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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평전
조성기 지음 / 작은씨앗 / 2005년 10월
평점 :
절판
'어제는 하나의 꿈에 지나지 않으며 내일은 하나의 환상일 뿐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한 오늘은 어제를 행복의 꿈으로 만들며 모든 내일을 희망의 비전으로 바꾸어놓는다.'
유일한(柳一韓)이 늘 품고 있었던 메모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다간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4월 4일, 유한양행 사장실에서 유일한의 유언장이 개봉되었습니다. 그 유언장이 4월 8일에 공개되었습니다.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합니다.
- 유일선의 딸, 즉 손녀인 유일링(당시 7세)에게는 대학 졸업시까지 학자금 1만불을 준다.
-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평을 물려준다. 대신 그 땅을 유한동산으로 만들 것이며, 그 동산에는 결코 울타리를 치지 않고 유한중학생, 유한공고학생들이 마듬껏 드나들게 하라.
- 유일한 자신의 소유 주식 14만 941주는 전부 '한국 사회 및 교육 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유일한은 그 전에도 이미 9만 6천 282주를 기증한 바 있다.)
- 아내 호미리는 재라가 그 노후를 잘 돌보아주기 바란다. (재산을 물려준다는 말은 없다.)
- 아들 유일선은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자립해서 살아가라.
- 그 외에 세세한 금전 거래, 예를 들어 유한양행 사장인 조권순이 처음 집을 지을 때 돈이 모자라 4백만원을 빌려준 적이 있는데 이 가운데 290만원은 갚고 110만원은 갚지 않았으니, 모두 받아 꼭 재단에 넣도록하라는 등.
달리 부언할 말이 없습니다. 당시 언론이 그렇게 강조했듯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자식들에게 대물림하지 않고 사회에 고스란히 환원한 일한의 결단과 정신은 두고두고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유일한 평전을 읽었습니다. 지난 주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끝내지 못하고 있다가 오늘 새벽에야 겨우 다 읽었습니다. '겨우'라고 한 것은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지, 읽기에 지겨웠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주말 내내 일이 있어 돌아다니다가 딸이 잠든 다음부터 집어들었는데, 오히려 생생한 마음으로 출발해야할 월요일 아침을 담보로 잡으면서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애를 읽는 것은 참으로 흥미진진합니다. 그것도 충분히 본받을만 사람의 전기를 읽는다는 것은 복 중의 복입니다.
세계1,2차 대전과 일제, 해방, 6.25, 4.19, 5.16을 관통하는 격동기를 살았던 유일한의 인생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했습니다.
돌아가신 분께는 죄송하지만, 초간단 버전으로 한 사람의 생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1895년 평양에서 태어난 유일한은 서구문물을 배워오라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갑니다. 그 때 일한의 나이 10살.
여러 사람을 도움과 땔감 만드는 일을 하면서 어렵게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대학 등록금이 없어 변전소에 취직하여 학비를 마련하고 미시간 대학에 입학합니다.
당시 국제 정세와 조국의 상황을 지켜보면서 일찌감치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대학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14일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대회에서 '한국 국민이 독립운동을 일으킨 목적과 바람을 알리는 글'을 발표합니다. 한편 미국 CIA의 전신인 OSS(Office of Strategic Services)의 한국 담당 고문을 맡게 되는데, 이 때의 정보력을 바탕을 1942년에는 항일무장독립군격인 '한인 국방경위대' 창설에 주동적인 역할을 합니다. 나아가 OSS의 비밀 침투작적인 냅코(Napko) 작전에도 참여합니다. 이 작전은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실현되지 못합니다.
이 당시 OSS 비밀문서를 보면 A라고 표기한 인물에 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A는 50세, 155파운드, 5피트 7인치이며 처와 두 자녀는 콜로라도주에 거주하고 있다. 부친은 돌아가시고 저명한 친척들이 한국에 많이 살고 있다. 그는 소년시절에 미국에 와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네브라스카주에서 마치고 1924년 미시건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27년부터 한국에서 사업을 시작하고 사업을 위하여 전쟁 발발 전까지 수차 한국과 미국을 왕래하였다.
그는 매우 투철한 애국자이며 그의 회사 지사들을 전략적으로 중요한 도시에 세워나갔다. 이들 사업체의 지배인, 부지배인, 직공장, 감독 등 감독들은 보다 투철한 애국자들인 그의 친천과 친구들로 메꿨다. 그래서 유사시 이들을 지하조직의 핵심으로 운영할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는 그의 사업조직망을 회사의 존망을 무릅쓰고 기꺼이 이용하는 데 동의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얼굴이 잘 알려져 있기 때문에 조원들고 같이 들어가지 않고 그 조의 고문으로 남을 것이지만 필요한 경우 한국에 직접 침투해 들어가게 되어 있다.'
물론 위에서 말한 A가 바로 유일한입니다.
유일한은 사업가로도 역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 제너럴 일렉트릭(GE)를 경험한 다음 "힘없는 나라를 살리는 길은 사업밖에 없다"는 생각에 '라초이 주식회사'라는 식품 회사를 설립합니다. 동양 음식을 통조림으로 만들어 꽤 번창하게 만든 다음, 1926년 한국으로 돌아와 유한양행을 설립합니다. 1936년 유한양행을 주식회사로 바꾸고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사원 지주제'를 도입합니다.
정치적으로는 이승만과 매우 껄그러운 관계였습니다. 비밀 정보요원이었던 유일한을 경계한 이승만은, 그래도 그를 가까이 두고자 초대 상공장관으로 권유했으나 일한은 끝내 뿌리칩니다. 그 후 그는 한국에 쉽게 돌아오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한국으로 돌아오는데, 그런 다음에도 이승만과 악연은 계속됩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자유당은 유한양행에 3억환의 정치자금을 은밀하게 요구해왔지만, 유일한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문을 닫는 일이 있어도 불법을 자행하는 무리와 공범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유한양행에 탈세혐의를 씌워 검찰에 고소하고, 철저한 세무조사를 했지만 아무런 혐의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박정희 정권 때 한 번 더 일어납니다.
박정희 정권의 정치자금 요구조차도 계속 거부하자 역시 세무사찰이 들이닥쳤고, 그러나 아무 것도 나오지 않자 심지어 과학기술처에서 유한양행 제품에 대한 성분조사까지 실시합니다. 한 푼의 탈세도 없고, 약품의 성분을 조사하면 할수록 그 제품의 우수성이 더욱 입증되자, 이에 감동한 청와대는 오히려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하게 됩니다.
이 평전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맴도는 단어는 오로지 하나 뿐이었습니다. - '正道'
올곧게 산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올곧게 경영한다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한 주를 시작하는 아침에 귀한 가르침을 얻었습니다.
올곧게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이번 주의 제 화두는 '올곧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