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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공부의 즐거움 - 고전에서 누리는 행복한 소요유
이상국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시인 김춘수는 ‘도덕경 비밀클럽’의 핵심 멤버입니다. 이 비밀클럽에는 시인 박남수, 유치환, 서정주, 유하를 비롯하여 《토지》의 박경리까지 모두 멤버입니다. 이들은 모두 노자 클래스에서 비밀수업을 받았습니다. 아직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 비밀클럽의 전모를 밝히기 위해 좀 더 주도면밀한 특단의 수사가 필요합니다.
이 해괴한 주장의 주인공은 《옛 공부의 즐거움》의 저자 이상국입니다. 있지도 않은 ‘비밀클럽’을 들먹이다 못해 특단의 수사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그 황당함에 배를 잡고 쓰러질 뻔 했습니다. 그러나 저자 이상국의 예리한 눈에 포착된 증거가 그의 주장을 탄탄히(!)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먼저 핵심 멤버인 김춘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김춘수 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꽃〉입니다. 그러나 이는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를 베끼거나 패러디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도덕경의 첫머리는 이러합니다.
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無名天地之始 有名萬物之母 어려운 한자는 없으나 해석하기는 만만치 않습니다. 몇 년 전 도올의 노자 강의가 ‘개그쇼’일 뿐이라고 맞장 뜬 평범한 아줌마 이경숙과 도올의 논쟁이 아니더라도, 도덕경은 알듯 말듯한 말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러나 ‘도덕경 비밀클럽’ 핵심 멤버인 김춘수는 시로서 절묘하게 그 뜻을 풀이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 無名
그는 다만 / 한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 天地之始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 有名
그는 나에게로 와서 / 꽃이 되었다 → 萬物之母
세상은 이름 없이 시작되었지만, 이름이 세상을 낳았다는 이 오묘한 뜻을 김춘수는 현대어로 완벽하게 재현해 냈습니다.
시인 박남수도 이 클럽의 평범한 멤버 이상의 간부급입니다.
그의 시 〈새2〉와〈새3〉을 연속으로 봅시다.
새는 울어 / 뜻을 만들지 않고, / 지어서 교태로 / 사랑을 가식하지 않는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 그 순수를 겨냥하지만 //
매양 쏘는 것은 /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새의 울음이 아름다운 건, 그 뜻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새가 예쁜 건 교태를 지어 사랑을 가식하기 때문이 아니다. 저절로 아름답고 예쁘다. 아, 저 새 속에 아름답고 예쁜 무엇이 있겠구나. 포수는 그걸 붙들려고 총을 쏘지만 피에 젖은 새만을 손에 쥘 뿐이다.
아마 박남수는 도덕경의 이 구절에 심히 감동을 받았나 봅니다.
天下皆知美之爲美,斯惡已
天下皆知善之爲善,斯不善已천하가 모두 아릅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위미爲美(꾸며진 아름다움)이며, 이것은 꼴사납다(나쁘다).
천하가 모두 선하다고 알고 있는 것은 위미爲美(꾸며진 선)이며, 이것은 선이 아니다.
그 외에도, 유치환의 〈바위〉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을, 서정주의 〈꽃밭의 독백〉은 '천문개합天門開闔 능무자호能無雌乎를, 박경리의 〈대추와 꿀벌〉, 유하의 〈사랑의 지옥〉은 총욕약경寵辱若驚 귀대환약신貴大患若身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이상국의 《옛공부의 즐거움》을 읽는 즐거움을 전해드리기 위해 책 내용 중 일부를 인용했습니다. 옛공부가 어찌 즐거울 수 있는지, 그 실례를 보여드리지 않고서는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제 즐거움을 전할 길이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문장에는 고문도 없고 금문도 없다던 연암의 말이, 비록 고문에 천착하지 말라는 뜻이지만, 저는 문자 그대로 문장에는 옛글이나 지금의 글이나 구분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옛문장이든 지금의 문장이든 결국은 그것을 읽는 사람의 몫입니다. 이 책의 저자와 같이 옛문장과 옛사람 속에서 무언가를 느끼고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이 단순한 즐거움이든 인생의 깨달음이든, 그 무엇이든.
이 책은, 옛공부든 무엇이든 자신의 눈으로 진실되게 바라볼 때에 진정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누구에게나 옛공부가 즐거울 수는 없습니다. 이상국이 옛공부가 즐겁다고 말한 것은, 옛공부의 맛을 알았기 때문이고, 그 맛을 알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노력과 지식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즐거움도 밑천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추사체가 있기 전에 옛서체의 원형을 찾기 위한 추사의 노력이 먼저 있었듯이 말입니다.
저자로부터 공부하는 자세, 그리고 즐거이 세상 사는 법을 한 수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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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새겨두고 싶은 말
지나간 일은 바꿀 수 없음을 깨달았지만 앞으로 올 일은 바로 잡을 수 있음을 알았다. 실로 길을 헤매되 그 아직 멀지 않았나니, 지금은 옳으나 어제는 틀렸음을 깨달았다. - 도연명 귀거래사
동양화는 풍경을 그리지 않는다. 풍경을 바라보는 눈, 그 시선이 자아내는 깊은 마음의 여정을 차곡차곡 담아둔다.
연암의 아들 박종채는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는 항상 문장에는 고문도 없고 금문도 없다고 하시면서, 한유나 구양수의 글을 모방하고 반고나 사마천의 뜻을 본떴다 해서 우쭐거리거나 으스대면서 스스로 대단하게 여기고서 지금 사람을 하찬게 볼 게 아니라 오직 스스로 자신의 그을 써야할 뿐이라고 하셨다.”
군자가 공부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공부를 통해 그칠 줄 아는 법(知止)을 터득하기 때문이다. - 화담 서경덕
추사는 청나라에 가서 단단히 배우고 왔다. 깨진 비석을 찾아다니는 이유는 바로 이 글씨의 ‘원형’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었다. 추사체라고 하는 글씨는 바로 이 고격과 개성이 만난 극미의 경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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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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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이경숙이 해석한 도덕경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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