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이웃종교로 읽다
오강남 지음 / 현암사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언제부터 읽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책이었다. 아주 오랜동안을 책꽂이에 꽂힌 채 그 앞을 수도없이 왔다갔다 하던 나를 바라보았을 저 책에게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든다. 우선은 불교라는 종교에 대해 알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하지만 이웃종교로 읽는다는 그 다음말에 왠지 마음이 동했던 처음의 느낌을 잊을 수가 없다. 종교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 가장 먼저 나는 왜?라는 질문부터 하게 된다. 그 끝없는 물음표들을 어떻게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지? 도대체 왜 그래야만 하는거지? 하며 끝도 없이 나를 힘겹게 했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너무도 많다싶을 정도로 그야말로 난무하는 교회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로 아니 천당으로 가기 위한 길이 너무 많은 것이다. 하기사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지옥이라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교회만으로는 천당가기 너무 힘들지도 모르겠다. 어렸을 적 교회 한번 안가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 역시도 그랬다. 성가대 생활도 오래 했을 뿐 아니라 학생시절에는 학생부 임원을 할 정도로 정말 열심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왜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을까? 

종교라는 의미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그러면서도 왜 저렇게 형식적이어야 하는지, 왜 저토록 문자주의 혹은 율법주의라는 것에 얽매여야 하는 것인지, 도무지 보이지 않는 마음들이 안타깝기만 했다. 마음도 없이 그저 '믿음'이라는 글자 앞에서 벌벌 기다시피하는 그들의 모습이 나는 싫었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인정한 것만이 옳다고 떠들어대는 그들이 모습이 나는 싫었다. 종교라는 것은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져 종내는 나의 마음을 편하게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너무도 많이 했었다. 또하나의 구속으로 존재하는 종교를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던 거다. 또하나의 구속이라는 말이 잘못된 것일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구속이란 의미로밖에는 보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종교, 과연 그것이 무엇이건데 이토록 나를 힘겹게 하는가!

큰 맘 먹고 책장을 펼쳤다.  모태신앙이었던 기독교인이 왜 불교에 관한 책을 써야 했는지, 왜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해야 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기독교와 불교에 관한 공부를 하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우리가 생각해야 할 종교관은 이런 모습을 해야 한다는 작가의 노력과 자부심이 가득하여 나도 함께 묻어가기에 너무 좋았다. 불교의 역사적인 배경이나 동양의 불교, 서양의 불교 그리고 각 나라마다의 불교에 관하여 들려주시던 말들이 너무 편하게 다가왔다. 불교를 아는 것은 더 이상 불교 신자들만의 의무가 아니라는 말, 하나의 종교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종교와의 비교를 통한 분석과 이해가 필수라는 말('하나의 종교를 아는 사람은 아무 종교도 모른다!' ), 많은 불교 서적이 출간되고 있지만 불교 이론을 설명하는 책의 대부분이 주로 불교 지도자들이 쓰고 있어 어려운 불교 용어와 사상을 쉽게 풀지 않고 그대로 쓰는 것이 대부분이라 일반적인 (바로 나와같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말, 특히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넘나들면서 예로 들어주는 여러가지 해설은 평소 내가 했던 의문점에 대한 마침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내가 경험하고 생각했었던 것들이 모두 이 안에 들어있었다. 어느 한편에 치우치지 않고 두가지를 서로 어울려가며 같은 맥락으로써 읽을 줄 알았던 작가의 그 커다란 마음씀씀이에 나는 정말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는데 하물며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커다란 일을 함에 있어서 외골수적인 생각을 하면 안된다는 가르침앞에서는 정말 숙연해지기도 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오래 된 연못
개구리 뛰어든다
물소리 퐁당
- 일본의 가장 유명한 하이쿠 시인 바쇼의 작품(269쪽)

이름에 무엇이 있는가?
우리가 장미라고 하는 그것은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향기는 마찬가지
- 셰익스피어

저 두가지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게 되는 점은 아마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게는 아무 꾸밈없는 그 처음의 세계라는 느낌으로 다가왔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속에서 모든 것을 찾으려고 하는 마음, 우리가 한번 건너뛴 시선으로 바라볼 때 그곳의 진리는 이미 사라져버리고 없다는 느낌이었다. 어느샌가 내 손에는 볼펜이 들려져 있다. 그리고 아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과 같은 마음이 되어 있었다. 공감하며 읽어갈 수 있는 그 시간이 너무 편하고 좋았던 까닭이다. 그야말로 글자만 읽는 책읽기가 아니라 공감대를 형성해가며 이해할 수 있는 폭을 넓혀가고 싶은 욕심이었을 게다. 오로지 불교라는 종교의 배경과 특징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한 종교인이 되기 위해서 혹은 진정한 종교를 받아들이는 마음자세를 배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장 많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우리도 정말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염원했던 부분은 바로 동야의 불교가 서양으로 넘어가서 자리를 잡게 되는 대목이었던 것 같다. 정말 너무도 욕심이 나는 대목이었다. 우리는 왜 저렇게 될 수 없는 것일까?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이렇다.

하나, 기복적이거나 의례 중심에서 참선 혹은 명상 중심으로
둘, 스님 중심에서 재가 불자 중심으로
셋, 남녀 차별에서 남녀 평등으로
넷, 수직적  권위주의에서 수평적 대등관계로 (지도자와 불자의 위계적 차별도 적다)
다섯,가족 중심에서 개인 중심으로(각자 개인의 종교를 인정해야 한다)
여섯, 종파주의에서 연합주의로
일곱, 종교적 고립에서 종교간 대화로
여덟, 사회 고립에서 사회 참여로

책의 307쪽에 나와있는 이 여덟가지는 서양 불교의 특징과 동향에 관한 이야기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단순히 서양불교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종교적인 입장을 대변하여 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하고..  베트남의 유명한 틱낫한 스님께서 수행중에 옆에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나만 이렇게 수행을 해야 하는가 하여 참여불교를 말씀하셨다는 말을 보면서 참으로 놀라웠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금 우리의 세상속을 떠돌고 있는 모든 종교는 변해야 하며 또한 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일전에 TV를 통해 보여지던 광고가 생각난다. 성탄절에 스님들이 교회를 찾아가 함께 기뻐하고 석탄일에 모든 사람들이 함께 기뻐해주던 그 광고... 얼마나 멋진 일인가 말이다.

개인적으로 산을 너무 좋아하다보니 산에 오를 때마다 수학공식처럼 따라다니는 산사에 머무를 때가 많았다. 잿빛 가사를 걸치고 하얀 고무신을 신은 스님들의 그 조용한 움직임, 지붕 한 귀퉁이에 매달려 바람이 불 때마다 아주 맑은 소리로 내게 다가오던 풍경의 속삭임이 너무 좋았다. 종교적인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 산사가 안고 있던 느낌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어느날 문득 불교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싶다는 생각에 서점을 찾았지만 그 딱딱함으로 다가오던 문자들이 내게는 너무 생소했다. 몇권을 책을 들춰보고 읽어보고 하기를 반복하다가 끝내는 빈손으로 나오기 일쑤였다. 왜지? 이래가지고 대중적인 종교라고 할 수가 있겠나?  참 바보같은 질문이었겠지만 왠지 내 가슴 한켠에 남아 나를 느끼고 있는 산사의 이미지와 불교라는 종교를 같이 묶어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 어느 틈엔가 대웅전의 불상앞에서 절을 올리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실 어떻게 절을 해야하는지도 몰랐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그저 옆의 아주머니가 하시는 모양대로 따라했을 뿐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 한쪽에 바람이라도 들어온 양 그렇게 시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인연이었을까? 그 뒤로도 나는 산사를 자주 찾는다. 하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불교인이라는 말을 감히 하지 못한다. 종교적인 면에서보다는 모든 형식을 떠나서 그저 나를 한번 더 돌이켜 생각할 수 있는 그 시간을 허락해주는 공간이 너무 좋았고 조용하게 주변을 위해 마음을 모아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니 그저 좋을 뿐이다. 이런 내가 어찌 종교의 유무를 따질 수 있겠는가 말이다. 나에게는 정말 크나큰 도움이 되었던 책이었다. 메모를 시작하며 읽었는데 어느새 몇장의 메모가 생겼다. 책속에는 작가가 추천해주기도 했고 참고했다던 책들이 참 많다. 서점에 갈 기회가 있다면 메모를 들고 가 한번 더 찾아볼 요량이다. 그러고보니 어느샌가 인터넷 서점에 익숙해져버린 내 모습이 보인다. 발품파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종교인이라면 꼭 한번은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아니 굳이 종교를 갖지 않아도 좋다. 읽어본다면 참으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베이징 컨스피러시 -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겨냥한 대 테러 전쟁
에이드리언 다게 지음, 정탄 옮김 / 끌림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책을 읽으면서 불현듯 일전의 신문기사가 생각났다. 우리나라의 종교단체에서 봉사라는 목적으로 아랍권을 찾았다가 납치되어던 사건말이다. 꽤나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 위하여 협상을 시도했다던 기사.. 그 기사로 인하여 세계각국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던... 테러라는 말 자체를 실감하기에 나는 너무 멀리 있는 것 같다. 미국에서 테러와의 전쟁을 부르짖는 것과 또한 느닷없이 건물속에 쳐박힌 비행기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9.11테러에 관한 것들도 어떻게 저럴수가 있는지 그저 놀라울 뿐. 가만히 생각해보면 테러라는 것 또한 하나의 종교전쟁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책속에서 만나지는 테러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종교가 등장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일국의 그것도 세계의 중심에 있다고 하는 큰 나라의 대통령조차도 자신의 종교관에서 벗어나지 못한채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보면 나는 또다시 생각하게 된다. 도대체 무조건적인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컨스피러시conspiracy... 찾아보면 공모共謨라고 나온다. 혼자만의 생각이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뜻을 모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책제목 자체가 하나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피식 웃어보기도 한다. 베이징에서 올림픽이 열린다는 상황, 그리고 그 베이징을 향한 여러 사람의 공동모의가 이 책의 가장 큰 줄기인 까닭이다. 가장 냉철하면서도 비열한 그 공모의 밑바닥엔 저마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저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익이 생기는 일이라면 적과의 동침조차도 마다하지 않는 실리주의 원칙일까? 실상적으로 베이징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그 베이징을 향한 시선들을 따라가면서 이야기는 전개되어지고 있다.  베이징은 사실상 표적물로써의 이미지일 뿐이지 상황전개속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좀 더 알기쉽게 표현하자면 알라신을 내세운 이슬람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내세운 기독교가 맞붙고 있는 것이다. 제각각 저들의 신이 더 잘났다고 떠들어대고 있는것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다. 거기에 한가닥 더 붙여보자면 소수민족 국가들의 권리주장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덩치 큰 나라들에게 비이커안의 개구리처럼 서서히 달궈지는 소수민족 국가들이 이제는 그 뜨거워지는 것을 참을 수 없다고 튀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거다.

책속의 설정이 가슴 떨리게 두려운 까닭은 생화학테러라는 점일 것이다. 바이러스라는 무시무시한 무기가 우리가 숨쉬는 공기속에서 우리를 공격한다고 생각해보라.  지은이는 자신이 테러리스트라고 가정하고 이 소설을 썼다고 했지만 첩보 부대에서 근무하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했었던 지은이의 이력을 살펴본다면 그리 과장된 설정만은 아닌 것 같아 내심 놀랍기도 했다.  인물들이야 허구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흘러가는 전개과정은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듯이 사실적으로 다가온다. "정말 지독한 힘이예요. 종교말입니다. 논리보다 믿음에 바탕을 둔다는 것. 그게 바로 종교의 문제죠." "우리는 늘 자신보다 더 나은 존재를 믿고 싶어하죠. 그게 바로 인간인가 봐요. 그리스와 로마를 봐요. 전쟁을 대변하는 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폴로,헤르메스,제우스."(285쪽)... 지은이가 현재 호주 국립대학 아랍 이슬람 연구원으로 재직중이라는 이력을 보고나서야 테러전의 밑바탕에 종교적의식이 깔려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아니 굳이 그런 지은이의 이력을 들이대지 않는다해도 이미 오래전부터 종교를 앞세운 전쟁은 끝도 없는 게 사실일게다. 신의 이름을 앞세우며 서로가 서로를 향해 전쟁을 선포한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다.  이세상 모두가 저만이 옳타고 외쳐대고 있는 것과 다름없음이다. 지은이의 말처럼 세상이 잔인한 광기로 울부짖고 있다는 말에 조금은 공감한다.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당신은 결코 이 책을 손에서 놓을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책의 뒷표지에 써 있었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도 나는 책의 초입부에서부터 이 책을 손에서 놓고 싶었다.  이제 막 소설쓰기를 배우는 학생이 원리원칙대로 배열해가며 글을 쓰고 있는 것 같다는 게 나의 첫느낌이었던 까닭이다. 그만큼 더디다는 말도 되겠지만 사실 넘겨지지 않는 책장과의 싸움은 힘겨웠다. 4장의 Chapter로 이어지고 있었지만 첫장 최종해결로 가는 길은 너무 길었지 않았나 싶다. 테러전의 긴박한 숨결을 느끼고 싶은 사람이었다면 테러전으로 가기전에 이미 지쳐 쓰러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테러전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한 발판이었다고 변명할 수 있을까?  지루하기까지 한 종교적 심리전이었다. 1차공격을 하고나서 그들이 외쳐대던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 나, 그에 대응하며 끝도 없이 요한계시록을 들먹이며 아마겟돈을 외쳐대던 상대편의 의식에는 정말 짜증스럽기까지 했다. 한편의 시나리오를 미리 읽어버린 듯한 이 느낌을 지을수가 없다. 시나리오를 읽으며 떠오르는 장면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이미 우리의 기억속에 산재되어져 있는 뻔한 장면들이란 생각이 들어 나의 기대감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적으로 다가오던 테러전의 실체에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그런 세상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일게다. 테러... 단지 언어적인 의미로써 내게 보여지던 테러라는 말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해 준 책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아이비생각


"마지막으로, 그들의 종교만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 원리주의자들에게 한번 곰곰이 생각해보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대체 어떤 신이 10억의 기독교인들과 10억의 이슬람교도들, 40억이 넘는 다른 종교와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창조해놓고 그중 한 그룹에게만 지도를 준단 말입니까. 대체 어떤 신이 자신의 피조물 중에서 극히 일부만 구하고 나머지는 유황 지옥속에서 불타게 한단 말입니까. 대체 어떤 신이 자신의 위대함을 무고한 여성들과 아이들을 무수히 죽이는 것으로 보여준단 말입니까. 그런 신이라면 저는 숭배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신들의 신이 잔혹한 폭력을 승인했다고 믿는 사람들은 원전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입니다. 다양한 언어로 쓰여 있는 원전을요."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기에 다른 문화와 신념을 가진 분들에게 도와달라고 호소할 것입니다. 타협은 약한 것이 아니라 지혜로운 것입니다." (-4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이아의 복수 - 가이아 이론의 창시자가 경고하는 인류 최악의 위기와 그 처방전
제임스 러브록 지음, 이한음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처음 가이아라는 이름을 보았을 때 거짓말처럼 나는 지구를 생각했었다. 신화속의 여인 가이아가 누구인가? 바로 대지의 여신이다. 우리모두를 품어 주었던 대지의 여신.. 이 책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이아 이론이란 것이 지구 전체가 동물이 체온과 화학적 균형을 조절하는 것처럼 내부 환경을 조절하는 하나의 생물로서의 기능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쉽게 말한다면 살아가기 위해 자기 스스로를 조절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그렇게 해왔던 존재라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생명이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 치유해가며 살아가는 하나의 존재.. 그런데 그 가이아가 지금 병들어 신음하고 있다고 한다. 늙고 병들어서 이제는 우리가 먼저 가이아를 생각해야 할 때가 왔다고 저자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더이상은 품을 수 없을정도로 많아진 인구수와 그 인구들이 먹고 살기 위해 혹은 자신의 편안한 일상을 위해  저지르는 모든 일들이 가이아를 힘들게 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처럼 두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파괴능력과 문명건설 능력을 동시에 지니고 있으며 에너지를 오용하고 인구 과잉 상태로 만든것이 바로 인간이라고...  우리가 생활하는 일상속에서의 모든 움직임이 이산화탄소를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올시다라는 대답밖에는 할 수가 없으니 지구라는 이름을 가진 가이아에게 그저 미안할 뿐이다.

매스컴이나 언론을 통해 흔히 들어왔던 지구온난화라든가 환경문제 따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가이아를 살아있는 존재로써 인식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은 놀라웠다.  삶의 풍요로움을 위하여 '자연'이라고 불리워지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시골'을 잃어버려서는 안되는거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음이다. 사실 나는 이 책속에 나와있는 열역학이니 양의 되먹임이니 음의 되먹임이니 하는 말들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어려운 말들은 차치하고라도 내게 들려왔던 것들은 이랬다. 가이아가 복수를 하기 이전에 기후변화에 맞설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하며 재생에너지를 얻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는 그런 것들.. 그리고 더이상은 '자연'을 파괴하여 지구에게 이중으로 타격을 가해서는 안되는거라는... 그많은 재생에너지들을 논하면서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핵에너지를 선택했을 때의 장점에 대해 끝까지 열변을 토한다. 유기농이니 풍력에너지니 하는 말들은 겉만 번지르르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 시설들을 마련하기 위해 파괴되어지는 자연을 염려하면서 말이다. 체르노빌 사태와 같은 상황을 예로 들어주면서도 핵에 관한 우리의 선입견이나 편견이 조속히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저 많은 인구들을 모두 먹여 살릴 수 있는 유기농식품이 아니라면 유기농식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더 많은 농경지를 만드는 것도 중단해야하며 지구 온난화를 막아주는 숲을 파괴하는 행위를 중단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도 모든 일을 해낼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는 휴대폰과 컴퓨터에게 후한 점수를 준 저자의 변론에는 그렇겠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움직여야만 했다면 그것으로 인한 오염도가 훨씬 더 심해졌을거라는 말에 살풋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의 생활 자체가 지구를 병들게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자기 조절 능력에 의해 한번쯤은 뒤집어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게 될 시기가 가까워오고 있다는 말에도 나는 공감한다. 하지만 저자는 그래도 인간이라는 종은 끝까지 살아남을 거라는 말은 빼놓지 않았다. 그만큼 강하다는 말일까? 아니 어쩌면 그토록이나 이기적인 존재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억지일까?   언젠가 너무도 놀라운 마음으로 보았던《마이크로 코스모스》라는 다큐영화에서처럼 인간도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한갖 미물임에 불과할텐데...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일전에 보았던 《투모로우》라는 영화가 생각났다. 기후학자인 어느 박사가 지구의 기온 하락에 관한 연구발표를 하게 되고 급격한 지구온난화로 인하여 빙하가 녹아 바닷물이 차가워지면서 결국 해류의 흐름이 변하게 된다는.. 지구 전체가 서서히 빙하로 뒤덮이는 재앙을 보여주었던 영화.. 도시 전체를 거대한 얼음덩어리로 만들어가며 밀려들어오던 바닷물의 공포를 보면서 어쩌면 정말 저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 영화를 보는 내내 정말 섬뜩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었다. 이 책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도 지금 우리 모두가 가이아의  늙고 병듬을 믿어야만 한다고, 그래야만 살길이 보일 거라고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영화속에서처럼 이 책의 저자도 해수면에 맞닿아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재앙이 닥쳐올지도 모른다고 예견한다. 언제였는지 일본이 가라앉고 있다는 뉴스를 보았던 기억도 난다. 눈 앞에 시련이 닥쳐와야만 그것을 알 수 있다면 그때는 이미 늦어버린 거라는 저자의 말이 왠지 무서워지기도 한다. 더 무서운 것은 우리 세대가 아니라 다음 세대가 그런 재앙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도 전문적인 해설을 따라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1 장에서 늙고 병든 지구의 현재상태를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하여 가이아가 무엇을 말하는 것이지, 그리고 그동안 가이아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가이아의 생활사라는 구분으로 이해를 도와준 것에 대해 감사한다. 실제적으로 나에게 다가오지 않는 의미들을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저자가 예로 들어주었던 21세기에 관한 예측이라거나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원에 관한 이야기들은 환경론이나 지구라는 의미에 대해 언어적인 의미로밖에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나에게조차 왠지 조바심을 느끼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앞으로 동식물과 많은 미생물들이 더이상은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가이아는 뜨거워질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철저한 파국이 찾아올 것이라는 작자의 의도를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래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어쩌면 저 끔찍한 책의 제목처럼 가이아의 복수가 시작되어진건 아닐까?  더이상은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세계속의 이슈들이 모두 기후조건에서부터 왔다는 것을 부정할수는 없을 것 같다.  지구의 여기저기를 휩쓸고 다니는 커다란 홍수의 물결을 봐도 그렇고, 폭설에 의한 재앙소식도 우리를 두렵게하기는 마찬가지다. 지진이나 토네이도와 같은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의 처참한 모습들을 매스미디어를 통해 볼 때 전해져오던 그 전율들은 그저 그냥 생겨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속에서 은근히 비추어내던 지구의 예견된 앞날이 바로 저런 모습은 아닐런지... 무언가로 한대 맞은듯한 기분이다. /아이비생각

가이아도 그렇다. 자기 삶의 처음 오랜 세월 동안 세균만 있었고, 중년 막바지에야 최초의 다양한 동물상과 후생동물이 출현했다. 80년대에 들어서야 행성에 최초의 지적동물이 등장했다. 우리가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간에, 가이아가 아직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을 때 우주에서 행성 전체의 모습을 보게 함으로써 우리는 가이아의 노년을 흡족하게 한 것이 분명하다. 불행히도 우리는 정신분열증 경향을 보이는 종이다. 그렇기에 파괴적인 성향이 점점 늘어나는 십대 무리와 한 집을 쓰는 할머니처럼 가이아는 점점 화가 나고 있으며, 그들의 행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들을 내쫓을 것이다. (83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기억속에 있는 계절은 사계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저마다의 독특한 색으로 우리를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그의 기억속에는 또하나의 계절이 있다. 천둥의 계절, 신의 계절이다. 겨울과 봄 사이에 찾아오는 짧은 계절을 신계神季, 혹은 뇌계雷季라 불러 봄과 겨울과는 확연하게 구분지었다는 온穩의 사람들... 이름 그대로 천둥계절인 그 때가 오면 온의 세상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온다. 그 짧은 계절속에서는 그동안 어긋났던 일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둥계절동안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관계없이 그들은 그 천둥계절에 모든 것들이 정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천둥계절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잉태되어져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하계라고.. 그렇다면 그들은 신神일까? 아니 내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신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다. 단지 살아가는 모습이 약간 다를 뿐...

쓰네카와 고타로의 작품 《야시》가 출간되었을 때 알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했다. 그 흔한 편견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다. 호러물 혹은 환상소설이라 불리워졌던 책들이 나에게 안겨 준 느낌이 그리 산뜻하지만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허무맹랑한 환상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었고,가끔씩 이런 설정은 너무 찜찜하다 그냥 넘어가고 싶다고 생각되어지는 대목들이 내게는 마치도 기어가는 벌레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 《천둥계절》은 판타지물임에도 불구하고 산뜻하게 다가왔다.  책속의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고 한걸음씩 걸을 때마다 '참.. 맑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장지를 뜯는 순간부터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읽게 된 책이다. 온의 세상에서 살게 된 하계의 소년 겐야를 따라가며 이야기는 시작되어지지만 어쩌면 그 소년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구분되어져 있다.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나와 그 현실의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나를 찾기 위해 가상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내가 만나는 지점에서부터는 그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소설의 구성을 살펴보면서 나는 각 나라의 신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북유럽신화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인간이 사는 하계와 신들이 사는 천상, 그 사이 중간세계.. 소설속의 온은 어쩌면 바로 그 중간쯤인 세상일 것이다. 중간중간에 느껴졌던 일본의 무속신앙에 대한 것들은 차라리 정겹게 다가왔다. 어느 나라든 그나라만의 무속신앙은 존재한다.  특히나 아주 작은 것들에게까지도 그들만의 의미를 갖게해주는 일본의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은 볼  때마다 참으로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과 자연의 끈을 이어주는 것이 무속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그런 것들이 내게는 가끔씩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온穩은 어쩌면 우리의 정신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세계와 육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의식은 바로 영혼일게다. 정신이 추구하는 바는 끝도 없이 넓고 깊지만 육신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모든 것들이 제한적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아마도 환상적인 이미지에 매달려 사는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삶을 꿈꾸고, 내가 찾아 헤매이던 그 꿈과 이상이 모두 이루어지는 세상.. 아무런 근심과 고통없는 평온을 꿈꾸는 그곳.. 바로 그곳이 이 소설속의 온처럼 느껴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우리가 살면서 힘들지 않을때가 있을까? 오로지 평온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순간들이 정말 행복하게 느껴질까?  삶의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기에 신의 존재도 필요할지 모른다. 힘겨울 때, 넘어져서 울고 싶을 때 생각지도 않게 신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종교관을 떠나서이다. 정말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는 새 간절한 마음으로 신을 원할때가 있다. 감히 말하지만 우리의 삶이 평탄하고 원만할 때 신을 찾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그만큼 나약하고 그만큼 미미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소년 겐야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 불행의 씨앗.. 그것은 진정 불행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저 왔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분기점이었을 것이다. 동기가 되어주는 것은 많다. 소년 겐야에게로 바람의 새가 날아들었던 것도 자신이 알 수는 없었으나 그가 절실한 마음으로 원했던 까닭이리라.

소설속의 바람와이와이는 정령이다. 어떤 책에선가 본 것 같다. 아주 맑고 흔들림없는 영혼의 소유자에게 정령이 찾아온다고.. 소년 겐야에게 찾아와 자리잡은 바람의 새가 말했었다. 이 아이의 샘물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순수純粹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신화적인 의미로 볼 때 신과 인간의 세상을 넘나들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존재.. 그 정령이 새의 모습으로 소년에게 찾아와 잃어버린 소년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정길에 동행해주지만, 바람의 새 역시도 그 소년을 통하여 해야 할 숙제가 있는 것을 보면 신은 절대로 자신의 힘을 거저 주지 않는 모양이다.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만난 후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 온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 어쩌면 그 천둥계절이 가리키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일상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내야 할 순간들이 머물렀던 시공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속에 등장하는 여럿의 화자들은 서로 씨줄 날줄처럼 엮여진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면 서로의 기억속을 더듬어보면 된다. 그래서 나는 잠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만(사실 뒷부분에서 약간은 뒤엉킨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탓에 나는 화자들의 기억속을 여러번 들랑거려야만 했었다)  소년 겐야가 살아내야 했을 그 천둥계절속의 시간들은 내게 참으로 신선한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소설속에서 무시무시한 느낌으로 등장했던 도바 무네키의 전설.. 그 도바 무네키가 안고 있었던 것은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힘겨운 장애물일수도 있고, 우리가 내려놓지 못한 채 짊어지고 가야할 등짐일수도 있을 것이다. 도바 무네키는 자신이 점찍은 사람에게는 기어코 찾아가 절망을 안겨주고 있지만 그에 대응하는 바람와이와이가 내게 있어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삶이 나를 힘들게 하고, 길을 잃어 지쳐 있을 때 절망을 알게 해주는 귀신조 도바 무네키가 나에게도  찾아오겠지.. 그런 때 나도 바람와이와이를 외쳐 불러보고 싶다. 나에게 내려와 줘... 그러면 '당신이 필요한 힘을 나누어주겠습니다' 라고 말해주는 그런 바람의 새가 내게도 날아와 줄까?  그런데 이쯤에서 나는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내가 그만큼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는가?  묻고 있는 지금 느닷없이 가슴이 뭉클해지는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인과 서커스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주귀고리 소녀》에 반해서 《버진 블루》를 읽었었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여자의 글재주에 푹 빠져들었었다. 한참을 기다린 것 같았다. 다음 작품이 기대되었던 것은 전작들속에서 느낄 수 있었던 황홀한 것들을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우연하게 《진주귀고리 소녀》를 영화로 보고 나서 어찌나 실망을 했던지... 항상 그렇다. 글이 주는 그 묘한 매력을 영화속에서 온전하게 찾는다는 게 무리라는 걸... 이 책이 나왔다는 소개글을 보았으면서도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트레이시 슈발리에라는 작가의 작품이 주는 유혹감을 좀 더 느껴보고 싶어서였는지도 몰랐다. 책을 손에 쥐고 내가 느꼈던 설레임은 정말 아무도 모를 것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면서 내가 그 설레임을 점점 잊어가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전작들에 비해 긴장감도 덜하고 녹아있는 감동 또한 그리 많지 않았다. 지식과 감동을 함께 전해 줄 수 있는 작가라는 말에 적극 동의를 표하던 나의 기대에 못미치는 작품이었다고나 할까?

1792년 3월 런던으로 이사오는 토머스 켈러웨이 가족의 이야기는 시작되어진다. 그의 아내 앤 켈러웨이와 딸 메이지, 그리고 아들 젬... 이렇게 네명의 가족이 엮어 갈 런던이야기.  그 이야기속에는 내가 읽어보았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인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분명하게 선이 그어지는 주제의식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거다. 그 역사적인 배경속에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번에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았다는 말도 되겠지만 옮긴이의 말처럼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삶을 조명해 보고 싶었다면 그것 역시 그다지 밝게 혹은 분명하게 조명처리가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차라리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글을 통해 당시의 사회적인 풍자를 읽어냈다고 하는 편이 더 옳은 것 같다.  내가 읽어보았던 작품들에 비해 촘촘하게 느껴지는 그런 긴장감(손에서 책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은 그런...)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는 말이다. 책장을 덮고 다시한번 제목에 눈을 돌려 보았다. 시인이라면 윌리엄 블레이크를 말할 것이고 서커스라면 필립 애스틀리를 말하는 걸거라는 생각을 한다. 책속에서 느껴지는 두사람의 정신세계는 어딘가 모르게 같으면서도 다른 듯한 느낌을 준다. 글속에서도 말했듯이 무형의 그 어떤 것에 꿈과 이상과 환상을 불어넣어 그 시대의 군중들에게 정신적인 지주로써 그려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왠지 내게는 그리 크게 와닿지 않는 설정처럼 보여졌다.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생활속에서 두개의 쳇바퀴처럼 달라붙어 굴러가는 아이들 젬과 매기..  세상에 대한, 이성에 대한, 그리고 보이고 들리는 모든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한컷 부풀대로 부푼 나이의 아이들이 그들의 부모가 살아내고 있을 현실속의 시간들을 이해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인과 그 아이들이 나누는 선문답같은 대화속에서 얼핏 얼핏 보여주고 싶어하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경험에 의해 버려지는 순수에 대한 욕망이었을까? 아니면 경험으로 인하여 버려질 수 밖에 없었던 아이들만의 순수를 말해주고 싶었던 것일까?  한적한 시골마을에서 도시로 올라왔던 젬과 메이지가 도시속에 동화되어가며 잃어버리고 있던 것들이 오히려 도시에서만 자란 매기에게는 어떤 새로운 의미로 재탄생되어지는 것 같다.

" 강 이편과 저편 사이, 강 한복판에는 뭐가 있냐고 물으셨죠? 그 답은 세상이에요. 두 극단 사이에 놓인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에요"

" 바로 그거야. 두 극단 사이의 긴장이야말로 우리를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있게 하는 거란다. 우리 인간은 어떤 한가지 측면만이 아니라 그 반대 측면까지 갖고 있는 거야. 그 두가지 상극이 우리의 내면에서 섞이고 부딪치고 불꽃을 일으키지.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도 있는거야. 평화만 있는 게 아니라 갈등도 있고. 순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경험도 있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삶의 교훈이란다. 그래야만 꽃한송이 속에서도 세상을 볼 수 있을 테니까."(247쪽)

사람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는 어쩌면 처해진 현실을 버리고 무시할 수 없기에 꿈을 꾸고 그것에 대한 환상을 바라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젬과 매기처럼 함께 있음으로 해서 은연중에 서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느껴가면서 그렇게 이 한세상을 살아내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약간의 실망감을 감추며 옮긴이의 말속에서 찾아낸 슈발리에의 말.. " 젬은 경험을 얻었고, 메이지는 순수를 잃었으며,매기는 순수를 되찾았다"... 소설의 내용을 요약했다는 이 짧은 말속에서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의 삶을 조명했다던 말은 끝내 부정하고 말았다. 단지 이쪽(어른)도 아니고 저쪽(아이)도 아닌 채 육체와 정신의 모순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나 고민과 고민을 해야만 했을 청소년기의 이야기였다고만 기억되어질 것 같다. 시인의 말처럼 두 극단 사이의 긴장을 잃지 않은 채 살아가야 할 젬과 매기, 그리고 메이지의 미래가 밝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비생각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