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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만 볼 수 있다면 - 헬렌 켈러 자서전
헬렌 켈러 지음, 이창식.박에스더 옮김 / 산해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새벽 세시가 넘어서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장마철이니 시도 때도 없이 비가 오는 거겠죠. 그러나 장맛비 치고는 좀 약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내 기억 속의 장마는 몇 날 몇 일이고 계속되어 언제 그칠지 알 수 없는 지리한 비의 연속이었습니다. 장마철인데도 우산 없이 출퇴근하는 경우가 많은, 이런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얘기가 샜습니다. 새벽에 내리는 빗소리에 잠시 마음을 빼앗겼나 봅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소리만으로도 충분히 느껴집니다. 비로 인해 특별한 아픔을 겪지 않은 이상, 누구든 빗소리를 들으면 상념에 빠지지 않나 생각합니다. 편안함을 느끼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새벽 첫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이 꼭두새벽에 첫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아마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생각과 목적으로 그 차를 타고 있을 것입니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립니다. 아마도 조간 신문을 배달하러 온 것이겠죠. 매일같이 신문을 가져오는 얼굴 없는 저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얘기가 계속 새고 있습니다. 나의 오감이 조금씩 살아나는 느낌입니다. 이제 막 덮은 책 때문인 것 같네요.
헬렌켈러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위대한 사람의 이야기를 읽고 나면 늘 두 가지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러기에 좀 더 분발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번 역시 예외가 아닙니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말 할 수 없었던, 그러나 이 모든 것을 극복하여 삼중고(三重苦)의 성녀’라고 추앙받는 헬렌 켈러의 자서전을 읽었습니다. 헬렌 켈러에 대해서는 굳이 부연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합니다.
이 자서전은 헬렌 켈러가 스물 셋의 나이, 그러니까 래드클리프 대학에 재학중일 때 쓴 글입니다. 시한부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보통 사람들 같으면 스물 셋에 무슨 자서전이냐고 하겠죠. 참고로 헬렌켈러는 1880년에 태어나 1968년에 저세상으로 떠났으니 여든 여덟까지 장수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한창 나이인 스물 셋에 자서전을 썼습니다.
부끄럽게도 그녀는 스물 셋의 나이에 제가 앞으로 수십 년을 더 살아도 느끼지 못할 인생의 가치를 깨달았습니다. 역자는 후기에서 이 글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천년을 살 듯 하루를 산 그녀의 빛나는 삶 앞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합니다. 저 역시 역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살다간 이에 대해 독서노트를 쓴답시고 어설프게 평評한다는 건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저에게 헬렌 켈러는 너무나 친숙하여 그러나 정작 아무 것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던 존재였습니다. 장애를 극복한 의지의 인간, 그 정도로밖에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스스로 설 수 있도록 도와 준 설리번 선생에 대한 일화 - 아마도 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렇죠, 학교에서 배웠으니 너무나 친숙한 것일테고, 역시 학교에서 배웠으므로 딱 그 정도까지밖에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하는 이 정도의 문장으로 그녀가 겪은 고통과 인내의 시간을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제 아무리 셰익스피어라고 할지라도 그녀의 삶의 무게를 표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로지 당사자인 그녀만에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글을 읽다가 보면 가끔 그녀가 안 보이고 안 들린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그녀의 글 곳곳에 '듣는다' '본다' '읽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그녀의 손을 통해 느낀 촉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오로지 후각과 촉각을 통해 본 세상이 어찌 눈과 귀로 보고 들은 세상보다 더 실감날까요.
그녀의 글을 읽으면 가끔 소름 돋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암흑 속에서, 글과 말을 익혀가는 과정, 문학과 외국어를 알아가는 과정, 잠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상상해보지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이 상황은 전전율율戰戰慄慄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습니다. 감동이 아니라 두려움입니다.
헬렌 켈러에게서는 무서울 정도의 전율을 느꼈다면, 감동은 정작 설리번 선생으로부터 느꼈습니다. 헬렌 켈러의 자서전은 설리번 선생의 자서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녀가 '읽었다' '들었다'라고 할 때 그 옆에는 늘 설리번 선생이 있었습니다. 헬렌 켈러의 손바닥 위에 설리번 선생이 쓰는 그 언어로 세상의 반을 알았던 것입니다. 설리번 선생은 헬렌 켈러의 분신이자 그림자였습니다.
"날마다 선생님은 나와 함께 수업을 듣고 한없는 인내로 내 손에 선생님들이 말하는 내용을 모두 써주셨다. 공부하는 데 새로운 낱말이 나오면 일일이 사전을 찾아 설명해주셨고 점자로 되어 있지 않은 책이며 노트들은 몇 번이고 거듭 읽고 또 읽어주셨다. 그 일이 얼마나 지루할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p.167)
'읽고 또 읽어주셨다'는 것도 실제로 소리나게 읽은 것이 아니라 헬렌켈러의 손에 써주었다는 말입니다. 이 자서전만으로는 설리번 선생이 언제까지 헬렌 켈러의 곁에 있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곱 살에 처음 헬렌 켈러를 만나 이 자서전이 끝나는 스물 세 살 때까지만 하더라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그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설리번 선생이야말로 성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물 셋의 자서전 마지막 구절은 이러합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나 이제 그 제약이 드리운 그늘 아래서도 나는 내게 주어진 삶의 길을 평안하고 행복하게 걸을 수 있다."(p.252)
어려운 단어가 없으니 문장을 이해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저 말뜻을 깨닫기까지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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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렌 켈러의 스승 - 앤 맨스 필드 설리반에 대해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설리번 선생에 대한 자료가 참 빈약하네요.
그러나 어떤 글을 보니 설리번 선생이 헬렌 켈러의 곁을 48년 동안이나 지켰다고 합니다. 그녀도 시각 장애로 절망하여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고 하네요.
비록 기독교적 색채가 짙은 글이지만 설리번 선생의 자료 중에서 가장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어 여기에 옮겨 싣습니다.
미국 보스턴의 한 정신병원에 불쌍한 소녀가 수용되어 있었다.
소녀는 갑자기 사람들을 공격하는 정서불안 증세를 보였다. 의사는 소녀에게 '회복 불가능'이란 판결을 내렸다.
'작은 애니'로 불린 이 소녀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부모와의 연락도 완전히 단절되어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이 병원에 한 늙은 간호사가 있었다. 이 늙은 간호사는 매일 과자를 들고 애니를 찾아와 위로해 주었다.
"애니야, 나는 너를 정말 사랑한단다." 늙은 간호사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그녀를 위해 6개월 동안 한결같이 사랑을 쏟았다.
그때부터 애니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며 밝은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그 후 정상적인 몸으로 돌아왔다.
바로 이 여인이 설리반이다.
어느날 설리번은 신문기사를 읽고 중대한 결심을 하였다. "보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는 삼중고의 헬렌켈러라는 어린이를 돌볼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기사였다.
설리번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이 어린아이의 평생의 스승이 되었다.
설리번은 늙은 간호사가 자신에게 베푼 사랑을 헬렌켈러에게 쏟았다. 설리번은 헬렌 켈러를 48년간 개인지도한 여성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기 때 어머니가 죽고,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에게 버림받았으며 하나뿐인 동생도 병사하였다. 그러자 안질이 악화하여 실명하였다. 두번 자살을 기도하였으나 구명되었다.
그러나 설리번은 훌륭한 지도자를 만났다. 바로 바아바라 목사였다. 목사는 절망적인 설리번에게 십자가를 가르쳤다. 십자가를 믿을 때 과거에는 종지부가 찍히고 사랑과 소망으로 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새롭게 전개되는 구원의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설리번은 보스톤 파킨스 맹학교에 들어가 6년간의 분투 끝에 최우등생으로 졸업하고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 수술을 하여 성공하였다.
설리번은 맹농아 3중고의 짐승 같은 소녀 헬렌 켈러의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원하여 싸우기를 48년간, 모든 고통받는 인류에게 소망의 등불이 된 위인 헬렌 켈러를 길러낸 것이다.
헬렌 켈러는 학습과 생활지도만 아니라 설리번 선생의 신앙적 감화가 컸다고 한다.
필라델피아 템풀 대학이 헬렌 켈러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할 때 설리번에게도 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그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이룩한 그 어느 학위보다도 고귀한 학위였다.
설리반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자기 자신의 필요만큼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할 때 사랑은 시작된다. ”는 말을 하고 자기자신부터 실천에 옮긴 사람이다.
설리반은 자신의 일생을 마치는 날까지 48년간이란 긴 세월을 헬렌 켈러에게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