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한 부모들은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
신의진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조기교육의 종주국인 미국, 미국 덴버에서 가장 좋다는 어느 유치원에는 유아용 교재나 교구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흔한 장난감 기차조차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로지 있는 것이라고는 넓은 풀밭과 진흑, 노끈, 타이어 따위입니다. 선생님의 말에 따르면 그 아이들은 원하는 것이 있으면 스스로 연구하여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이미 만들어져 있는 장난감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떨어뜨리므로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현명한 부모들은 아이를 느리게 키운다》의 저자 신의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아이에게 무얼 가르칠까 고민하는 엄마들에게 그 유치원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곳에 가면 아이들을 왜 느리게 키워야 하는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라 말합니다.

제목만으로 봐서는 조기교육을 비판하는 대신 무언가 획기적인 대안이 있을 법한데 그런 건 없습니다. 저자는 소아정신과 교수이자 신촌 세브란스병원 소아정신과 전문의이기도 하지만 이 책을 쓸 당시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4학년이 된 두 아들의 엄마였습니다. 의사이기 이전에 두 아이의 엄마로서 경험한 그의 육아 경험담입니다.

제목이 자극적입니다. 책 표지를 보니 '20만 독자가 인정한 0~6세 부모들의 필독서'라고 적혀 있습니다. 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문구도 있습니다. '욕 먹을 각오를 단단히 하고 쓴 조기교육 비판서'.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조기교육을 비판하고 오히려 아이를 느리게 키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느리게 키운다는 것은 아이에게 억지로 무언가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떤 지식을 가르치려 애쓰기 전에 먼저 아이의 '자기 정체성(self-identity)'를 확립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지금보다 더 복합적이고 불확실한 위험 사회로 이행되는 만큼 '공부를 이만큼 하면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는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식의 근대적 발상의 룰이 완전히 사라진다고 합니다. 사회가 불확실할수록,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발현할 기회가 많이 주어질수록, 그리고 개인의 선택의 폭이 다각화될수록 가장 필요한 것이 '자기 정체성'이라고 말합니다.

저자는 '나는 내 아이들이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으로 자라나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억지로 급하게 가려하지 말고 아이가 비록 실수를 하더라도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되돌아 보며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가도록 지도해 주라고 말합니다. 자기 정체성이란 누가 주입하려 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아이의 성장 곡선은 꾸준히 발전하는 사선형이 아니라 어느 기간 동안 정체되었다가 갑자기 발전하는 계단식 발전형이니 조금 늦더라도 보챌 필요가 없다고 말합니다.

이 정도가 이 책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내용입니다. 이것을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의 경험담을 통해 설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무언가 체계적인 이론이나 대안을 기대했다면 이 책이 다소 기대 이하일 수도 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어도, 그럼 어떻게 해야하지,하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저자 말마따나 느리게 키우기는 결코 무심한 부모들이나 하는 육아법이 아니라, 오히려 아이를 정말 잘 이해하고 있는 현명한 부모들만이 할 수 있는 아주 어려운 육아법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일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육아에도 연습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실전입니다. 한두 권의 책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어찌됐든 부딪치며 보정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 책이 해답을 줄 수는 없지만 부모로서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한번쯤 되돌아보는 계기를 줄 수는 있을 겁니다.

육아는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작업입니다. 인류 최고의 지혜가 필요한 영역입니다. 개인사로 보더라도 인생 최대의 작업입니다. 아이가 없다면 몰라도 아이가 있는 이상 육아의 결과는 부모의 행·불행을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것입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여러 책을 읽고 실천하고 반성하는 과정이 특별한 부모의 유별남이 아니라 모든 부모들의 필수 과정이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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