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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선인장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사사키 아츠코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아무래도 에쿠니 가오리하면 《냉정과 열정사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수채화같았던 그 사랑이야기를 얼마나 가슴 졸이며 읽었었는지.. 읽고 난 책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지 않는다는 나만의 규칙을 깨면서까지 그 소설에 매료되어서 결국 영화까지 보고야 말았지만 두번의 선택 모두 나에게는 참으로 멋지게 다가왔었다. 꿈같지만 결코 꿈같지 않은 이야기로 느껴지던 그 매력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이 책 《호텔 선인장》을 선택하면서도 에쿠니 가오리라는 이름 하나때문에 망설이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계절은 아름답게 돌아오고, 재미있고 즐거운 날들은 조금 슬프게 지나간다... 는 한줄의 글귀가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호텔 선인장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아하! 한다. 이름이 '호텔 선인장'인 낡은 아파트안에서 생겨나는 이야기들을 나에게 들려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바로 알아버리기 때문이다. 그 낡은 아파트의 3층 구석방에는 '모자'가 살고, 2층 구석방에는 '오이'가 살며, 1층 구석방에는 숫자'2'가 산다. 그들이 처음부터 그렇게 친구가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책속의 세 주인공들 역시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웃과 친해진다는 그 절차를 무리없이 밟게 된다. 윗층에서 들려오는 소음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1층의 숫자 '2'는 결국 '오이'가 살고 있는 2층의 구석방을 찾아가 문을 두드리게 된다. 그 소음때문에 자신을 찾아왔다는 것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오이'를 이끌고 숫자 '2'는 다시 3층의 '모자'를 찾아 나선다. 그 이유는 딱 한가지다. 아래층의 내가 이렇게 시끄러우니 바로 윗층의 너 역시도 시끄럽지 않느냐는 동의를 얻어내기 위함이다. 하지만 3층의 '모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상관없다고.. 그렇게해서 아래윗층의 세사람은 친구가 된다. 서로 다른 성격과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던 세사람이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와 사랑을 나누어가게 되는 그 시간속에는 즐겁고 재미있는 이야기도 있지만 살풋 나의 마음속에 비릿하게 전해져오는 서글픔도 있었다. 어찌 삶이 즐겁기만 하겠는가!
혼자일 때는 몰랐던 많은 감정들이 물결처럼 밀려들어올 때 그들이 대처하는 방식 또한 눈물겹다. 생각의 차이가 있고 직업조차도 서로 달랐던 이들이 서로에게 조금씩 마음을 열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과정 또한 정한 이치대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그 속에서 볼 수 있는 건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과도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분히 평범하게 보여지는 일상속에서 다분히 평범하게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이 모여 하나의 이야기가 된다. 책을 읽다보면 내가 동화를 읽고 있는 것인지, 우화를 읽고 있는것인지, 성인용 소설을 읽고 있는것인지 조금 난해할 때가 있다. 경마장에 가던 날, 소심한 성격의 숫자 '2'만이 겨우 차비를 남겼을 뿐인채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게 된다. 운동을 좋아하던 '오이'는 아파트까지 천천히 달려서 돌아오게 되지만, 차비가 없어 난처해진 '모자'를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던 숫자 '2'가 할 수 없이 '모자'를 쓰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보면서 한참을 웃었다. 그렇게해서 한사람 몫의 요금만으로 둘이 함께 돌아올 수 있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긴 하였지만 나는 뭔가 한방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우습게도 나는 이때부터 정신을 바짝 차려가며 책을 읽었던 것 같다.
의인화 소설같기도 하면서 또 그렇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니 참 묘하다. 세사람의 일상속에 숨겨져 있는 아주 솔직한 우리의 모습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숫자 '2'의 생일날 '2'가 태어나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 장면은 묘하게도 한참을 머물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2의 아버지는 숫자 '14'이며, 어머니는 숫자 '7'이었습니다. 두사람이 나눗셈을 하였기에 2가 태어난 것입니다. 덧셈을 했다면 21이, 곱셈을 했다면 98이 태어났을 테죠. 그렇지만 2의 부모님은 나눗셈이 좋았던 모양인지, 2의 누나도 형도, 두 여동생도 모두 '2'입니다... 덧셈도, 곱셈도 아닌 나눗셈이라는 말에 나는 왠지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왜 그랬는지는 묻지 말자. 왠지 저 짧은 문장속에 숨겨진 무언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을 뿐이니... 우리가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그 무언가가 저 짧은 문장속에 살아 있는 것처럼 느껴졌을 뿐이니... 세사람이 모두같이 '오이'의 고향으로 여행을 떠나던 날의 설레임은 우리의 삶속에서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일탈처럼 보여지기도 했다. 길들여진 것에 대한 소홀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늘 곁에 있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내 생활의 배경쯤으로 밖에는 여겨지지 않는 길들여진 것들에 대한 의미... 그들의 여행길을 따라나섰던 나에게는 그 의미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주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도시생활이 좋아 도시로 떠났던 '오이'에게는 그 고향에서의 시간들이 특별할 게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돌아온다. 일탈은 그저 일탈일 뿐이다.
낡은 아파트를 철거해야 한다는 말에 세사람의 의견은 엇갈리지만 그러면서도 제각각 살아가야 할 곳을 찾아 하나씩 준비를 해 나간다. 호텔 선인장을 떠나야 하는 순간이 다가온다. 그들은 이제 다시 각자의 길을 가야한다는 것이 당혹스러웠고, 이미 서로가 서로를 만나고 알게 되어버린 그 순간에는 그들에게 서로가 없는 장소와 있는 장소의 의미가 어쩔 수 없이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만남이 있었으니 헤어짐이 있다는 규칙은 철저하다. 그 아쉬움에 '어쩐지 수상쩍어서' 혹은 '위험스러워서' 다가가지 않겠다고 마음 먹고 있는 부근의 술집으로 몰려가던 날 '2'가 말했었다. "희한한 일이야.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방해가 되지 않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아무도 방해가 되지 않는 우리의 일상... 참으로 서글픈 느낌을 자아내는 단 한줄의 글귀앞에서 나는 잠시 호흡을 멈춰야 했다. 무심함일게다. 처절하리만치 개인적인 우리의 삶을 저토록 힘들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숫자 '2'와 '오이'와 '모자'.. 이들 세사람이 안고 있는 특성속에는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사람이 만나고 헤어지는 이치와 이웃과 이웃이 함께 맺어져 살아가는 삶의 고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멀리 떠나왔어도 늘 마음속에 깊은 사랑으로 자리하는 가족에 대한 의미등... 특별하지 않은 문체로 아주 특별하게 그려주고 있는 에쿠니 가오리만의 매력이 듬뿍 묻어나는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호텔 선인장', 이것이 이 아파트의 이름이었습니다. 호텔이 아니라 아파트인데도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호텔 선인장에는 일찍이, '모자'와 '오이'와 숫자 '2'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당에는 검은 고양이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 그리운 아파트는 이제 어디에도 없습니다... 한편의 전설이 되어버린 그들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전설처럼 그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와 지금의 우리들에게 전해져 내려왔듯이 우리의 이야기 또한 그렇게 전설처럼 기억되어지리라... 그들 세사람의 이야기처럼. 평범했지만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처럼.
책을 읽는 동안 볼 수 있었던 몇 편의 삽화가 나에게는 참으로 멋진 상상의 날개를 선물로 준 것 같다. 사실적인 묘사가 이 책속의 문체와 어쩌면 그리도 찰떡 궁합인지.. 그림조차도 이 책의 이야기처럼 그리 특별할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 그림이 안고 있는 느낌들이 너무 포근하고 좋았다. 어디로든 시선만 돌리면 언제든 마주칠 수 있을 것 같은 그림들은 이 책속의 주인공들과 좀 더 친근해질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 준 것 같기도 하고... 우리 가슴속에, 가족 이상으로 소중한 이웃사촌과 친구들이 존재한다는 것이, 어수선한 세상을 살아가는 힘의 원동력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역자 후기처럼 나 역시도 이 책을 읽으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마음을 나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가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아이비생각
책속의 삽화하나.. 사사키아츠코 작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