르기에 어쩌면 저마다의 삶의 무게가 더 무겁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가 생각났다. 하느님, 왜 제게만 이토록 무거운 십자가를 지우셨습니까? 물으니 그렇다면 저사람의 십자가와 바꿔 보겠느냐? 하여 바꾸었지만 그 역시도 만만찮은 무게였다는 이야기.. 어찌되었든 온전한 나만의 몫이기에 그토록 무거운 것일게다.. 아니 무겁게만 느껴지는 것일게다..

아버지에 대해 생각한다. 아버지.. 과연 아버지란 존재가 갖고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어쩌면 질서이면서 정의가 아니었을까?  어느날 불현듯 소식도 없이 나의 공간속으로 들어와 웅크린 채 살아가고 있던 아버지라는 존재는 이미 오래된 흉터처럼 되어버린 지나가버린 날들에 대한 회한을 불러온다.  그 흉터를 바라볼 때마다 생각이 나 자꾸만 아픈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것들을 기억이라고 말해야 할까, 추억이라고 말해야 할까.. 가족을 내팽개치고 혼자만의 생활속에서 허덕이던 아버지의 인생은 역시 온전히 아버지만의 몫일 뿐이다. 이미 오래전에 흩어져버린 엄마의 마음이 외할아버지인 짱구영감이 나타난 뒤로 하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모습을 어린 나의 시선을 통해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은 엄마의 모습이자 또한 아버지의 모습이었으며 불쑥 커져버려 이미 지나간 시간들을 회상하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을 읽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한밤중에 손톱을 깎으면 부모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다고 하면서도 굳이 한밤중에 일부러 선명한 소리를 내며 손톱을 깎아대던 그 딸의 원망을 아버지는 벌써 알고 있었을 게다. 목각인형처럼 굳어버린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오랫동안 수고많으셨다고 한마디 해 줄 수 있었던 딸의 마음속에 우물처럼 고였을 그 눈물이 보이는 것만 같아 나도 가슴이 울컥했었다.  엉킨 실타래 같은 삶의 한 모퉁이에서 울먹이며 도움을 청하던 그 딸의 마음을 아버지는 아마도 고스란히 안고 가셨을게다.  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보듬어주기 위해 신새벽길을 걸어 뻘밭에서 캐낸 피조개 두 양동이를 들고 왔던 아버지의 마음을 딸도 고스란히 안아 들었을게다.. 어린 시절에 짱구영감과 어머니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풀지 못했던 매듭을 하나둘씩 말없이 마음만으로 풀어나가는 짱구영감과 어머니.. 그 시간이 너무 짧을까봐 애를 태우며 어쩌지 못하는 어머니를 위해 짱구영감은 죽음조차도 유예시켰는가!.. 가족이다. 진정으로 가족이란 의미속에서 풀리지 않을 문제는 없는 것 같다. 단지 고집피우며 앙앙거릴 뿐..

어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어머니.. 그 존재감속에 함께 하는 안정과 평안의 소리들.. 그 소리들이 있어 어쩌면 우리는 이 버거운 삶의 여정을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미 옛이야기가 되어버린 아버지와 어머니 세대의 어머니들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게다. 늘 곁에 있어주었기에 존재감마져도 느낄 수 없었던...  우리의 부모세대가 왜 그렇게 살아야 했느냐고는 묻지 못할 것 같다. 끝내 가슴속의 이야기를 다 풀어내지 못한 채 눈을 감아야 했던 책속의 짱구영감을 보면서 내 아버지가 생각나 눈물이 났다. 저녁놀 지는 마을에서 나는 생각해 본다. 단지 시대적인 배경만이 변했을 뿐이라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가족이라는 의미는 변하지 않았을 거라고.. 변할 수도, 변해서도 안되는 거라고..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깊숙한 곳의 울림은 정말 감동적이다. 차마 말로는 할 수 없었던 많은 것들이 조용하게 바람결처럼 나를 훑으며 지나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해져오는 마음의 소리가  쏟아져버린 물처럼 흥건하게 나에게 젖어든다.  그리고 그 안에 포근함도 담겨져 있으니 넘기는 책장마다 하나씩 찾아지는 아련함이 참 좋다.  아무리 미워도 미워할 수 없는 그런 것들.. 저녁놀 지는 마을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별것 아닌 이야기 같은데  이상하게도 꽤나  묵직하게 느껴진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하라 이야기 - 아주 특별한 사막 신혼일기
싼마오 지음, 조은 옮김 / 막내집게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탁구공을 튕겨 본 적이 있는가?  그 가벼운 통통거림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책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주저없이 이 책을 소개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어쩌면 어둡고 힘겨웠을 시절의 이야기였을지도 모를 자신만의 시간을 탁구공을 튕기듯이 그렇게 유쾌하게 전해주고 있는 작가에 대해 새삼 놀라움을 느낀다. 잡지에서 우연히 본 사진 한장으로 막연하게 사막에 대한 열정을 키워왔던 작가의 그 마음이 앞날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과 뭐가 다를까 싶었다. 산문집이라는 책표지의 안내글을 보면서 여행을 하며 느낀 것들을 감성적으로 그려냈을 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 책을 만났었다. 하지만 이 책은 여행서도 아니오, 개인적인 감성을 이겨내지 못하는 한사람만의 산문집도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막에서의 생활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인 한 여인의 밝고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이라고 나는 그렇게 나름대로의 결론을 내려본다.

처음 서문을 대신해서 보여주는 엄마의 편지가 없었다면 나는 아마도 그럴 듯한 소설 한편쯤으로 치부해버렸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이 책속에서 천방지축 대만처녀 싼마오가 살아내는 사막생활은 리얼하다.  생각과 판단 자체가 단순하기만 한 스페인 총각 호세와 결혼을 하고 (사실 결혼에 이르기까지의 전개과정조차도 한편의 소설처럼 느껴진다)  저들만의 생활에 푹 젖어사는 사하라 이웃들과 겪어가는 싼마오의 신혼일지는 바라보는 내내 내게 웃음을 선사해 주었다.  깊은 좌절을 느껴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사막에 익숙해져 가는 과정에서 작은 좌절을 겪었을 뿐이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절대로 사막을 미워하지 않기로 하는 싼마오.. 사람사는 곳은 어디나 같다고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은 그 철두철미하게  얄미운 사하라 이웃들과 티격태격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던 때가 아닌가 싶다.

정말 알콩달콩한 신혼이야기다. 무엇하나 내노라 할 것 없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그들에게는 오직 꾸미고 가꿔야 할 행복만이 있을 뿐이다. 버려진 폐품을 모아 집을 꾸미고 가구를 만들면서도 그들은 함박같은 웃음으로 마무리 할 줄 아는 지혜를 지녔다. 아주 작은 돌 하나, 보잘 것 없는 풀 한포기에도 감사하며 사랑할 줄 아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아니 그렇게 작은 것들까지도 사랑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엉터리같은 의사노릇을 하는 싼마오를 보면서 진정한 의술이란 게 저런 마음이 아닐까 싶기도 했고, 움켜 쥘 줄만 아는 이웃들에게조차 미움을 표현하지 않는 싼마오의 마음을 보면서 베품에 대한 의미를 다시한번 생각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황량한 사막.. 달리고 달려도 모래뿐인 그 공간속에서 색다른 것을 찾아내기 위해 끝도 없이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호세와 싼마오.. 작은 새랑 거북이랑 조개화석이 있는 곳을 보러가기 위해 정신없이 길을 떠났던 어느날의 사건.. 사막의 진흙늪에 빠진 호세를 두고 떠나지 못했던 싼마오에게 들이닥친 힘겨운 역경 한조각은 나조차도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고 말았다. 죽음을 바라보는 순간에서도 서로를 위한 격려의 한마디를 잊지 않았던 호세와 싼마오의 사랑은 그 진흙늪에서 그들을 탈출하게 만들어 준다.  서로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참으로 아름답게 보여지던 대목이었다.

싼마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나도 사하라 사람들의 삶의 현장속에 들어가 있다. 그림과 이야기만으로 다가오던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사막의 이미지는 저 멀리로 던져버린 채 그들이 살아내고 있는 현실적인 위치를 찾아낼 수 있도록 안내를 해주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야말로 마음가는데로 영혼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싼마오의 신혼일기를 보면서 와, 사람이 이렇게도 살 수 있는거구나!.. 싶었다. 한편 부럽기도 했고 한편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집시... 그녀에게는 정말 딱 어울리는 명칭이다.  사막에서 가장 아름답고 진귀하다는 선홍색 꽃 '천국새'를 나도 한번 보고 싶다.  그리고 이 멋진 사막세계를 소개시켜준 싼마오의 다른 작품을 한번 더 만나보고 싶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꺼비가 뿔났다
모리스 글라이츠만 지음, 이정아 옮김 / 키움미디어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두꺼비가 뿔났단다. 왜 뿔났을까? 도대체 그 작은 두꺼비를 뿔나게 한 것은 누구일까?  책표지를 장식한 두꺼비의 표정을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그 두꺼비 정말 뿔났다!

납작 떡이 되어 자신의 곁을 떠나는 수많은 친척들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알았던 림피가 과감하게 인간세상을 향해 떠나던 날, 아자! 나는 그에게 힘을 불어넣어주고 싶었다. 그런데 通 하였느냐? 고 묻는다면 아니올시다! 이다. 결코 통하지 못했다.  인간과 두꺼비 림피에게는 소통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랬다고 실망한다면 큰 코 다친다. 두꺼비 림피의 그 간절함이 결국은 해냈으니까!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방향을 찾았으며 상대방을 인정할 줄 아는 마음을 배웠으니 말이다. 그 두꺼비 림피가 뿔났던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 간단하다.  우리가 인간들을 못살게 군 것도 아닌데 왜 우리를 납작 떡이 되게 하느냐였다.  그래서 두꺼비 림피는 묻고 싶었다. 왜 우리를 미워하느냐고. 왜 우리에게 돌을 던지느냐고. 화해를 청할 작정이었지만 메스껍고 구역질 나게 생겼다는 외모는 림피에게 절망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인간이 자신들의 이익과 편리성을 위해 자신들 맘대로 두꺼비들의 고향에서 엉뚱한 곳으로 옮겨다놓았으면서도 그런점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미안함 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뿔날 수 밖에!

두꺼비 림피의 위험한 여행속에는 많은 곤충들과의 만남이 있다. 하나같이 인간이 싫어하는 곤충들이다. 모기, 바퀴벌레, 초파리, 민달팽이... 뭔가 오해가 있을거라고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인간세상을 향해 떠났던 림피가 하나 둘씩 알아가는 삶의 진실은 참으로 아프다. 견뎌내야 하는 것들, 받아들여야 하는 것들, 그리고 가끔씩은 모르는 척, 아닌 척 해야 하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한 소녀가 자신의 진심과 통한다고 느끼던 그 순간조차도 두꺼비 림피에게는 아픔이었다. 이쯤에서 나는 묻고 싶었다. 정말 인간은 자연과 화해할 수는 없는 것일까? 자연을 화나게 해놓고 내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그렇게 아닌 척, 모르는 척 언제까지 그렇게 할 것인지..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들곤 한다. 오해가 있다면 그것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두꺼비 림피처럼.

《폼포코 너구리 작전》이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도시개발로 인하여 자신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터전인 숲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 너구리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들이 숲을 파괴할 수 없도록 작전을 세우기 위해 원로 너구리를 중심으로 모여 회의를 했었다. 변신할 수 있는 그들의 속성을 살려내 변신 연습을 하면서도 그들이 염려했던 것은  변신해야만 하는 일이 생겼다는 것은 결코 그들에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사촌 두꺼비 골리앗처럼 인간에게 정면돌파를 해야 한다는 과격파가 있었고 림피처럼 유화책을 쓰자는 온건파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했던 것은 한결같이 똑같았다. 인간은 자신들의 편리와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치의 양보도 하지 않는다는 것, 그러니 그들 스스로가 인간의 그런 점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는 것이다.  너구리들은 변신의 속성을 이용하여 인간의 생활속으로 뛰어들었다. 인간으로 변신한 너구리들이 살아남기 위해 여러가지 자구책도 만들어내면서..  너구리와는 달리 두꺼비들은 인간과 부딪히지 않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장대높이 뛰기를 배워 그 커다란 트럭을 피할 수 있는 그들만의 자구책을 만들어냈으니 말이다. " 인간들은 우리들이 못생겼기 때문에 미워한다더구나. 하지만 내 판단으로는 그게 전부가 아닌 것 같아. 인간들은 아주 복잡한 종족이야. 그래서 인간들에 대해 더 많은 연구를 해야 한단다"  못생겼기 때문에 서러웠던 두꺼비들과 하나의 토템이즘으로 자리잡아 어찌되었든 신격화 되었던 너구리들.. 하지만 그들이 안고 있는 현실의 문제는 똑같이 너무나 긴박했다. 

원래 사탕수수 농장에서 골치 아픈 딱정벌레를 없앨 목적으로 남미에서 들여왔다는 사탕수수두꺼비는 우리의 황소개구리처럼 천적이 없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고 한다. 그러니 애물단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현실일 뿐이다. 이 책속에서 만날 수 있는 두꺼비 림피의 감정표현을 보면 진심으로 느껴지는 그 무언가가 있다. 가족간의 사랑과 믿음에 대한 배려도 읽을 수가 있다.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놔둔다면 문제가 발생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들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필요성에 의해 그것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놓기 시작하면서 문제는 발생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자리를 떠난 그들이 변해진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그런 점들이 인간에게는 해를 끼친다는 말로 바뀌는 것이리라. 자신의 가족과 종족을 위하여 그 많은 어려움을 헤치고 작지만 현명한 해답을 찾아 돌아오는 림피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책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다고 한다. 애니메이션이 주는 감동과 이 책속에서 느낄 수 있는 림피의 아름다움이 만난다면 멋진 작품이 탄생할 것 같다.  인간의 이기심앞에 납작 떡이 되어버리는 것이 어디 두꺼비뿐일까?  가끔 도로를 달리다보면 동물이 가는 길을 따로 만들어놓은 것을 볼 수가 있다. 인간도 아닌 동물들이 과연 그길을 잘 찾아낼 수 있을지 그것조차도 나는 의심스러웠었다. 멋진 작품이 애니메이션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그 날이 기다려진다. 림피 화이팅 *^^*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