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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없는 나라
양 얼처 나무.크리스틴 매튜 지음, 강수정 옮김 / 김영사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모계사회라고 들어보셨나요?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을 보면, 오랜 옛날 군혼제에서는 혈통이 어머니 편에 따라서만 확정될 수 있었으며, 따라서 모계만이 인정되는 모계제 사회가 정립되었는데, 이 때 여성은 경제를 장악하게 되었고, 정착생활로 이어져 가내 경제가 출연하자 여성의 역할은 더욱 증대되었다고 합니다. '모계'사회이면서 '모권'사회가 역사적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건 아주 오래된 이야기, 호랑이가 담배를 피기도 전의 일이라, 오직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상에, 그것도 바로 지금 이 시간, '모계사회'가 존재한다는 것은 호기심을 넘어 충격에 가깝습니다. 중국 윈난성 오지 루구호 주변의 모쒀족 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모쒀족 출신 양얼처나무(杨二车娜姆)의 이야기를 인류학자 크리스틴 매튜가 엮은 《아버지가 없는 나라》는 지상 유일의 모계사회의 생생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인류학자가 쓴 글이라 학술적인 무미건조한 글일 거라는 선입견이 들 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결혼도 이혼도 없고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딸이 집안의 모든 것을 물려받는 모쒀족의 양얼처나무의 이야기는 팩트(fact)이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게다가 번역서임에도 전혀 번역서처럼 느껴지지 않는 매끄러운 번역이 마치 원래 우리 글을 읽는 듯 자연스럽습니다.
모쒀족은 결혼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결혼이라는 제도를 가정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는 유일한 민족입니다. 중국 혁명 이후에 정식으로 결혼하여 핵가족을 이룬 가정이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소수에 불과합니다. 할머니와 할머니의 형제, 어머니, 자매, 외삼촌, 딸과 아들이 한 가족을 이루고 삽니다. 비록 남편과 부인과 아버지는 없어도 그 자리에 형재 자매와 어머니, 외삼촌이 있습니다. 그들은 분가하지 않으며, 집안의 재산을 공동으로 보유하고 온 가족의 이익을 위해 공평하게 사용합니다. 자녀들이 어머니와 외삼촌의 자리를 물려받으면서 재산도 대를 잇기 때문에 상속의 개념도 무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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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가정을 이룰 수 있는지 궁금하시죠? 그들의 성관계는 상식적인 기준으로 볼 때 난잡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성인이 된 모쒀족 처녀는 꽃방이라는 자신만의 방을 가질 수 있습니다. 남자는 성인이 되어도 자신의 방조차 없습니다. 밤이 되면 남자가 여자의 방을 찾아오고 그 남자가 마음에 들면 여자는 문을 열어 줍니다. 이를 주혼(走婚)이라 부르지만, 엄격한 의미에서 혼(婚)이 아닙니다. 모쒀족은 이를 '세세'라 부릅니다. 남자가 여자를 찾아가고, 혼인서약이나 재산 분배, 자녀 양육같은 문제는 거론되지 않으며, 자신을 찾아온 남자가 자신에게만 충실할 것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들도 인간이니 비록 질투와 상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애인에게서 버림받은 사실을 떠벌리는 것은 자신의 체면을 깎아내리는 일로 치부됩니다.
모쒀족 양얼처나무는 열 세살에 성년식을 치르고 애인을 맞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어머니의 뒤를 이어 집안의 가장이 되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에 지역 문화국에서 주최하는 노래경연대회에 참석하게 되고 거기서 인정을 받아 베이징 본선에서도 1등을 차지합니다. 그때 바깥 세상을 보고 자극을 받아 무작정 도시로 도망쳐 나옵니다. 모쒀족의 이야기도 그렇지만 그녀의 모쒀족 탈출기(?)는 소설 이상의 재미가 있습니다.
모쒀족의 이야기는 호기심을 넘어 참 아름답습니다. 어머니의 호수라는 뜻의 루구호처럼 평온하고 따뜻합니다. 그들이 사는 모습은 보기에 따라 이상적으로까지 보입니다. 모쒀족과 양얼처나무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모계사회와 부계사회, 과거와 현재,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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