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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엘리 / 2019년 5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숨(Exhalation) - 우주적이기엔 너무 인간적인 숨에 관해
처음 이 책에 표제를 보고 떠올린 건, ‘Exhalation’이 숨이라고 표현하기엔 너무 과학적인 단어라는 인상이었다. 실제로 표제작인 ‘숨’을 보니, 과학적이면서 동시에 매우 문학적인 상징적 수단으로 쓰인 인상을 받았다. 일단, ‘숨’이란 단어가 왜 내게는 너무 동양적인 느낌인 걸까? 우리에겐 왜 과학적이면서 인간적인 ‘숨’을 대신할 수 있는 단어가 없을까? 실제로, 영어 사전에서 ‘Exhalation’은 방출이란 의미이거나 날숨이란 의미로 나와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Exhalation’은 엔트로피 법칙에서의 에너지 보존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참 해석하기 난해한 단어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전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대한 어떤 좋은 기억이 덧붙여진 까닭일까? 정말 오랜만에 책을 구입했다. 특히, 문학책은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첫 작품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부터 매우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마치 아라비안나이트를 읽는 듯했다. 거기에 ‘세월에 문’이란 판타지가 더해져,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는 설정이 흥을 더욱 북돋웠다. 어쩌면 이 소설집의 마지막인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까지 작가가 줄곧 내세우고 있는 관점이 이 소설에 나와 있지 않나 생각한다.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설사, 다차원의 세계의 숱한 여러 명의 내가 있더라도, 현재의 내 자신을 바꿀 수 있는 그 무엇도 없다. 다만, 과거는 현재를 더 나아가기 위한 수단의 하나로 뒤돌아보고, 반성할 수 있는 하나의 기회이다. 물론, 작가가 이야기하는 바가 다를 수 있겠지만, 이런 기본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쓰인 글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같은 맥락에서 읽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끈 글은 역시 ‘숨’이었다. 표제부터 고민하게 만든 글이었기에 관심도 있었지만, 거기에 뇌에 관한 이야기라 관심이 더해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어려운 글이었다. 일단, 주인공이 자신의 뇌를 해부하면서, 뇌 운동의 진실을 공기 입자의 흐름으로 분석하는 장면부터 쉽지 않았다. 거기서 우주의 에너지 이야기와 시간의 상대성 이야기까지, 무언가 과학적인 설명을 하는 것 같은데,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과학에 관해 무지해 이 책을 읽고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엔트로피 법칙’까지 읽었다. 그래서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맥락은 마지막 부분이다. 이런 과학적 진실과 상관없는 다양한 인간들의 모습에 관해, 작가가 긍정한다는 점이다.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내가 구상하고 있는 소설이 사이버에 관한 소설이 있어서, 관심이 갔다. 다만 내가 구상한 것과는 조금 다른, 실제 가상의 인공 지능에 관한 인권, 사랑에 관한 권리까지 다루어 내심 놀라기는 했다. 이런 세상이 과연 올 수 있을까? 아바타에게 실제 사랑을 주고, 애완동물처럼 자신의 감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데이시의 기계식 자동 보모’는 거의 마지막 라이어널 데이시의 고백에 모든 이 글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본다. 아버지의 사랑을 입증하기 위해 기계식 자동 보모의 유용성에 모든 인생을 걸었다는 그 한마디.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은 글이 교차적으로 구성된 점도 흥미로웠지만, 그 교차점이 제목의 두 지점을 정확하게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재밌었다. 리멤이라는 기계를 통해 실제로 사실적 진실에 다가갔을 때 인간이 느끼는 곤혹감에 대해 생생하게 다루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선교사를 통해 글을 배운 지징기가 씨족의 서기가 되면서 사실적 진실과 감정적 진실 사이에 갈등하는 장면은 이 글이 짚어내고자 하는 요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유럽인들의 사고, 정확한 기록과 진실로 이루어진 사고는 그들의 언어로 ‘보우’이다. 하지만 그들에겐 또 다른 진실이란 언어의 개념이 존재한다. 모두의 감정을 아우르고 선택하는 ‘미미’라는 진실이다. 여기엔 어쩌면 약간의 과장도 존재하고 허세도 존재할 수 있다. 이야기꾼이 실제 이야기를 매번 똑같이 전달하지 않고, 때론 더 우습게, 혹은 더 비장하게 전달하듯이, 그날그날의 상태에 따라 진실은 변하는 법이다. 하지만 이 상대적 진실은 그날의 모든 관객들을 향한 최선이다. 어떤 진실이 더 유효한 진실일까?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진실이란 엄격한 잣대이거나 절대일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비단 나만의 생각일까?
‘거대한 침묵’은 페르미의 역설을 이야기하지만, 지적 생명체의 침략을 두려워한 나머지 모든 외계의 종족들이 침묵을 지킨다는 역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지만, 실상은 약간의 찡한 울림이 있다. 외계보다 훨씬 더 외계적인 앵무새의 마지막 인사가 ‘잘 있어. 사랑해.’인 까닭이다.
‘옴팔로스’, 바른 표기법은 ‘옴파로스’이다. 여하튼 고대 그리스어로 ‘배꼽’이란 의미이다. 그래서인지, 우주의 중심 혹은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어떤 의미로 보면, 고전 물리학과 현대 물리학의 차이를 의미하는 것 같다. 뉴턴이 바라본 지구 중심적 세계에서 코페르니쿠스가 바라본 우주 중심의 세계로 전환이 가져다준 변화에 관해 말하는 것 같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 그저 우주의 한낱 부산물일 뿐이다. 존재 이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신에게 고뇌 끝에 기도한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질문을 탐구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몇 년 전, 모임에서 합평한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내 품평을 찾아보았다. 깜짝 놀랐다. 스크롤의 압박이 장난이 아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했던 것은 그때 품평은 이렇게 여러 작품을 하지도 않고 ‘지옥은 신의 부재’라는 단 한 작품이었다. 자세히 뜯어보니, 두 장까지는 전체적인 내용의 줄거리였고, 나머지 약 세 장이 내 인생의 썰을 풀어 놓았다. 얼마나 낯부끄럽던지. 물론, 좋은 비평은 개인의 감정과 감상이 잘 버물리야 한다. 하지만 그땐 너무 과했다. 지금의 이 글은 어떤지 잘 모르겠다. 그 반대가 아닌가 싶어, 조금 낯설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은 비슷하다. 이 작품들이 하나하나 대단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따름이다. 전혀 다른 상상력과 또 거기에 나름의 건실한 자기 철학이 존재하고 있다. 인생의 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살 것인지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그런 건실한 철학이다. 우주적이기보다는 너무나 인간적인 SF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