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가족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춘미 옮김 / 사과나무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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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가족 시적인 글에 대한 현기증 혹은 울렁거림

 

 

 마루야마 겐지의 글을 이 책을 포함하여 세 번째로 보게 되었다. 처음, ‘밤의 기별에서 느꼈던, ‘이건 뭐지?’와 같은 궁금증과 같은 충격이, ‘달에 울다.’를 통해 시적인 글이 주는 울림과 떨림의 취기로 내 온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그런데 세 번째 접한 물의 가족에서 나는 갑자기 이 취기에 사로잡힘을 넘어서, 무언가 된통 당한 기분을 느낀다. 뭐랄까, 너무 과하다고 말해야 할까? 아니면, 너무 똑같은 반복적인 시적인 운율과 분위기에 물렸다고 표현해야 할까? 한 마디로, 시적 소설에 대한 내 화두에 대해 다시 한번 고찰해야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이 소설 자체가 앞의 두 소설보다 떨어지는 소설은 아니다. 만약, 내가 마루야마 겐지 작품 중 이 작품을 먼저 접했다면 아마 밤의 기별에서 느꼈던, 똑같은 충격과 신선함을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전과 다르게 이 취기에 흥이 오르지 않고, 울렁거림과 메스꺼움을 느끼게 된 걸까?

 

 소설은 처음 주인공이 고향으로 돌아와 죽는 장면부터 시작한다. 처음부터 1인칭 주인공이 죽어버리면 어떻게 소설을 전개한단 말인가? 귀신이라도 되어 전개한다는 걸까? 아니나 다를까, 주인공은 혼이 되어 그 고장을 배회하기 시작한다. 그 첫 만남은 여동생 야에코의 출산으로 나온 아이였다. 야에코, 자신이 너무나 사랑했던 동생, 그 때문에 주인공은 고향을 떠나야 했고, 동시에 다시 돌아와야만 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 때문에 도망을 제안했지만 야에코는 거절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의 아이를 혼자서 낳았다. 너무나 천진무구해서 그토록 걱정했지만, 야에코는 자신의 아이를 혼자 거뜬히 낳고 보살폈다. 조부와 함께 살면서, 이제는 아이를 위해 일도 하고, 누구보다 건강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전쟁터에서 돌아와 사람들과 소통을 닫고, 깊은 산속에서 말을 키우며 살아온 조부는 이제 야에코와 손주를 통해 살아갈 또 다른 이유를 갖게 된다. 다른 가족들은 이 일을 모르거나, 아니 알지만 외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쉬 알 수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떠나간 시간 동안 가족들 사이에도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야에코를 어느 정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바다와 강의 경계 사이 하구에 있는 이 쿠사바 마을에 우뚝 솟은 아귀산에서 흘러내리는 담수처럼 가족들은 야에코를 받아들이고, 야에코가 낳은 아이를 자신들의 가족으로 언젠가는 받아들이게 될 것이란 예감이 든다.

 

 사실, 이 소설의 이야기를 하려면 아직도 바다에서 일만 하는 아버지, 모든 못난 형제를 대신해 공무원으로 살아가는 형, 위험한 일을 일삼다 이제 조금씩 철이 들어가는 남동생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루야마 겐지의 이전 소설도 그랬듯이, 이 소설의 중심은 야에코이고, 야에코의 아이를 모두가 받아들이고, 살아가게끔 해주는 이 마을의 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때문에, 이 소설 또한 이전 소설의 기법과 같이 풍경을 중심으로 반복과 변주, 그리고 서사를 깨는 시각적 묘사들로 가득하다. 모든 묘사는 이전과 같이 아름답고, 어떤 면에선 조금 불명확했던 밤의 기별’(나중 작품으로 알고 있지만)에서의 물의 역할을 조금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느낌도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글을 끝까지 읽는데, 이전과 다르게 어려움을 느끼고, 이전과 다른 취기에 더해진 숙취까지 얻게 된 걸까?

 

 먼저는, 계속 비슷한 캐릭터의 반복적인 사용이다. ‘달에 울다.’에서 나온 야에코와 물의 가족에서의 야에코는 이름뿐 아니라, 성격, 분위기 등이 너무나 다 비슷하다. ‘밤의 기별에서는 비록 야에코 같은 중심적인 여자 인물은 등장하지 않지만, 야에코와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샘가의 소녀가 등장한다. , 모든 작품에서 아버지 혹은 조부가 전쟁과 관련한 인물로 나오는데, 성격이 거의 다 비슷하다. 이 캐릭터들의 중첩을 보는 내내 의아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나중엔 다소 지루했다.

 

 둘째는, 너무나 폐쇄적인 공간에 대한 묘사에 관한 집착이라고 말해야 할지, 아니면 너무나 한정적인 공간에 대한 묘사라고 해야 할지, 묘사하는 대상을 통해 전달되는 작가 자신의 불소통에 관한 강한 의지가 엿보인다. 작가는 전혀 자신이 있는 공간에서 벗어나려 하지를 않는다. 그곳이 물에 관련된 곳이든, 산에 관련된 곳이든,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을 뿐, 어딘가로 나오려 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같은 곳에 대한 같은 묘사를 반복하는 것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시적인 소설에 대한 호불호이다. 일단 이 말 자체에 내 개인의 너무 과한 이상의 투영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 말 자체가 어쩌면 모순일지도 모른다는 사실도 일정 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어찌 됐든, 마루야마 겐지는 분명 자신만의 독특한 문체로 어느 경지의 시적 소설에 다다른 사실만큼은 나뿐 아닌, 많은 사람들도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바이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정말 좋아하는지는 의구심이 든다. 예술에 대한 개똥철학으로 어느 정도 폼을 잡는 사람 아닌 이상, 이 책을 쉬 손에 잡기는 힘들 것이다.


 이제 내 개인적인 이야기로 돌아와, 이야기를 정리해보려 한다. 시적인 소설은 정말 가능할까? 마루야마 겐지가 보여준 시적 소설의 가능성에 대해 일단 나는 개인적으로 높이 평가하고 싶다. 하지만 그 지역적 한계성과 폐쇄성, 그리고 독자와 거리를 둔 소통에 관한 혐오 의지는 그의 시적 글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어떻게 매번 새로워지고, 매번 다른 글로 누군가의 감정을 훔칠 수 있겠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당연히 나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런데도 나의 시적인 소설에 관한 이상은, 시는 매번 새롭게 달라져야 하며, 그런 까닭으로 매번 새롭게 읽히고 해석되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조그맣게 읊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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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1-09-11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리뷰 당선 축하드립니다~

몽원 2021-09-19 20:25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달에 울다
마루야마 겐지 지음, 한성례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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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달에 울다 그 시적인 여운에 취해

 

 

 최근에 읽었던 그 어떤 소설보다 가슴속에 깊이 남는다. 진한 여운이 남아 지금 내가 사과꽃에 취한 건지, 빨갛게 물든 달에 취한 건지, 흐드러진 야에코의 젖무덤에 취한 건지, 잘 모르겠다. 이렇게 아직 정리되지 않고 취한 상태에서 품평을 하는 게 맞는 건지, 틀린 건지도 잘 모르겠다. 다만 그럼에도 무언가 주절거리고 싶은 이 기분은 분명, 이 취기 탓이라 여겨본다. 한동안 나는 글쓰기는 재미에 있다고 생각했다. 재밌지 않은 글이, 혹은 본인이 재밌게 쓰지 않는 글이, 무슨 글이겠냐는 간단한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본질이 거기에 없음은 내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재밌어도, 무언가 멈추는 지점에 대해 최근 생각했었다.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추는 지점, 그렇게 떨림을 가쁜 호흡을 잠깐 고르고, 진한 흥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지점에 대해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 모든 말들이 달에 울다.’를 보고서 허튼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나의 글쓰기는 시적인 무언가에 대한 추구였다. 시에 대한 집착이 무언가 서사로써 길게 이어져, 깊은 여운을 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관념이었다. 시로서 무언가 그것을 느껴보았지만, 소설에서 그걸 느낀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그런 글쓰기가 무언가 목도하게 되었다. 사실, ‘달에 울다이전에 나는 마루야마 겐지의 다른 소설 밤의 기별을 읽었다. 거기서도 충격을 받았다. 이건 뭐지? 어떻게 이런 시적인 소설이 있지? 무언가 쉬 범접할 수 없는 그의 기법에 충격적인 여운이 컸다. 그리고 아쉬웠다. 만약 내가 일본어를 제대로 알았다면, 더 각별하게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시적인 기법을 소설 속에 녹여 놓은 것일까?

 

 첫째는, 반복되는 풍경의 묘사이다. 사실, 풍경 묘사만큼 소설에서 애매하고, 마음에 와닿지 않는 문장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마루야마 겐지는 같은 풍경에 대해 여러 번 묘사함으로써, 그 풍경에 대해 집중하게 만든다. 이 소설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계속되는 병풍 속 노사에 대한 묘사, 사과꽃에 대한 묘사, 달에 대한 묘사, 그런데 기묘한 건 그 풍경의 묘사가 조금씩 다르게 변모한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전이하는 것처럼, 풍경은 조금씩, 조금씩, 차츰차츰 봄에서 여름, 여름에서 가을, 가을에서 겨울로 변해간다. 그 풍경처럼 마을의 풍경도, 주인공의 심리도, 야에코도 변해간다. 비단, 이 소설에서뿐 아니라, ‘밤의 기별에서도 마루야마 겐지의 풍경 묘사는 비슷한 묘사를 택했다.

 

둘째로, 그가 각별한 점은 각 풍경을 묘사할 때마다 쓰는 암시와 상징에 있다. 소설의 병풍 속 노사는 자신의 할아버지이면서도, 아버지 같으면서도, 결국 주인공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보여주고 있다. 저 산기슭에 숨겨진 주인공만 아는 사과밭은 주인공의 이상향이다. 그곳에서 언젠가 그는 야에코와 함께하고 싶어 하지만, 그곳은 결코 다다를 수도 없고, 그렇기에 주인공 가슴 속에서만 깊이 간직된 이상향, 몽유도원도이다. 달은 계절과 함께 그 빛깔을 같이 품어내고 있다. 그래서 마치 사과꽃처럼 은은한 향을 품어내서, 야에코와의 관계와도 묘하게 연관을 가지면서, 결국엔 진다. 야에코처럼 혹은 주인공 자신처럼, 그 시대의 마지막 상징인 촌장처럼.

 

 마지막으로, 그의 시적인 특별한 기법은 이 모든 것이 조금은 막연하다는 점이다. 어떤 것 하나 분명한 선이 없다. 마지막까지 그의 소설은 기승전결이 확실한 것이 없다. 그렇다고 불안정한 것도 아니다. 시적인 소설이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애초에 그 시적인 암시나 상징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점이 그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그 모든 불확실성이, 그리고 그 막연한 불안정함이 소설 전반의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사람을 홀리게 하고, 취하게 하는 것일까? 아직까진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나는 사과꽃 향을 단 한 번도 맡아보지 못했지만 사과꽃 향기에 취했고, 그 취한 달밤의 수많은 기억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알고 있다고 느끼면서 떨리는 이 기시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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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이 닦기

 

 

얘야! 자기 전엔 이빨을 꼭 닦아야 한단다

닦지를 않으면 나이 들어 틀니를 해야 해

자기 이빨이 아니면 얼마나 불편한지 아니?

엄마! 칫솔질할 때마다 토악질이 나와요

얼마나 괴로운지 이를 닦기가 힘들어요

얘야! 네가 나를 닮아서 위가 좀 약하구나

하지만 세상을 살려면 비위가 좀 있어야 한단다

뻔뻔하게 토악질보다 더한 발악질도 해야 해

엄마! 토악질을 하고 나면 잠이 다 달아나버려요

잠들지 못하는 새벽에 이는 바람이 너무 무서워요

얘야! 네가 나를 닮아서 예민하고 겁이 많구나

나도 네 아버지 뒤척이는 소리에도 흠칫 깨고

갑자기 네 걱정에 잠들지 못하기도 한단다

그런 날이면 선잠이라도 청해보렴

선잠을 자다 보면 언젠가 깊은 단잠을 자게 될 거야

엄마! 깊은 단잠을 자면 정말 아침이 달라지나요?

이빨을 닦아도 더 이상 토악질하지 않게 될까요?

얘야! 네가 나를 닮아서 너무 잔걱정이 많구나

우선 오늘 하루라도 이빨을 닦고 자려무나

그다음 일은 늘 그다음에 생각해야 해

엄마! 엄마는 너무 강하고 억척스러워요

저는 엄마처럼 넘어오는 슬픔을 쉬 삼킬 수 없어요

얘야! 너도 언젠가 그렇게 될 거란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내 귀여운 아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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헛걸음

 

 

비 내리는 늦은 밤

빌린 책을 반납하러

동네 큰 도서관으로

발걸음을 향한다

다 와서 도서 반납기에

반납하려는 찰나

아차 싶은 게

동네 작은 도서관에서

빌렸다는 사실이 기억난다

내가 그럼 그렇지

허무한 마음에 쿵 내디딘

발걸음이 웅덩이에 부딪혀

바짓단이 흠뻑 젖는다

어기적 걸음으로

동네 작은 도서관에 왔는데

여지없이 문은 닫혔고

도서 반납기도 없다

그러니 동네 작은 도서관이지

침 한 번 퉤 뱉고서

씁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혹시 그대는 아시는지

헛걸음 덕에 맛본

봄비로 다 씻겨 내린 밤공기의

상쾌함과 호젓한 그 기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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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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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아버지의 신화화에 관해

 


 박범신 작가의 작품은 은교’, ‘소소한 풍경이후로 이번에 읽은 소금까지 총 세 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 전에 은교소소한 풍경에서 나이를 뛰어넘는 감성과 몽환적 풍경에 감동을 받은 탓에 조금 기대를 했다. 다만, 제목이 약간 마음이 걸렸다. 무언가 진부하고 올드한 감성을 풍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전철에서 1시간 동안 약 60페이지를 읽는데, 너무 재미가 없었다. 시대가 갑자기 거꾸로 역행하는 느낌이었다. 사실, 300페이지 분량의 장편을 읽을 때, 서두가 너무 장황하면 읽기가 어려워진다. 물론, 어떤 절실한 화두가 있어서 선택한 책이라면 다를 수 있다. 그렇지만 그냥 한 번 읽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손에 잡은 소설이 초반에 지루하다면, 누가 끝까지 읽겠는가? 그 때문에, 잠시 시간을 두고서, 독한 마음으로 겨우 읽을 수 있었다. 다행히 중간부터는 나름대로 이야기 전체적인 내용이 들어오긴 했다.

 

 아버지라는 이름을 어떻게 써 내려가야 할까?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 잠시 이야기하고 싶다. 우리네 소설  대부분은 아버지란 이름에 신화가 덧씌워 있다. 폭군, 책임, 고생, 억압 등등, 아버지란 이름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단어를 연상시킨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는 전쟁 이후 베트남전 참가, 군부 독재 시대, 중동 파견 사업 등으로 아버지의 이름들이 겹쳐진다.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대를 고스란히 살아오셨고, 그 덕으로 나는 대학을 마치고, 나름의 삶을 살고 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특별한 것은 내가 신학대를 가겠다는 이유로 가출을 했을 때, 아버지께서 내게 쓴 17장의 편지가 있다는 점이다. 자신도 베트남전에서 군종이었고, 제대 후 바로 결혼하여, 사우디아라비아에 3번이나 다녀온 아버지의 절절한 삶을 나는 아버지의 편지를 통해 접했고, 그로 인해 아버지를 신화화했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미묘한 심리가 그 저변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한참이 지나고서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신화화는 아들이거나 딸 자신의 신화화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 아버지의 신화화를 통해 아들인 나 또한 신화를 대물림하게 된다는 사실을, 아니 그런 심리를 갖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잘 몰랐다. 물론, 이런 심리가 나쁜 건 아니다. 자신을 삶을 긍정하는 데 있어서, 가족의 영향과 힘이 가장 중요한 자산인 건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라고 내 개인적으로도 생각한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신화는 지속되어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존재해야 하고,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신화를 대물림한, 그 커다란 윤회와 같은 고리를 지속해야만 하는 걸까?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주체로서의 나 자신을 확립해서는 안 되는 것일까? 이 소설은 일단, 이러한 기본적인 물음 속에서 시작되었고, 동시에 이러한 예로 선명우란 인물을 등장시킨다.

 

 세 딸의 아버지이자, 한 집안의 가장으로 일생 한 마디 불평 없이 살아온 남자가 아주 우연한 사고로 인해 집을 가출하게 된다. 물론, 거기에 췌장암 말기라는 전조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상황이 등장하기는 한다. 하지만 중요한 건 뜻하지 않은 사고로 전신마비가 된 한 인간을 통해 잊었던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는 사실이다. 언뜻 보면, 이게 사실 무슨 말도 안 되는 설정인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사고 당시 주인공이 본 소금에 대한 인상이 바로 자기 아버지와의 연결 매개로 이어진다는 사실이고, 두 번째로 더 중요한 건 이를 통해 그가 전신마비가 된 김승민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살아가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선명우가 아닌, ‘김승민이 된 것일까? 첫째는, ‘천명우로서의 그의 삶은 너무 고달팠다. 세상 모든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책임이란 미명에 묶여, 자신이 아닌, 아버지로서만 존재해야 했다. 하지만 김승민의 삶은 달랐다. 그것은 유랑의 삶이었고, 유랑엔 지금껏 그가 맛보지 못한 자유가 있었다. 그때까지 가족을 위해 오직 회사에서 생산성이란 이름 아래 묶여, 그 구조를 평생 못 벗어날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냥 단 한 번의 우연한 사건으로 인해 그는 그 구조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진짜 자신을 찾고, 동시에 전혀 혈연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진짜 가족을 만들 수 있었다. 아주 좋은 설정이고, 좋은 이야기이다. 하지만 무언가 아쉬움이 남는다.

 

 먼저, 원론적으로 그 이전의 가족에 대한 선명우의 책임이다. 그의 이탈로 인해 한 가족은 처참하게 무너지게 된다. 여기에 대해 선명우김승민이 됨으로써 책임 회피를 해버린다. 너무 극단적인 감이 없지 않아 있다. 두 번째는 이 소설의 전반적인 내용이 너무 진부하다. 아버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선명우를 강조한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거기에 들어가는 설정들이 너무 길고, 그 설정들이 전부 이제까지 우리 한국 소설에서 오르내린 이야기뿐이다. 게다가 얼마나 중언부언이 많은지, 읽다가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났다. 마지막으로 가장 아쉬웠던 건, 결국 이 소설도 구구절절한 이야기들을 나열함으로써, 아버지에 관한 신화를 더욱 부각시켰다는 점이다. 조금 더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아버지를 바라봄으로써,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한숨으로 달래며, 이 소설에 대한 평을 끝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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