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우리는 모두 누군가와

깊이 얽혀있다

아주 먼 옛날 바다에

표류한 누군가가

물고기의 밥이 되어

분해돼서

박테리아가 되고

또 썩고 또 썩어져

짙은 원유가 되어

당신의 날개가 되어서

저 하늘에서 이 하늘로

데려다주는 꿈을

이어준 검처럼

혹 다른 누군가는

나무의 거름이 되어

당신의 의자가 되고

당신의 집이 된 것처럼

나는 언젠가

당신의 등나무가 되어

당신이 잠시 쉴 수 있는

그늘이 되고 싶다

당신이 잠시 바라볼 수 있는

휴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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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여름 에디션)
황보름 지음 / 클레이하우스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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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남동 서점 잠깐 숨 쉬며 꿈꾸는 공간

 

 

 이번이 소위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책을 접하는 두 번째이다. 아니나 다를까, 책은 구내 모든 도서관에서 대출 예약 불가라고 경고 메시지를 날리듯, 빨갛게 물들어 있고, 내 마음도 새빨갛게 타들어 버렸다. 처음, 베스트셀러라고 해서 본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기대보다 실망이 컸던 까닭이다. 물론, 그 책이 나쁜 책이란 말은 아니다. 다만 너무 잘 만들어진 기획 상품적 성격의 책이어서 조금 실망했다고 할까? 그런데 또, 베스트셀러를 빌리지 못해, 사야 한다니, 마음이 새빨갛게 타들어 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여러 포인트를 긁어모아, 대충 반값에 후려쳐서, 구매했다. 그런데 읽는 내내 정말 뜻밖이었다. 애초에 기대를 안 한 탓일까? 자꾸 실실거리고, 미소 짓는 나를 보면서, 이 책의 매력이 무엇인지 뜻밖에 생각해 볼 시간을 갖게 되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주관적인 이유이고, 하나는 객관적 이유이다.

 

 첫 번째 이유는 한 선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새벽이면 매일 만나는 불면 클럽의 인간들이 있었다. 우리는 그 클럽을 넘버 클럽이라고 불렀는데, 그때가 넘버 쓰리라는 영화가 인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냥 따라 붙인 이름이었다. 그중 그 선배가 넘버 원이었고, 정말 약간은 재떨이처럼 생긴 선배가 넘버 투였고, 내가 넘버 쓰리였다. 학교에 적응도 못 해, 밤에 잠도 안 자고 만나는 백수들이 무얼 하겠는가? 정말 별 볼 일 없는 일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 학기를 끝으로 넘버 원 선배는 학고 세 번으로 학교에서 잘리고, 넘버 투는 영화계로 진출하겠다고 자퇴하고, 나보다 두 학번 아래인 넘버 포 후배도 군대를 가버리고, 여전히 별 볼 일 없이 남은 나도 휴학을 하면서, 넘버 클럽은 안녕을 고했다. 애초에 어떤 의미로 우리는 인간쓰레기였고, 또 그 쓰레기임을 자처하면서 즐기는 그런 부류였다. 그런데 넘버 원 선배가 여자를 만나더니 갑자기 변했다. 학교에 다시 복학하여, 기어이 졸업장을 따더니, 신학 대학원을 가고, 우리 중 유일하게 목사가 되었다. , 사실 이런 일이 다반사이기는 하다. 신학대에서 신학생이 목사 되는 일 말고, 다른 일 하는 게 더 문제라면 문제이니까. 그런데 한 가지 기이한 변화 중 하나는 그 선배가 갑자기 공동체에 관해 관심을 가졌다는 사실이다. 공동체? 솔직히 이야기하면, 신학교 시절 여러 공동체를 전전했던 건 선배가 아닌, 나였다. 물론, 방황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만큼 관심도 있었다. 수도원에서 수도 피정도 해보고, 어떤 수도 공동체에서는 1년 가까이 살아도 보고, 유명한 공동체 여러 곳을 탐방했다. 하지만 선배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진 적도 없었고, 실제로 아는 바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 공동체를 하겠다면서, 어디 시골 폐가를 빌려다가 보여주는데,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이 대체 공동체가 무언지 알고 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왜냐하면 공동체란 곳은 어디 피난처가 아닌, 지역과 소통하고 마주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하는 곳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그래도 몇 년 후 나름 자신을 따르는 젊은 청년들을 모아 카페를 차리고, 그 사업을 통해 공동체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했을 땐, 나름의 희망이 있어 보였다. 하지만 거의 대학생인 청년들이 그 카페를 유지하면서 공동체 교회를 추구한다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또 한 번의 실패와 여러 번 현실적 상황에 직면하고서, 선배는 직업을 갖고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그 사이, 나는 어느새 신앙심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 되었고, 선배는 이제 어엿한 목사가 되어 자신의 공동체를 시작했다. 우리 동네 도서관이라고 하는 국가 지원을 받은 사업이었다. 그 도서관에서 선배는 여기 이 글 휴남동 서점에서 나온 이벤트와 비슷한 소소한 이벤트들을 시작하고 있다. 블로그를 만들고, 강사를 초청하고, 독서 모임까지, 지역과 소통하는 진짜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제는 그런 선배가 때론 너무 거룩한 느낌이 들어 조금 불편하기는 하지만, 마음속으론 늘 응원하고 있다. 그 때문일까? 휴남동 서점이 남 이야기 같지 않고, 내 친구의 이야기 혹은 내가 응원하는 사람의 이야기 같은 느낌이었던 까닭은.

 

 둘째로, 내 개인적인 잡설을 떨쳐내고 객관적인 측면에서 이 글의 장점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무엇보다 이 글의 장점은 진솔하고, 편안하다는 점이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우리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흔한 인물들이다. 물론, 조금은 색다를지도 모르겠다. 이혼한 여자, 공대생 작가, 취업을 포기한 바리스타, 진학을 포기한 고등학생 등, 어딘가 부족하고, 나름의 사연이 있지만, 이 글은 그 부족함에 집착하지 않고, 사연에도 구구절절하지 않다. 각자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내버려 두고, 각자의 사연은 각자의 사연대로 거리를 조절한다. 그리고 그 무게추를 휴남동 서점이란 공간에 맡겨둔다. 작진 않지만, 그렇다고 크지도 않은, 하지만 자신만의 색깔을 추구하려고 하는 휴남동 서점이란 공간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소통하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물론, 소설이기에 조금은 미화되어 있고, 조금은 희망적인 건 사실이다. 현실이란 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노동과 여가의 문제처럼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닌 탓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 이유로 고민하며, 그 고민을 공유하는 장소로 그들은 휴남동 서점을 선택하여, 자신의 고민을 예치해둔다. 얼마나 좋을까? 만약 이럴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조금의 그런 여유가 필요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권해보고 싶다. 편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의 쉼을 갖는다는 그런 느낌으로.

 

 

P.S.

 

 글 속 승우란 인물을 통해 올바른 문장에 관한 고민을 해보게 되었다. 정말 제대로 된 문장이란 건 무얼까? 어법보다 중요한 건 마음과 솔직함이지만, 말이 되지 않는 문장을 쓰는 건 대충 감정으로 억지를 부리는 일과 비슷할 것이다. 조금 더 진솔하게, 그리고 바르게, 문장 하나하나를, 마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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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부

 

 

거센 폭풍우가 지난

다음 날 아침이면

빌딩 사이 참새들이

짹짹 짹짹 짹짹

서로에게 안부를 묻는다

참철아, 아무 일 없었지

참순아, 너도 무사했지

지지배배 지지배배

이름 모를 새들도

구구 구구 꾹꾹

거리의 비둘기들도

서로 안부를 묻는데

아무도 떠오르질 않는다

문득 당신께 안부를 묻고 싶다

간밤에 아무 일 없으셨지요

언제나 잘 지내고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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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욜로욜로 시리즈
박지리 지음 / 사계절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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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홀 마음속 깊은 응어리이거나 괴물 같은 형상이거나

 

 

 얼마 전 집중호우로 어린 남매 둘이 맨홀에 빠져 죽은 사건이 있었다. 평소라면 누구도 신경도 쓰지 않을, 맨홀이 갑자기 언론에 집중조명 되었다. 하수도가 흐르는 곳, 혹은 공사 때 간혹 볼 수 있는 어두운 공간과 사다리, 하지만 그 누구도 쉽게 들어가 보지 못한 곳. 만약 이 소설이 어설프게 관념적인 마음의 구멍에 관해 설을 풀었다면, 제대로 된 소설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맨홀을 등장시켜 그 안에 구축해놓은 주인공의 세계와 누나와의 추억, 그리고 마지막 시체를 집어삼키는 자기 안의 괴물까지, 생생하게 눈에 보이고,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기에, 이 소설은 평범한 가정 이야기로도 좋은 소설이 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결코 평범한 가정이라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안다. 맨날 엄마를 구타하는 아버지, 그 아버지를 피해 맨홀로 숨는 남매의 이야기가 어떻게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아버지가 소방관으로서 한 가정을 구하고 순직하여, 세상에 집중조명된 영웅이 되었다면, 어떻겠는가? 여기서 한 가지 모순이 발생한다. 늘 맞은 엄마는 새삼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인다. 그런데 자신에게 맨홀의 자리를 가르쳐주고, 인도해준 누나가 갑자기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를 아버지로 인정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도저히 이 상황을 납득할 수가 없다. 어떻게 수년간 자신들을 폭행하고, 한 집안을 좌지우지한 공포의 대상을 아버지라고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인정할 수 없는 주인공은 바깥으로 자꾸 맴돌고, 집안에선 누나와 부딪친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그 자신이 누나에게 폭행의 전조를 드리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끔찍한 전조는 결국 외부의 파키라는 외국인을 향해 폭발한다. 물론,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친구들 사이에서 쪼다가 되고 싶지 않아, 몇 번 발로 같이 찬 것뿐이다. 아니, 같이 모여서 발길질을 했는데, 그냥 인형처럼 맥을 못 추고 죽어버린 것이다. 그때 그의 여자친구가 맨홀을 떠올려, 다 같이 시체를 맨홀에 던져버린 것, 그뿐이었다. 그런데 약 39일 동안 주인공은 내면의 고통과 실질적인 대상포진까지 겹치면서, 악몽에 시달린다. 자신과 누나와의 아름다운 추억이었던, 아니 아버지로부터 유일한 도피처였던 맨홀이 시체구덩이가 되어, 이제 주인공의 내면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결국, 주인공은 견디지 못하고 자수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아이러니가 또 발생한다. 다른 아이들은 사실 모두 주인공이 예전에 그 외국인으로부터 맞은 것을 복수해주기 위해 가담했을 뿐인데, 제대로 된 변호사를 선임할 형편이 못 되었다. 그 때문에, 친구들은 폭력을 행사하여 살인을 주도한 죄로 3년 형을 받았고, 주인공의 여자친구는 살인 방조죄로 1년 형을 선고받는다. 그런데 주인공은 영웅인 아버지 때문에 정상참작이 되어, 재활센터에서 16주의 생활 후 1, 2년의 보호관찰 처분으로 판결을 받는다. 게다가 가장 아이러니의 극은 변호사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주인공이 방황했다는 사실을 재판부에 호소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여기에 대꾸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다. 이 소설은 이렇게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은 채 끝을 맺는다. 아버지를 용서하지도, 그렇다고 쿨하게 저주하지도 못하면서, 구멍은 구멍으로 남겨둔 채, 더 이상 다가설 수 없는 맨홀로 우두커니 존재한 채, 그렇게 끝을 맺는다.

 

 소설을 읽고서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한 가지는 정말 죽도록 증오하는 감정이란 게 무엇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해결되지 않는 감정의 응어리를 어떻게 푸는 게 정답일까, 하는 또 다른 의문이었다. 소설처럼 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감히 알지도 못하는 응어리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소설가도 침묵으로 남겨둔 것 아닐까, 잠시 생각해보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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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7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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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목가 미국이 한때 꿈꾸었던, 그리고 끝나버린

 

 

 처음부터 분량에서 진입장벽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 글의 주인공 스위드의 동생 제리가 나올 때까지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조금 지친 느낌이었다. 우선 요즈음 글쓰기 방식과 너무 달라서, 같은 이야기를 너무 여러 차례 반복하는 경향이라든가, 너무 많은 설정을 둔다든가, 이런 점들이 이 글의 진입장벽을 높이는 면이 있었다. 사실, 제리가 등장하면서, 이 글이 단순히 길게 쓰인 글이 아니라,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미국이란 사회의 문제점을 여실히 드러낸 소설이란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존 에프 케네디, 베트남 전쟁, 닉슨 대통령의 워터게이트 사건, 그리고 자이나교와 목구멍 깊숙이까지, 이 글이 다루는 사건은 미국의 현대사를 아우르는 핵심의 한가운데 있다. 그렇지만 다루는 방식이 특이하다. 직접적으로 다루기는 하되, 한 가정사를 통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올드림록이라는 첫 번째 장소적인 설정이 들어간다. 이름부터 무언가 아메리카 드림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에 가장 이상적인 남자가 이 글의 주인공 스위드이다. 어릴 적부터 무엇을 하든 눈에 띄게 두드러진 그의 외모와 매너, 그리고 탄탄한 근육은 그 동네 모든 아이들의 모범이었다. 탄탄한 근육의 소유자답게 모든 스포츠에서도 두드러지게 뛰어나, 스카우트를 받아서 대학을 진학할 수도 있었지만, 스위드는 아버지의 명령에 따라, 여자 장갑 사업을 이어받는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점이 있는데, 스위드는 유대인이다. , 이민자이며, 유대인들은 전형적인 이미지상, 장사를 하게 마련이다. 스위드도 그런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아버지 사업의 길을 물려받은 것이다. 하지만 단 한 가지, 다른 유대인들과 달리 스위드가 아버지에게 저항한 일이 있다. 결혼에 관하여 그는 미스 유니버스와 결혼하는데, 그녀는 아일랜드인이었으며, 가톨릭을 믿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이야기하지는 힘들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겐 그의 또 다른 성공의 증표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 둘 사이에 낳은 딸이 문제였다. 어렸을 때부터 말더듬이로 태어나 속을 썩이더니, 어느 순간 공산주의자로 변하여 반전운동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시대 자체가 베트남 전쟁이 이미 아무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국민 모두 자각하기 시작하고, 젊은이들이 반전을 시작한 시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겨우 열여섯 살밖에 안 된 딸이 반전을 위해 뉴욕까지 외박을 일삼고, 급기야 올드림록의 작은 우체국이 딸린 상점을 폭파하는 테러범이 된다면, 과연 어떤 부모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럼에도 스위드는 늘 이해하려 하며, 어떻게든 딸과 대화하려 시도한다. 단 한 번도 그의 인생에서 누군가를 배척하거나, 호의를 무시한 적이 없는 스위드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을 어떻게 내팽개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딸은 단호하고, 둘의 대화는 서로의 뼈를 때린다. 아니, 미국 사회에 대한 뼈를 때린다. 다만, 여기도 조금은 너무 많은 반복이 있다는 점이 아쉽기는 하다. 여하튼 이렇게 딸에 대해 지극정성인 스위드는 딸의 테러 사건 이후 사라진 딸의 행방을 수소문한다. 그리고 5년 후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어느 하천 밑에 다 쓰러져가는 건물에서 사는 딸을 발견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미국 사회의 아이러니가 보인다. 딸은 한 번의 테러가 아닌 세 번의 테러를 더 했다고 스스로 밝힌다. 그리고 그 후 자이나교도가 되어 채소만 먹고, 씻지도 않고, 거리를 헤매고 있다고 했다. 그사이에 강간을 두 번이나 당했다. 스위드는 딸의 죄책감을 덜어내기를 바라며, 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을 간절히 바라지만, 이번에도 딸 메리는 단호하다. 이에 처음으로 스위드는 동생 제리와의 통화를 통해 자신을 향한 분노와 울음을 터트린다.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절망한 상태에서 미국 상류 사회와 교류하는 스위드의 이중생활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진실도 없다. 아내는 이상한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놀아나고 있고, 모두 목구멍 깊숙이와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며 잘난 척하지만, 다 쓸데없는 이야기뿐이다. 이 가운데 공상인지, 실제인지, 딸 메리가 거지꼴을 하고 돌아와 스위드의 아버지는 혼절을 한다. 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걸까? 소설은 답을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끊임없이 질문한다. 무엇이 문제냐고? 왜 아메리카 드림이 이렇게 처참하게 무너졌냐고? 왜 끊임없이 당신들은 위선을 떨고 있냐고?

 

 이 소설의 전체적인 평을 하자면, 글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설로써 여러 설정이나 메시지나, 서사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하다면 완벽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다만 모든 것이 너무 과하다. 설정도 너무 많고, 메시지도 너무 많다. 서사는 그리고 너무 길다. 만약 스타일을 조금 바꿔 조금 더 간략하게 표현했다면, 이 책 분량의 반만으로도 충분히 핵심을 담았으리라 개인적으론 생각한다. 그럼에도 누군가에 추천할 여지는 있다. 미국 사회에 대한 어떤 여러 가지 측면을 생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분명 좋은 소설이다. 그것도 사회적인 시선이 아닌, 가정적이고, 매우 주관적인 시선으로, 하나의 측면이 아닌, 다각적 측면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에서 추천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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