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강 오정희 컬렉션
오정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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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 강 그토록 생생한 적의에 관하여

 

 

 정말 오랜만에 오정희 작가를 마주한다. 한때 유년의 뜰의 단편집에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별사어둠의 집이 내 숨통을 조여오듯 읽는 내내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 후 몇 권의 책을 사고, 그중에 이 불의 강도 사두었다. 10년만일까? 10년 전보다 더 강하게 불의 강적요가 내 가슴속에 섬뜩한 살의이거나 혹은 어딘가로 분출하지 못한 욕망의 탈출로를 꿈꾸게 했다.

 

 강둑이 강줄기를 따라 U자로 휘어 도는 구비에 발전소의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작은 규모의 화력발전소를 만들 계획이었던 것 같은데, 어찌 된 영문인지 공사를 하다 그만두었다. 그냥 놀릴 순 없었는지, 한때는 해산물의 하치장으로 쓰였다가, 지금은 영화 세트장으로 쓰이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쓸데도 없고 별 특징도 없는 건물에 왜 그토록 생생한 적의를 느꼈는지 모르겠다는 사실이다. 활활 타올라야 하는 화력발전소는 전혀 제 모습을 갖추지도 못하고, 담배를 피우지도 않는 남편은 불에 대한 동경으로 점점 이성을 잃어가고 있다. 여자는 알고 있다. 남편이 피우지 못한 불은 자신의 낙태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혹은 평생 재봉틀에 갇힌 그 자신의 삶 속에 또 하나의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어쩌면 남편은 어떤 생명도 피울 수 없고 그저 담뱃불만 피우는 자신에 대한 동경을 대신 실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느 날 밤 화력발전소는 자신의 원래 역할인 불꽃을 피운다. 남편에게서는 심한 탄 냄새가 난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불꽃이다. 그런데 왜 눈물이 피어나는지 모를 일이다.

 

 그토록 생생한 적의란 무엇일까? 잠깐 생각해본다. 과연 건물 자체에 적의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아니, 절대 그럴 수 없다. 적의는 말 그대로 인간의 감정이며, 특히나 마주 대할 때 느끼는 감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주인공은 처음부터 그 우뚝 솟은 화력발전소의 굴뚝에 혹은 그 건물에 그런 적의를 느낀 걸까? 맥락으로 살펴보았을 때 제 역할을 못 하는 화력발전소에 대한 원망의 발로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문명에 대한 까닭 없는 적의도 배제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역시 가장 중요한 것은 맥락이다. 왜 우리는 활활 불타오를 수 없는 걸까? 남편은 평생 재봉틀에 갇혀 살 것이다. 여자는 그저 남편을 기다리면서 담배만을 하염없이 피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이다. 서글픈 삶이다. 하지만 한번 폭발해보고 싶은 게 삶 아닌가? 함부로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911테러의 희생자들에게는 너무나 미안한 이야기지만,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을 들이박는 순간, 그 오색 찬연함은 나를 숨 막히게 했다. 굳이 이런 방식은 아닐지라도, 가끔 어떤 방식으로든 불타올라야 한다. 그렇지 않은 경우, 정말 더욱 잔인한 적요의 공포를 맛볼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야기는 별 내용이 없다. 가정부를 두고 혼자 사는 괴팍한 노인이 놀이터에서 한 모자란 아이를 집으로 데려온 이야기일 뿐이다. 그런데 왜 노인은 아이가 집에 가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탄 것일까? 어떤 외로움이 그토록 숨 막히는 적요를 피할 길 없게 한 걸까? 나는 왜 이 글을 읽을 때마다 조바심 비슷한 공포감이 드는 걸까? 누구도 혼자 되는 삶은 피할 수 없다. 그 공포는 마주해 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런데 그 예감과 기시감이 사람을 홀리게 하고, 두렵게 만드는 것 같다. 잔인한 글이다. 너무나 무섭고 잔인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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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찍는 사진사
박완서 지음 / 문학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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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찍는 사진사 과실치사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며

 

 

 오랫동안 한국 소설의 여류 작가로 기억되는 인물, 대표적인 사람 두 사람을 꼽자면 내 개인적으로는 박완서와, 신경숙 작가다. 물론, 신경숙 작가는 표절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내 젊은 시기 가장 먼저 접한 여자 작가들이 이 두 사람이기 때문에, 기억에 각인 되어 있는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꼭 이 두 작가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무언가 한국의 여성 작가 하면 떠오르는 작가일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 박완서 작가의 글을 읽고 느낀 것은, 역시 한국을 대변하는 여성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다 읽지는 못했지만, 내 개인적으로는 꿈꾸는 인큐베이터가 좋았다. 전에 읽었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하지만 읽으면서 왜 내가 이 작품을 기억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좋은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약간 처음엔 진입 장벽이 있었다. 너무나 올드한 여자 주인공의 사고방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찬찬히 읽어가면서 그 가슴 안에 아픈 사연을 읽어낼 수 있었다. 이런 게 사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에서 글을 통해 한을 풀어내는 방식이 아닐까,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꿈을 찍는 사진사의 경우, 처음부터 옥순이의 한 옥타브 높을 것 같은 음성처럼 문장이 지지배배 리듬을 타서, 술술 잘 읽혔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공의 사고 의식이었다. 웬 홍길동 흉내? 촌지를 받는 행위 자체가 부정한데, 거기서 홍길동의 논리를 펴니,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물론, 홍길동도 어떻게 보면 잡도둑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방법적인 측면에서 옳다고 말하는 건 분명 어폐가 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는데, 홍길동의 논리를? 물론, 그 시대가 모두가 촌지를 받는데, 혼자 잘났다고, 떳떳한 척하는 일도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여하튼 여기서부터 삐끗거리기 시작하더니, 주인공의 생각들과 감정들이 쉬 정리되지 못하고, 부산을 떨며 어수선한 모습을 보인다. 우선, 옥순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리해야 하는지 전혀 갈피를 잡지 못한다. 몸은 왕성한 정욕으로 차 있는데, 자기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여자를 제대로 건드릴 수도 없으니, 환장할 노릇이고. 여기에 주인집 여자는 과외를 핑계로 자꾸 들이대는데. 결국 넘지 못할 선을 넘어버리게 되고, 그 광경을 옥순에게 들켜버리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아니, 무얼 어떻게 했어야만 했던 것일까? 이 글은 마지막 옥순으로 죽음으로 이 모든 이야기를 허무하게 매조지 한다. 옥순은 죽음은 그냥 과실치사이다. 그의 잘못도, 시대의 잘못도 아닌, 누군가의 과....

 

 마지막 과실치사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본다. 왜 이런 식으로 끝을 맺은 걸까?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 꿈꾸는 파랑새가 온전히 살아갈 수 없는 비극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왜 과실치사일까? 아무래도 서울은 너무 무서운 곳인가 보다. 너무 많은 차들과,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쉽게, 그리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사라져 버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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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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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halation) - 우주적이기엔 너무 인간적인 숨에 관해

 

 

 처음 이 책에 표제를 보고 떠올린 건, ‘Exhalation’이 숨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과학적인 단어라는 인상이었다. 실제로 표제작인 을 보니, 과학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문학적인 상징적 수단으로 쓰인 인상을 받았다. 일단, ‘이란 단어가 왜 내게는 너무 동양적인 느낌인 걸까? 우리에겐 왜 과학적이면서 인간적인 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까? 실제로, 영어 사전에서 ‘Exhalation’은 방출이란 의미이거나 날숨이란 의미로 나와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Exhalation’은 엔트로피 법칙에서의 에너지 보존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참 해석하기 난해한 단어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전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대한 어떤 좋은 기억이 덧붙여진 까닭일까? 정말 오랜만에 책을 구입했다. 특히, 문학책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첫 작품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부터 매우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를 읽는 듯했다. 거기에 세월에 문이란 판타지가 더해져,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는 설정이 흥을 더욱 북돋웠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마지막인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까지 작가가 줄곧 내세우고 있는 관점이 이 소설에 나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설사, 다차원의 세계의 숱한 여러 명의 내가 있더라도, 현재의 내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다. 다만, 과거는 현재를 더 나아가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뒤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다. 물론,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가 다를 수 있겠지만, 이런 기본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쓰인 글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읽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끈 글은 역시 이었다. 표제부터 고민하게 만든 글이었기에 관심도 있었지만, 거기에 뇌에 관한 이야기라 관심이 더해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글이었다. 일단, 주인공이 자신의 뇌를 해부하면서, 뇌 운동의 진실을 공기 입자의 흐름으로 분석하는 장면부터 쉽지 않았다. 거기서 우주의 에너지 이야기와 시간의 상대성 이야기까지, 무언가 과학적인 설명을 하는 것 같은데,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과학에 관해 무지해 이 책을 읽고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양자역학그리고 엔트로피 법칙까지 읽었다. 그래서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맥락은 마지막 부분이다. 이런 과학적 진실과 상관없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에 관해, 작가가 긍정한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내가 구상하고 있는 소설이 사이버에 관한 소설이 있어서, 관심이 갔다. 다만 내가 구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실제 가상의 인공 지능에 관한 인권, 사랑에 관한 권리까지 다루어 내심 놀라기는 했다. 이런 세상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아바타에게 실제 사랑을 주고, 애완동물처럼 자신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는 거의 마지막 라이어널 데이시의 고백에 모든 이 글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다. 아버지의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기계식 자동 보모의 유용성에 모든 인생을 걸었다는 그 한마디.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글이 교차적으로 구성된 점도 흥미로웠지만, 그 교차점이 제목의 두 지점을 정확하게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재밌었다. 리멤이라는 기계를 통해 실제로 사실적 진실에 다가갔을 때 인간이 느끼는 곤혹감에 대해 생생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선교사를 통해 글을 배운 지징기가 씨족의 서기가 되면서 사실적 진실과 감정적 진실 사이에 갈등하는 장면은 이 글이 짚어내고자 하는 요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럽인들의 사고, 정확한 기록과 진실로 이루어진 사고는 그들의 언어로 보우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또 다른 진실이란 언어의 개념이 존재한다. 모두의 감정을 아우르고 선택하는 미미라는 진실이다. 여기엔 어쩌면 약간의 과장도 존재하고 허세도 존재할 수 있다. 이야기꾼이 실제 이야기를 매번 똑같이 전달하지 않고, 때론 더 우습게, 혹은 더 비장하게 전달하듯이, 그날그날의 상태에 따라 진실은 변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상대적 진실은 그날의 모든 관객들을 향한 최선이다. 어떤 진실이 더 유효한 진실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진실이란 엄격한 잣대이거나 절대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거대한 침묵은 페르미의 역설을 이야기하지만, 지적 생명체의 침략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든 외계의 종족들이 침묵을 지킨다는 역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약간의 찡한 울림이 있다. 외계보다 훨씬 더 외계적인 앵무새의 마지막 인사가 잘 있어. 사랑해.’인 까닭이다.

 

 ‘옴팔로스’, 바른 표기법은 옴파로스이다. 여하튼 고대 그리스어로 배꼽이란 의미이다. 그래서인지, 우주의 중심 혹은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떤 의미로 보면,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 같다. 뉴턴이 바라본 지구 중심적 세계에서 코페르니쿠스가 바라본 우주 중심의 세계로 전환이 가져다준 변화에 관해 말하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그저 우주의 한낱 부산물일 뿐이다. 존재 이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신에게 고뇌 끝에 기도한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탐구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몇 년 전, 모임에서 합평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내 품평을 찾아보았다. 깜짝 놀랐다. 스크롤의 압박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했던 것은 그때 품평은 이렇게 여러 작품을 하지도 않고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단 한 작품이었다. 자세히 뜯어보니, 두 장까지는 전체적인 내용의 줄거리였고, 나머지 약 세 장이 내 인생의 썰을 풀어 놓았다. 얼마나 낯부끄럽던지. 물론, 좋은 비평은 개인의 감정과 감상이 잘 버물리야 한다. 하지만 그땐 너무 과했다. 지금의 이 글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그 반대가 아닌가 싶어, 조금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은 비슷하다. 이 작품들이 하나하나 대단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전혀 다른 상상력과 또 거기에 나름의 건실한 자기 철학이 존재하고 있다. 인생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살 것인지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건실한 철학이다. 우주적이기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SF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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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꼬마 아가씨

 

 

동네 슈퍼에서

조그맣고 통통한 소녀가

아주 앳된 목소리로

휴지가 없어

휴지가 없어

휴지가 없어

자꾸 같은 말을 반복한다

동네 슈퍼 아저씨

집에 휴지 배달했어

크게 외쳐보지만

소녀는 더 앳된 목소리로

휴지가 없어

휴지가 없어

휴지가 없어

메아리처럼 소리를 되뇐다

너무 귀여운데

마음이 조금 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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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좋은 사람
줌파 라히리 지음, 박상미 옮김 / 마음산책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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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accustomed Earth To walk on the Earth

 

 

 최근 마지막에 본 책은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이다. 그전에 읽은 책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인데, 내가 읽은 철학책 중 가장 최악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억에 이십 대 때 읽다가 포기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 이유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처음 1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자기복제이다. 그런데 그 복제가 400페이지 빼곡하니, 읽는 도중에도 내가 왜 이따위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얼마나 많은 허세와 잘난 체에 그만 내가 체증에 걸린 기분이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문득, 소설이 그리웠고, 그래서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어 들었다. 비록 표절 시비가 있다고는 하지만, 나름 재밌었다. 다만, 너무 예전 책이라 그런지 조금 구태의연한 설명이 많긴 했다. 그리고 접한 책이 바로 이 책, 길들지 않은 땅(개인적으론 익숙지 않은 땅이 더 원제가 가깝다고 생각하지만)이다. 사실, 처음에 원제가 그저 좋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표제에 영어로 ‘Unaccustomed Earth’로 되어 있어서, 원제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한 가지 의문이 든 건 왜 한국 제목을 그저 좋은 사람으로 했는지 의문이 든다. 일단, 내가 여기서 읽은 소설 중 가장 별로였다. 물론, 개인적 취향 문제이지만, 알코올 의존도에 대한 강력한 외국인의 혐오증 정도를 알려 줄 뿐, 솔직히 제목이 왜 그저 좋은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출판사가 사람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제목만 따온 것 같은데, 솔직히 이런 부분은 개선되었으면 좋겠다. 모든 작품을 아우를 수 있는 제목이 있는데, 왜 굳이 이러는지, 한편으로 이해가 되면서도, 조금 아쉽다. 여하튼 잡설은 여기서 끝내고, 글 전체에 대해 조금씩 평해보려고 한다.

 

 처음 길들지 않은 땅에서부터 이 작품집에 대한 좋은 예감을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너무 커다란 이야기가 아닌, 잔잔한 일상과 그 속에 감추어진 가족 간에 갈등과 심리가 잘 묘사되어 있어서 좋았다. 두 번째 작품인 지옥-천국은 정말 마지막이 압권인 작품이라 생각한다. 불살라지고 싶지만, 혹은 불살라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삶과 가족에 관한 부분이 노을과 연결되면서, 이웃의 이제 한참을 보셨지요.’로 마무리되는 장면이 훈훈하면서도 무언가 애잔한 기분이 들었다. ‘머물지 않은 방’, 역시 마지막 부분이 좋았다. 물론, 대부분 사람들이 마지막을 섹스로 끝내는 게 뭐가 좋냐고 하면 별로 할 말은 없다. 다만 이 글에서 중요한 지점은 마지막 심장의 고동이 아닐까 싶다. 섹스 그 자체보다, 더 이상 무언가 기대할 게 없는 것처럼 보이던 부부가 약동하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아닐까, 자문해본다. ‘그저 좋은 사람아무도 모르는 일은 재미는 있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어디서 이 소설의 의미를 찾아야 할지, 조금 더 솔직해지면 재밌다는 점도 조금 모자란 소설들이란 느낌이다


 2부 헤마와 코쉭은 그 제목도 모르고 지나치다가, 마지막 뭍에 오르다를 보고서, 이 소설들이 처음부터 조금씩 연결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중 한 해의 끝은 여러 가지 생각이 들게 한 작품이었다. 작품 자체가 좋았다기보다는 내 개인적인 경험에 기인한 이유이다. 친구의 와이프가 죽으면서, 친구 아들이 극심한 방황을 하게 되어, 조금 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물론, 이 작품의 코쉭보다는 훨씬 어린 나이이고, 어른도 어찌할 수 없는 중2병의 시기인 것도 한몫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내 개인적으로 나는 친구에게 차라리 여자를 만나서 대신할 엄마를 찾아주는 건 어떠냐고 이야기했지만, 이 글을 읽으면서 든 생각은 조금 내 생각이 무르지 않나 싶다. 다만, 조금 나이가 들면 코쉭이 자신 아버지를 보면서 또는 아버지가 코쉭을 바라보면서, 그 모든 일을 가능케 한 치트라에게 감사하듯이,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마지막으로 뭍에 오르다는 조금 아픈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익숙지 않은 땅을 살아가던 누군가는 수장되고, 또 다른 누군가는 평생 그 사람을 가슴 속에 묻어둔 채 그저 평범한 일상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 아프다. 하지만 이것이 일상이고, 삶이고, 소설이란 생각이 문득 든다. 뭍에 오르지 않고 사람은 살아갈 수 없다. 아주 사소한 그 일상들이 쌓여 삶이 되는 것이고, 결국 하나의 어엿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을 해본다. 이런 의미에서, 조금 더 내 일상을 소중히 하고, 하루하루를 감사하며, 때론 슬퍼하며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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