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의 계절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의 기억속에 있는 계절은 사계이다. 봄,여름,가을,겨울... 저마다의 독특한 색으로 우리를 찾아오곤 한다. 하지만 그의 기억속에는 또하나의 계절이 있다. 천둥의 계절, 신의 계절이다. 겨울과 봄 사이에 찾아오는 짧은 계절을 신계神季, 혹은 뇌계雷季라 불러 봄과 겨울과는 확연하게 구분지었다는 온穩의 사람들... 이름 그대로 천둥계절인 그 때가 오면 온의 세상은 무언가 알 수 없는 일들이 찾아온다. 그 짧은 계절속에서는 그동안 어긋났던 일들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진다고 그들은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천둥계절동안 꼼짝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과 관계없이 그들은 그 천둥계절에 모든 것들이 정화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천둥계절속에는 새로운 세계가 잉태되어져 있다고 그들은 믿는다. 그들은 말한다.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세상은 하계라고.. 그렇다면 그들은 신神일까? 아니 내가 보기에 그들은 결코 신이 아니다. 그들도 우리와 같다. 단지 살아가는 모습이 약간 다를 뿐...

쓰네카와 고타로의 작품 《야시》가 출간되었을 때 알 수 없는 매력에 이끌렸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책을 읽지 못했다. 그 흔한 편견의 벽을 넘지 못한 탓이다. 호러물 혹은 환상소설이라 불리워졌던 책들이 나에게 안겨 준 느낌이 그리 산뜻하지만은 않았던 까닭이기도 하겠지만 너무 허무맹랑한 환상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탓도 있었고,가끔씩 이런 설정은 너무 찜찜하다 그냥 넘어가고 싶다고 생각되어지는 대목들이 내게는 마치도 기어가는 벌레를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던 탓도 있었다. 하지만... 이 소설 《천둥계절》은 판타지물임에도 불구하고 산뜻하게 다가왔다.  책속의 세상으로 발을 들여놓고 한걸음씩 걸을 때마다 '참.. 맑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포장지를 뜯는 순간부터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읽게 된 책이다. 온의 세상에서 살게 된 하계의 소년 겐야를 따라가며 이야기는 시작되어지지만 어쩌면 그 소년속에 내가 들어가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한다.

소설은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로 구분되어져 있다. 가상의 세계에서 현실의 세계로 다시 돌아오는 나와 그 현실의 세계에서 가상의 세계로 들어가버린 나를 찾기 위해 가상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내가 만나는 지점에서부터는 그야말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소설의 구성을 살펴보면서 나는 각 나라의 신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북유럽신화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인간이 사는 하계와 신들이 사는 천상, 그 사이 중간세계.. 소설속의 온은 어쩌면 바로 그 중간쯤인 세상일 것이다. 중간중간에 느껴졌던 일본의 무속신앙에 대한 것들은 차라리 정겹게 다가왔다. 어느 나라든 그나라만의 무속신앙은 존재한다.  특히나 아주 작은 것들에게까지도 그들만의 의미를 갖게해주는 일본의 토테미즘과 애니미즘은 볼  때마다 참으로 신비롭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과 자연의 끈을 이어주는 것이 무속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에 그런 것들이 내게는 가끔씩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하니 말이다. 책을 읽으면서 온穩은 어쩌면 우리의 정신세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정신세계와 육신의 세계를 넘나드는 의식은 바로 영혼일게다. 정신이 추구하는 바는 끝도 없이 넓고 깊지만 육신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은 모든 것들이 제한적이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아마도 환상적인 이미지에 매달려 사는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삶을 꿈꾸고, 내가 찾아 헤매이던 그 꿈과 이상이 모두 이루어지는 세상.. 아무런 근심과 고통없는 평온을 꿈꾸는 그곳.. 바로 그곳이 이 소설속의 온처럼 느껴지는 까닭이 무엇일까?

우리가 살면서 힘들지 않을때가 있을까? 오로지 평온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순간들이 정말 행복하게 느껴질까?  삶의 여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기에 신의 존재도 필요할지 모른다. 힘겨울 때, 넘어져서 울고 싶을 때 생각지도 않게 신을 찾는 경우가 종종 있다. 신의 존재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는 종교관을 떠나서이다. 정말 무의식중에 나도 모르는 새 간절한 마음으로 신을 원할때가 있다. 감히 말하지만 우리의 삶이 평탄하고 원만할 때 신을 찾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왜 그럴까? 그만큼 나약하고 그만큼 미미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은 아닐까?   소년 겐야에게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 불행의 씨앗.. 그것은 진정 불행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저 왔던 자리로 되돌아가기 위한 하나의 분기점이었을 것이다. 동기가 되어주는 것은 많다. 소년 겐야에게로 바람의 새가 날아들었던 것도 자신이 알 수는 없었으나 그가 절실한 마음으로 원했던 까닭이리라.

소설속의 바람와이와이는 정령이다. 어떤 책에선가 본 것 같다. 아주 맑고 흔들림없는 영혼의 소유자에게 정령이 찾아온다고.. 소년 겐야에게 찾아와 자리잡은 바람의 새가 말했었다. 이 아이의 샘물은 마음을 편하게 한다고..  우리가 지금 잃어가고 있는 순수純粹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신화적인 의미로 볼 때 신과 인간의 세상을 넘나들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존재.. 그 정령이 새의 모습으로 소년에게 찾아와 잃어버린 소년의 기억을 되찾아가는 여정길에 동행해주지만, 바람의 새 역시도 그 소년을 통하여 해야 할 숙제가 있는 것을 보면 신은 절대로 자신의 힘을 거저 주지 않는 모양이다. 가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만난 후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 온 소년은 이미 소년이 아니다. 어쩌면 그 천둥계절이 가리키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일상은 아니었을까?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내야 할 순간들이 머물렀던 시공간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만 이미 정해진 운명대로 살 수 밖에 없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소설속에 등장하는 여럿의 화자들은 서로 씨줄 날줄처럼 엮여진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있다면 서로의 기억속을 더듬어보면 된다. 그래서 나는 잠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했지만(사실 뒷부분에서 약간은 뒤엉킨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던 탓에 나는 화자들의 기억속을 여러번 들랑거려야만 했었다)  소년 겐야가 살아내야 했을 그 천둥계절속의 시간들은 내게 참으로 신선한 긴장감을 안겨주었다.  소설속에서 무시무시한 느낌으로 등장했던 도바 무네키의 전설.. 그 도바 무네키가 안고 있었던 것은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힘겨운 장애물일수도 있고, 우리가 내려놓지 못한 채 짊어지고 가야할 등짐일수도 있을 것이다. 도바 무네키는 자신이 점찍은 사람에게는 기어코 찾아가 절망을 안겨주고 있지만 그에 대응하는 바람와이와이가 내게 있어준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의 삶이 나를 힘들게 하고, 길을 잃어 지쳐 있을 때 절망을 알게 해주는 귀신조 도바 무네키가 나에게도  찾아오겠지.. 그런 때 나도 바람와이와이를 외쳐 불러보고 싶다. 나에게 내려와 줘... 그러면 '당신이 필요한 힘을 나누어주겠습니다' 라고 말해주는 그런 바람의 새가 내게도 날아와 줄까?  그런데 이쯤에서 나는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내가 그만큼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졌는가?  묻고 있는 지금 느닷없이 가슴이 뭉클해지는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아이비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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