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유시민을 만나다》 독서노트를 보냈습니다.
이런 글을 쓸 때면 늘 고민이 됩니다. 사회적, 정치적 이슈를 가진 글은 부득이하게 찬반이 극명하게 갈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른 아침에 바로 댓글을 달아 주신 박희혁님과 문동렬님의 글에서도 그 차이가 드러나구요.
어떤 분은 이 글로 인해 더 이상 독서노트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수신거부 메일을 보내주셨습니다. 제가 유시민에 대해 아직 모른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대개의 독자들이 그러하듯 제 글을 선별적으로 읽거나, 아예 읽지 않거나, 가끔 생각나면 한 번 읽어보십니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수신 거부 또는 스팸 필터에 넣어버리기도 하구요. 당연한 반응이라 생각합니다.
이 즈음 해서, 저 스스로 글쓰기의 원칙을 정립해야 할 필요를 느낍니다. 독자들의 호불호의 반응에 따라 애초의 제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래야 처음 제가 원했던 지속적인 글쓰기 - 이를 통한 지식공유가 가능하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제 글은 부득이하게 설익은 상태입니다. 아직 지식과 경험과 사고의 깊이가 깊지 않은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날마다 책을 읽으며 그때그때 리뷰하는 글의 성격상 철저한 자료 조사나 연구 없이 하나의 텍스트(책)에 근거해서 글을 써야하는 상황이 두 번째 이유입니다. 첫 번째 이유가 핵심이죠.
마음 같아서는 강준만 교수나 정혜신 박사의 글처럼 많은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습니다만, 조사만 한다고 해서 좋은 글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기본적인 그릇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제 그릇이 아직 그 정도가 되지 못합니다. 적어도 앞으로 10년 동안은 쉬지 않고 책을 읽으며 '이 짓'을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바로 이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제 의견은, 한 사람이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느낀 중간 결과물일 뿐입니다. 그러니 저 스스로도 늘 불만족스럽고 부끄럽습니다. 알면서도, 이것이 제가 쉬지 않고 세상을 알아가는 최선의 방법이며, 함께 공유하는 것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적, 집단(또는 계급적) 이해 관계를 표현할 경우 술자리에서 주먹질까지 오가는 싸움이 되기도 합니다. 가치관이 분명할수록 어떤 의견에 대한 호불호의 감정이 격해질 수 있습니다. 당연한 것이겠죠.
그렇다고 해서, 제 생각이 설익었다고 해서, 책을 읽고 줄거리만 정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 역시 정치적인 의사를 지닌 호모 폴리티쿠스의 일원인지라 그때그때 제 의견을 정리하지 않고서는 발전이 없을 것 같아서입니다. 그 순간의 생각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로 인해 누군가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꾸지람을 듣더라도 그건 성장통의 일종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말씀을 해 주시는 분들이 무척 고맙기도 하구요.
일례로, 제가 예전 글에서 박정희를 반동적 근대주의자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의 저자가 한 말입니다. 저는 그 말에 동의를 했을 뿐입니다.
그 때 제 의견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신 분이 계십니다. 과거의 역사는 '그 당시의 상황과 기반'을 고려해야 한다는 말씀이셨습니다. 인정합니다. 제 생각이 짧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저는 제 의견을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생각도 있습니다. 지난 주에《마키아벨리즘으로 본 한국 헌정사》를 읽으면서 느낀 건데요, 박정희를 '실패한 마키아벨리스트'라고도 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근대에 군사 정권이 독재를 했던 나라는 우리나라만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보기 드물게 박정희 군사 정권 하에서 경제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아무리 평가절하한다고 해도 이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눈을 내부에만 고정할 것이 아니라 외부로 넓혀 비교한다면, 박정희를 마키아벨리스트에 비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좋은 목적'을 위해 '나쁜 수단'을 썼다고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나쁜 수단'이 곧 목적이 되어 그것을 유지하기에 급급하여 딜레마에 빠졌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또 한편으로 그가 정권을 잡기 전후 사정을 좀 더 파헤쳐 보면 그것이 '좋은 목적'이라 보기 힘든 면이 많습니다. 마키아벨리가 말하는 '좋은 목적'은 곧 '국가'인데, 국가가 아니라 개인의 처세를 위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행보였습니다. 이 부분 제가 좀 더 시간을 두고 심도 깊은 공부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런 식입니다. 저의 생각은 아직 덜 정리되어 있고 - 앞으로도 제대로 정리될른지 모르겠지만 - 저런 생각들 중에서 어느 하나만 툭 뽑아내어 독서노트에 덧붙입니다. 만약 박정희를 '좋은 목적'을 위해 부득이하게 '나쁜 수단'을 사용한 비운의 마키아벨리스트였다고 평가했다면, 아마 현재 독자들 성향 분포상 더 많은 수신거부 요청이 왔을 것입니다^^ 어떤 의사 표시를 하시든 자유입니다.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것이 명문이요 미문인데, 설익은 글을 읽어야 하는 괴로움이 오죽하겠습니까.
글을 쓰고 보니, 제 독서노트가 범인이 세상을 알아가는 '과정'임을 이해해달라는, 구차한 변명처럼 보이네요. 아~ 이것이 지금의 제 한계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 글은 제가 거의 '의무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글쓰기 원칙을 되돌아보기 위함이었습니다.
글을 읽어주시고, 때때로 의견을 주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훗날 제 사고의 폭과 깊이가 확대되고 지적 성취감과 삶의 질이 높아진다면, 이것은 순전히 제 글을 읽어주시면서 보이지 않게 힘이 되어준 여러분들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