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역사 청문회
이태진.김재호 외 9인 지음, 교수신문 기획.엮음 / 푸른역사 / 2005년 5월
평점 :
품절


1.

만약 일제 강점기를 겪지 않았다면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한국사를 배운 학생이라면 한 번쯤은 던져봤음직한 질문이다. 역사에 가정이란 성립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뭔가 안타까운 심정이 여실히 담긴 이런 질문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비단 한국사를 배우는 학생의 입장뿐만이 아닌 듯하다. 교과서 저자들도 비슷한 맥락의 ‘안타까운 심정’이 기저에 깔린 채 한국사를 서술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때 배웠던 국사 교과서는 《고종황제 역사청문회》의 주 논쟁자인 이태진 교수처럼 내재적 발전론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조선 후기에 이앙법의 도입으로 생산량이 증가했으며 토지의 상품화가 이뤄졌고, 한편 노동생산성의 증가로 토지에서 유리된 농민들이 임노동자나 영세상인이 되어 상공업이 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상과 도고의 대두로 조선 후기엔 자유 상공업이 발전하였다고도 한다. 교과서 저자는 시종일관 내재적 발전론의 관점으로 자본주의 맹아에서 근대가 태동하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쯤 되면 마르크스의 역사 발전 단계설이 시사하는 것처럼 외세의 압박 없이도 우리 힘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여 합리적 근대를 맞이할 수도 있었으리라는 가정이 당연하게 보인다.
근대가 지닌 찬란한 합리성과 성장중심주의 이면에 숨겨진 폭력성에 대해 성찰할 수 있게 되면서 나는 역사에 대한 가정을 철회하였다. ‘주체적으로 근대화를 이룩할 수도 있었다’ 라는 가정 내부엔 ‘근대화는 반드시 추구해야 할 목표다’ 라는 명제가 일종의 선험적 윤리로서 교묘히 자리잡고 있었다. 근대화와 근대가 상정하는 합리성 및 ‘합리적인 인간’에 대한 반성적 사유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자본주의 맹아론’과 같은 관점이 다소 불편해졌다. 자연히 대한민국 역사에서 근대화의 주체가 누구였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내재되어 있었는가, 라는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잃었다. 그런 와중에 나는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2.

《고종황제 역사청문회》는 조선 말 격동기의 군주였던 고종황제가 봉건적이고 부패한 군주인가, 근대화를 추구한 개명군주인가, 라는 문제에서 더 나아가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의를 서로 상반되게 평가하는 학계의 논쟁을 다룬 책이다. 이태진 교수의 저서인 《고종시대의 재조명》에 대해 경제사학자인 김재호 교수가 비판적 서평을 다루고, 거기에 이태진 교수가 반박하면서 논쟁이 시작된다. 이태진 교수는 기존 역사학계의 주류 입장인 내재적 발전론의 연장선상에서, 고종황제가 세운 대한제국이 자력으로 근대화를 이룩해야 한다는 시대적 책무를 인식하고 정책을 추진했다고 본다. 김재호 교수를 필두로 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이태진 교수가 주관 과잉의 역사해석을 한다고 비판하며 최근의 수량통계적 연구 성과를 근거로 한국의 근대화는 일제 강점기에 이루어졌다고 반박한다. 더 나아가 식민지 시대의 한국사도 부끄럽게만 생각할 게 아니라 우리 역사의 한 부분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른 교수들이 두 논객에게 첨언하거나 반박하는 글이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논쟁을 살펴보면, 내가 봤을 때는 이태진 교수보다는 김재호 교수 쪽이 훨씬 설득력 있게 논지를 전개하고 있었다. 이태진 교수가 역사를 해석하여 서술하는 방식은 선언적인 태도라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주체적 역사 발전의 실마리를 찾는 게 당위적 임무라는 소신이 지나치게 확고하다보니 김재호 교수 및 다른 많은 교수들이 지적하는 바와 같이 ‘주관과잉의 역사 해석’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이태진 교수는 시종일관 ‘식민사관으로 인한 역사 왜곡의 잔재가 심각하다’는 주장을 전제로 깔고 서술한다.

김교수는 전환국이 황제의 사금고였고 백동화 남발이 화폐제도 문란의 주범이라고도 했다. 이런 인식은 사실 일본이 러일전쟁 중 일본인 재정 고문을 강제 투입해 대한제국 재정을 송두리째 삼키면서 국제 사회를 상대로 퍼뜨린 유언비어의 잔재다.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받지 못한 전쟁 배상금을 대한제국에서 벌충하기 위해 제일은행권을 강제 통용시키면서 대한제국의 재정과 화폐를 헐뜯는 음모적 국제 선전전을 폈다. 우리 학계는 아직 이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력 근대화의 역사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실정이다.
― 이태진, 〈식민사관의 덫을 경계해야 한다〉, p.31.

김재호 교수는 내재적 발전론자들에 대해 ‘가보지 않은 길’을 붙들고 시간을 낭비할 것이 아니라 식민지시대에 진행된 ‘근대 경제성장’과 그에 따른 사회 변화를 밝히는 것이 현재의 한국 경제에 대한 성찰을 위해 더 유익하다고 충고한다. 가보지 않은 길이 아니라 ‘이미 들어선 길’에서 일본의 전시 무력으로 밀려난 우리였기에 대한제국의 근대화 탐구는 비장한 연구 과제다.
― 이태진, 〈대한제국 근대화 성과, 경제 지표로도 읽힌다〉, p.70.


이 교수는 자신의 소신에 따라 당위적 임무를 수행한다는 태도로 1차적 사료들을 근거로 가져와서 ‘이러한 근거로 황제와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추진했음을 알 수 있다’라는 식으로 서술한다. 그의 서술은 버거워 보인다. 고종황제와 대한제국이 시도했던 여러 가지 제도나 추진했던 정책을 당위적 책무와 소신에 입각해 ‘자력 근대화의 의지’라는 단 하나의 코드로 힘겹게 번역하려 애쓴다는 인상이 강하다. 중추원관제에 따라 예산안이 심의되었던 사실은 ‘근대 의회제도의 도입’으로, 대한국국제를 반포한 것은 ‘민국이념을 바탕으로 황제에게 절대적 권력을 부여하며 근대적 국가의 초석을 쌓은 것’으로, 고종황제가 스스로 독립협회를 발족한 사실은 ‘관민이 함께 자발적으로 근대국가를 만드려는 의지를 보인 것’이라고, 다른 해석이 끼어들 한 치의 여지도 없이 번역된다. 그렇게 주장을 하고 싶었다면 해당 근거들이 근대화 추진이라는 코드로 번역되는 맥락을 일관성 있게 적절히 제시했어야 한다. 게다가 ‘식민사관의 덫’과 ‘자력 근대화 의지’를 대전제로 깔아놓는 타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전제와 주장만 되풀이한다. 아무리 그의 소신이 절대선(絶對善)의 윤리에 근거한다고 해도 학문을 하는 태도로서는 그리 바람직하다고 보이지 않는다. 이태진 교수의 주장은 갸륵한(?) 한편으로 학문적 태도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역사를 반성적으로 봐야 한다는 김재호 교수의 태도보다 다소 불편했던 것이 사실이다.

3.

나는 한국근대사에 대한 객관적인 인식을 가로막는 근본적인 장애는 우리나라만 예외적으로 ‘구체제’의 극복이라는 보편적인 문제가 부재했던 것처럼 사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조선왕조가 불행히도 이민족에 의해 패망해서 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가 곤란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민족에게 패망했다고 해서 왕조체제를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외면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라고 생각한다.
― 김재호, 〈누가 근대화 지상주의자인가?〉, p.55.


김재호 교수는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의 수량통계적 연구 결과와 사료들을 토대로 하여 다소 냉정한 태도로 근대 경제 성장의 성과는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이태진 교수는 이러한 김재호 교수의 주장이 식민사관의 덫이라고 비판한다.

일찍이 김용섭 교수의 광무양전 사업을 통한 근대적 소유권 생성론에 대해 식민지 근대화론 연구자들은 이를 주의 깊게 살피기보다 그 불완전성을 비판하는 데 급급한 느낌을 줬다. 옆에서 보기에는 내재적 발전론이 우세한 연구 터전에 식민지 근대화론을 심기 위해 벌이는 치열한 자리 만들기 같은 인상이었다. 김대준 교수의 연구에 대한 김재호 교수의 대응도 그렇다. 그렇게 추계를 중요시한다면, 대한제국의 연도별 예산서를 면밀히 분석한 김대준 교수의 연구 성과는 진지한 논평의 대상으로 삼아야 했다. 그런데도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 연구라는 식으로 냉대한 것은 옳지 않은 논평자세다. 대한제국=가산제국가설의 전제 아래, 같은 문제를 다룬 김 교수의 연구 방식이 오히려 주관적인 것이 아닐까. (중략) 이 시기는 근대의 시발기로 일제 강점기에 비해 자료 조건이 상대적으로 나쁘다. 그러나 이런 조건을 곧 발전 부재론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 이태진, 〈대한제국 근대화 성과, 경제 지표로도 읽힌다〉, pp.65-66.

이태진 교수가 지적하듯이 ‘자료 조건이 나쁜 상태를 발전 부재론으로 몰아가는 것’이 사실이라면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한편 김재호 교수가 자기기만적 태도를 경계한다고 밝히며 자신은 근대화 지상주의자도 아니고 ‘식민지 근대화론은 단지 근대적 경제 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되었다고 주장하는 것 일뿐’이라고 말하는 태도를 보면 그 주장에 수긍이 가게 되기도 한다. 식민사관의 기원과 실체에 대해 알아봐야 판단할 수 있는 문제인 듯하다. 내재적 발전론자들이 식민사관의 실체에 대해 밝혀줬으면 더욱 뼈저리게 실감할 수 있었을 텐데 이 책에서는 그리 시원스레 밝혀주지 못하여 꽤 아쉬웠다.
일단 김재호 교수를 비롯한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근대적 경제 성장이 식민지기에 개시되었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는 여러 실증적 연구 성과들을 제시하며 개진한다. 설득력 있지만 선뜻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식민사관 문제뿐만이 아니다. 이영훈 교수를 필두로 한 뉴라이트 학자들의 주장이 개진되고 현실에서 포용되는 맥락이 상당히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장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대한민국 건국에서 현재까지의 역사를 무조건적인 긍정으로 찬양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사’ 선전전에 이용되고 있다. 불편한 심정이 들지만 내가 한국사에 대해 아는 바가 고등학교 수준에서 그치기 때문에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에게 선뜻 반박할 수도 없다.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김재호 교수는 ‘구체제의 극복이라는 것이 조선왕조의 전 문명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며, 동시에 근대에 대한 무비판적인 긍정을 뜻하는 것도 아니’라고 항변한다. 물론 그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한국의 전근대가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으로만 본다고 읽힐 위험성에 대해서도 잘 숙지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자신의 주장을 서술하는 태도를 보면 자신이 숙지한 덫에 자신도 모른 채 걸려 있다는 인상이 강하다. ‘경제성장’이라는 코드를 다소 냉철한 잣대로 일관성 있게 적용하려는 경향은 학문적 태도로 긍정적이지만, 서구적 역사 발전의 잣대로만 재단하려다 보니 한국적 특수성을 염두에 두고 근대를 해석하려는 태도는 부족해 보인다. 따라서 ‘경제성장’이 최우선 지표가 되어버리게 되어, 주진오 교수가 지적하는 것처럼 ‘식민지 지배를 통한 인적·물적 수탈을 통해 식민지 이전 시기에 성장하고 있던 부분이 피해를 입은 부분은 없는지'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다. 경제성장의 코드로 성장이라고 해서 그것을 성장이라 이름붙일 수 있는지, 사회문화적 여러 유산들이 외려 퇴보하지는 않았는지에 대한 성찰은 그에게서 조금도 찾아볼 수 없다. 가장 심각한 문제점은, 서영희 교수 및 논쟁에 참여한 다른 많은 교수들이 비판하듯이 식민지 근대화론자들은 ‘그 경제 성장’이 누구를 위한 경제 성장이자 발전이었는지 망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한국 경제가 급속히 성장하며 달려온 탓에 한국 사회는 모든 분야에서 성장 중심주의에만 빠져 있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얼마 전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의 맥이 끊겨버렸다는 기사가 화제였다. 우리에겐 기초 학문 육성이나 학문의 다양성 확보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전통을 이어나가려는 정신이 천박할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 ‘경제성장’이라는 코드 외에도 다른 코드로 역사와 우리의 현실을 읽으려는 태도가 부족한 게 안타깝다.

4.

서로 다른 관점으로 역사를 해석하다보니 같은 사료를 놓고도 내리는 해석이 상이하다. 경제사학자들의 연구를 토대로 19세기 후반 인구 및 지대 등의 장기 경제 지표 수치의 변화를 보면 1896년을 저점으로 하여 반등세가 나타나는 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이 시계열 자료를 놓고 한쪽에서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성과라고 이야기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한제국의 근대화 성과라고 이야기하기는 너무 성급하며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조선말에서 대한제국은 경제적 파탄 상태였다고 말한다. 내장원의 《회계책》에서 내입액이 1904년에 급증하는 것을 보고 한쪽에서는 대한제국의 재정이 황제의 사금고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한쪽에서는 그런 통계만 볼 것이 아니라 초고액 내입금이 1904년 한 해에만 이뤄진 사실과 긴박했던 당시 역사적 정세를 유념해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내장원 《회계책》사료는 다른 2차적 사료들과 더불어 집요하게 파고들며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는 반박과 재반박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렇듯 두 교수가 자신의 주장을 개진하고 서로의 주장을 반박하는 과정은 과연, 《교수신문》 발행인이 책 서문에 쓴 말처럼 ‘드라마틱한 과정’이었다. 다음 회가 어떨까 궁금해 하며 연재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읽는 내내 손을 떼기 힘들 정도로 재미있었다. 양측 모두 더 활발한 실증적 연구가 진행되어 사실fact이 많이 밝혀져야 생산적 논의를 전개할 수 있겠다고 결론을 내리므로, 이후의 학계 연구가 어떻게 진행될지 기대해본다.
관점이 다른 두 교수가 논쟁을 하니 물론 생산적인 토론도 있었지만 평행선을 달리는 부분도 많았다. 나는 그들이 논쟁하는 중요한 주제인 ‘근대화’의 ‘근대’가 무엇인가에 대한 충분한 합의 없이 논쟁이 진행된 때문이기도 하다고 본다. 자력 근대화의 노력이 있었느냐는 사실의 여부를 떠나, 조선말 제국주의와의 충돌하여 국제적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와중에 대한제국을 거쳐 식민지가 되는 과정에서 근대적 패러다임의 전환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그들이 인식한 근대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시발점이 된 주체와 영향을 받는 세력에게 어떤 방식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루어졌는지 논의하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5.

근대화가 이루어진 시점을 달리 보는 이태진 교수와 김재호 교수는 서로 근대화 지상주의자가 아니라고 항변하고 있다.

김 교수는 내가 동학·서학·민국이념 등 세 가지 사조를 근대 지향적인 것으로 본 것에 대해 조선사회를 ‘근대성’의 단일 기준으로 지나치게 풀이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나에게는 마키아벨리즘의 잣대로 민국이념을 평가하려는 그의 논평 자체가 오히려 ‘근대주의’로 보인다. 서로 다른 공간에서 일어나는 탈중세의 현상들은 꼭 같은 모습일 수 없다. 서양 근대 이행기에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일어난 현상들을 우리 역사가 다 갖추기를 기대하기는 더욱 어렵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근대적 왕정의 모델이 돼야 하는 이유도 없다.
― 이태진, 〈‘고종시대’ 악센트는 ‘시대’에 있다〉, p.44.

주지하듯이 우리나라가 식민지화 이전에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수십 년을 노력해왔다. 그리고 왜곡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근대가 추구할 지상의 가치가 아니라면 왜 그렇게 고투했겠는가? 왜곡되지 않은 그 근대란 도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인가?
― 김재호, 〈누가 근대화 지상주의자인가?〉, p.57.


두 교수 모두 ‘근대화 지상주의’를 경계하지만 정작 그들이 역사를 해석하며 주장하는 논지를 차근차근히 읽어보면 두 교수 모두 근대화를 지상 명제로 여긴다는 느낌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력 근대화’가 ‘외세’에 꺾였다는 이태진 교수의 주장엔 근대화가 추구해야 할 지상 가치라는 전제가 이미 깔려 있다. 김재호 교수 역시 경제 발전을 근대화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로 관심을 갖고 그 외의 부분에는 배려가 부족하다는 측면에서 근대화 지상주의의 태도가 엿보인다. ‘양자 모두 근대가 초래한 억압과 불평등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김동택 교수의 지적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제국주의는 세계에 폭력적으로 근대화와 자본주의적 발전을 강요했으며 서로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역사적 변화의 흐름을 단절시켜버렸다. 우리는 근대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를 거치면서 우리는 근대화가 확립한 이 체제가 절대선이 아니지만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별다른 대안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경제성장률이 0이지만 굶주리는 사람도 없이 행복지수는 세계 최고라는 부탄 왕국의 예가 생각난다. 우리 사회는 경제는 성장하지만 성장의 그늘 하에서 빈부격차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여 ‘그 성장’은 누구나 행복하게 만드는 지상 가치가 아니라는 회의가 이미 짙게 깔린 지 오래다. 지구온난화와 자원의 고갈 등 생태계 파괴의 문제도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근대화를 이룩하도록 전환되었던 패러다임을 근간으로 한 ‘경제 성장’은 인류 역사를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의 길로 이끌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서구 중심의 역사가 폭력적으로 강요한 근대화 외에도 다양성을 존중하는 자세, 주류 경제학의 성장 중심주의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다른 지표로도 우리의 현실과 역사를 읽을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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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서늘한 기운을 머금은 바람 한 줄기가 뜨거운 태양빛 사이를 비집고 불어오면 가을을체감하게들 된다. 올해도 어김없이 가을이 다가왔다는 신호를 그보다 더 먼저 보내왔던 건, 출근 시간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아침 전철 승객들의 풍경이 시간대별로 달라지는 풍경을 관찰하면 재미있다. 7시만 넘어도 대부분이 화이트 칼라로 짐작되는 30대를 전후한 노동자들이 전철을 가득 메운다. 8시가 넘으면 교복을 입은 중고등학생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9시가 넘으면 두꺼운 전공서적을 든 프리한 복장의 젊은이들이 슬슬 주를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매일 출근길 전철을 타는 시간은 오전 5시 45분에서 50분경 사이다. 이때는 전철을 탄 승객들의 연령층이 좀더 높아 나와 비슷한 연령층의 직장인─더군다나 여성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은 흔치 않다. 대개가 복장을 보았을 때 아마도 블루 칼라 직종이라고 생각되는 50-60대의 남성 노동자들이 주 승객들이다. 재미있는 건 어쩌다 5시 30분 첫차를 타고 출근하게 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첫 차의 승객들은 50-60대의 블루 칼라 직종이라고 생각되는 여성 노동자들이 주 승객들이라는 사실이다. 첫 차 타임만 지나가도 50-60대의 여성들은 사라지고 6시 20-30분 이전까지는 아까 이야기한 50-60대 남성들이 주를 이룬다. 6시 30분 경부터 30대 전후 정장 차림의 남/여 승객들이 하나 둘 나타나며 7시 넘어서는 절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5시 45분경에 전철을 타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열 가지 정도는 넘게 있지만 이 시간에 전철을 타는 게 유쾌한 일은 아니다. 피곤에 지친 몸을 억지로 깨워 새벽 전철을 타고 40분 가량 이동하는 것도 유쾌한 일은 아닌데, 몇 십년 간은 묵은 피로에 찌든 것마냥 고되고 지친 삶의 무게가 그의 외양에서 진국 내음처럼 퍼져나오는 아저씨들과 함께 매일 아침 전철을 타고 가노라면 그 무게가 나까지 내리누르는 듯해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녘부터 뭔가 기분이 피로해지게 되기 때문이다. 내 출근 시간이 6시 반만 되어도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으련만……. 

아, 나이든 사람들이 많아서 전철 풍경이 우울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첫 차 타임만 되어도 50-60대 여성 노동자들이 주를 이루는데, 5시 45분-6시 때(50대 블루칼라 남성 노동자들이 많은 시간대)만큼 전철 풍경이 우울하지는 않다. 여성 노동자들 역시 정장 차림은 아니지만 밝고 화사한 옷차림을 한데다 표정이 지치고 고되어 보이지도 않으며, 그들의 수다는 유쾌하다. 

참 미스테리다. 도대체 왜 그럴까. 뭐 여튼 5시 45분경에 전철을 타지 않으면 안될 이유가 열 가지 정도는 넘게 있지만 타기 싫은 이유도 백 가지는 넘게 있다. 그래서 나는 (그렇잖아도 모든 노동자들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을) 출근길이 더더욱이 싫다. 그나마 하절기에는 이 시간대에 이미 해가 밝게 떠서 괜찮았는데 요즘엔 아직 해도 뜨지 않을 시간대로 변해버려 정말, 더더욱, 싫다. 

예전에 잠깐 누렸던 백수 생활이 그립다, 라고 하면 20대 청년 실업세대에 몰매를 맞을 이야기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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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니에 선집 1
장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199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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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스카나, 혹은 프로방스의 햇빛 찬란하고 위대한 풍경들 속에서는 한눈에 다 들어오지 않을 만큼 광대한 평원들이 보이지만 자세한 구석구석 또한 모두 다 글씨로 쓴 듯이 확연하다. 클로드 로렝의 그림을 상기시키는 이런 풍경에는 무엇보다도 내가 앞서 말한 그런 계시들이 가득하다. 어떤 친구가 편지하기를, 한 달 동안의 즐거운 여행 끝에 시에나에 당도하여 오후 두시에 자신에게 배정된 방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열린 덧문사이로 나무들, 하늘, 포도밭, 성당 등이 소용돌이치는 저 거대한 공간이─그렇게 높은 곳에 위치한 시에나 시가 굽어보는 저 절묘한 들판이─보이자 그는 마치 어떤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어서(그의 방은 하나의 깜깜한 점에 불과했다) 그만 눈물이 쏟아져나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고 했다. 찬미의 눈물이 아니라 〈무력감〉의 눈물이었다. 그는 깨달았다(왜냐하면 그것은 마음의 동요라기보다는 정신의 동요였음이 분명하니까)/ 그는 자기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모든 것을, 하는 수없이 감당하게 마련인 미천한 삶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는 일순간에 그의 염원들의, 그의 사상의, 그의 마음의 무(無)를 깨달은 것이다.-98-9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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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 - 3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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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계에서 펼쳐지는 생존 기계의 ‘합리적인’ 생존 전략, ESS
―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서평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논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생존 양식이 각기 놀라울 정도로 다르며 고도로 다양한 형태로 분화한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서도, 인간은 특이하게도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을 획득한 존재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은 인간 특유의 특성에서 비롯한 물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특성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일까? 왜 인간은 자연의 보편적 법칙에서 일견 위배되어 보이는 행위를 일삼는 것처럼 보이는가? 인간에서 더 나아가, 종의 외연을 확장한 모든 생명체의 본성에 대해 일관적으로 서술하는 법칙은 존재할 수 없을까?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본성에서 더 나아가, 생명체의 본질에 대한 일관적인 물음을 희구하는 태도로 이 책을 서술하였다. 도킨스는 스스로를 다위니즘의 신봉자이자 전도사라고 지칭한다. 그는 기존에 두루 지지받았던 학설인 그룹 선택설에 내포된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그룹의 경계를 어디까지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외연이 확장될 수도 있고, 따라서 ‘종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개체들이 어디부터가 적이고 아군인지 분간하기 힘들게 된다는 문제―을 비판한다. 도킨스는 더 나아가 자연 선택을 유도하는 주체가 ‘개체’가 아닌 ‘개체의 몸-운반체’를 빌린 유전자라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유전자는 의식적 존재가 아니고 유전자 풀에서 자신의 사본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퍼뜨리는 방향으로 운반체의 진화 양상을 유도하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논점이다. 물론 이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꽤나 설득력이 있지만 반드시 정답은 아닐 것이다. 확장된 표현형을 다루는 마지막 장에서는 석연치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거의 과학 논픽션에 가깝다는 기분이 들었다)도 있었다. 어떠한 과학적 진리라도 반증 가능성이 성립해야 한다는 포퍼의 지적이나 과학자-인간의 ‘확증편향’이라는 경향성을 굳이 예로 들지 않고서라도 말이다.  


여러 생물체들은 일견 합목적성과 의식을 지니고 때로는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은데, ‘이기적 유전자’ 가설은 어떤 법칙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자칫 독자가 오독할까봐 도킨스가 우려하는 바를 강조하자면, 유전자의 이기적 경향은 의식적인 게 아니라 기능적인 성향이라는 점이다. 수많은 유전자들이 증식을 경쟁하는 유전자 풀에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생명의 진화를 주도한 유전자들은, 자연 선택에 의해서 살아남은 것이지 유전자의 운반체일 뿐인 생명체 개체가 의도적으로 이기적 행동을 일삼는다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이기적 전략을 짜서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데 성공한 유전자의 운반체들이 후세에 유전자 사본을 전달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유전자의 운반체들은 반드시 이기적일 필요는 없고,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모순적 진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 가설이 경제학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킨스는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인기 있는 이론인 ‘게임 이론’을 빌어 이기적 유전자들의 생존 경쟁을 설명한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 가설을 역설하기 위해 메이나드 스미스와 액셀로드 같은 학자들의 이론을 빌어 서술하는 데에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매파와 비둘기파간의 싸움에서 시작하여 세대 간 경쟁, 성(性) 간 경쟁이 게임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 같은 비영합 게임(non-zero sum game),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까지 면밀히 소개하면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개체들의 행동이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 전략’에서 비롯하였음을 논증한다.  


죄수의 딜레마가 1회성 게임이라면 상대가 어떤 전략을 펼치든 나의 우월 전략(dominated strategy)은 무조건 상대를 배신하는 것이다. 만약 나는 협력(예 : 나는 내 부리로 진드기가 붙은 동료의 머리에서 진드기를 떼어준다)하는데 상대는 나를 배신(예 : 동료는 내 머리에 진드기가 붙었을 때 방관한다)하면 최악의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 물론 둘 다 협력하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나는 상대가 내게 협력할지 배신할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죄수의 딜레마가 한번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되는 게임이어도 무조건 상대를 배신하는 게 우월 전략일까? 한번 만나면 끝인 관계가 아니라 집단을 이뤄 살아가며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또 만나고 긴 시간동안 매일 만나는 관계끼리도 늘 배신하는 게 우월 전략은 아닐 것이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살펴보면, 액셀로드의 유명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에서도 수백 회 반복되는 게임을 시도했더니 다양한 전략을 수행하는 개체들 중에서 대체로 협력(단, 배신자는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만나면 배신으로 응징한다)하는 전략인 ‘tit fot tat(당하면 갚는다)’ 전략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게임 이론이 생명체의 이타적 행동과 생존 전략에 있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이타적 행동이나, 천적의 출현을 알리지만 정작 본인은 위험에 노출시키는 경계음을 내는 조류의 이타적 행동도 근원을 파고들어가 보면 유전자의 이기적 발로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타적 행동을 하는 개체들의 입장에서 벗어나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특정한 유전자는 꼭 그 개체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특히 근친도가 가까운 개체(부모자식, 형제자매 등)는 자신의 유전자를 상당수 지니고 있다.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근친도가 높은 개체의 이득과 해당 유전자를 포함한 운반체(즉, 해당 개체의 몸)의 이득을 종합적으로 계산했을 때 자신의 유전자가 더 널리 보존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게끔 개체의 생존 양식과 패턴을 진화시킨다는 말이다. 이것을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ESS)’이라고 한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은 개체들의 이타적 성향과 더 나아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 세계에서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무임승차(상대가 협력할 때 이익을 얻으면서 나는 배신하는 전략)를 하는 개체가 무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무리는 절멸의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런 성향을 지닌 무리는 자연 선택에 의해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유구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생명체들은 무임승차의 전략이 당장은 이득일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봤을 때 근시안적 전략이라는 교훈을 얻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고 나니, 세계를 바라보는 경제학적 사고가 투영된 진화생물학의 논증을 따라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여행하고 긴 여정을 겨우 마친 기분이다. 경제학은 선택에 대한 학문이며, 주류 경제학은 합리적 인간관을 기본으로 한다. 경제학에는 인간은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소의 노력으로 최적의 효과를 얻으려 한다는 제레미 벤담 식의 공리주의식 사고가 투영되어 있다. 사실상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인간의 ‘합리적’ 성격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기적’ 성격이 아닌가? 반대로 ‘이기적’ 유전자를 ‘합리적’ 유전자라고 기술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어쩌면 도킨스 식의 진화생물학은 경제학적 세계관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론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결국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눈이라는 도구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고 설득력도 있었지만 도킨스의 단정적 어조가 시종일관 불편하게 느껴진 구석도 없잖아 있었는데, 책을 덮으며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어쩌면 세계를 바라보는 편리한 도구인 경제학이 비판을 허용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에서 도그마가 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쳐 섬뜩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편리한 도구일 뿐, 기실 불완전한 학문이다. 경제학 이론이 모든 현상에 적용될 수 없는 비일관적인 이론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유전자가 이기적이어서 인간이라는 종도 합리적(또는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으로 진화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투영되어 이기적 유전자관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일 뿐, 다른 해석 포인트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고찰하는 즐거운 사변에 빠져들기도 했다. 


아직 의문이 다 풀리지는 않았다. 인간은 왜 존재할까? 인간은 왜 의식을 지니게 된 것일까?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의식을 지닌 인간의 행위―앞서도 서술했듯이 ‘일견 반자연적으로 보이는 행위’ ―는 이기적 유전자 이론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의식’을 ‘실행상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기계가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는 진화 경향의 극치’라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진화 과정에서 왜 이런 경향의 극치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비정상적으로 큰 뇌를 지니고 괴상한 생존 양식을 지녀 ‘문화’라는 것을 발전시키며 존재해 왔을까? 도킨스는 유전자(gene)가 아닌 밈(meme)이라는 새로운 자기 복제자를 제시한다. 감각 지각-상황대처(운동)의 연계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발생한 기관인 뇌가 인간의 경우 특수하게 커지며 ‘밈’이라는 자기 복제자가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밈은 인간의 문화와 영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창조적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래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밈의 복제를 통해 영원을 꿈꾸게 되고, 그래서 시간 속에 스러져가는 초라한 존재인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우리는 그래서 또다시 문화를 창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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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읽은 도서 목록

1. 노르웨이의 숲/무라카미 하루키/문학사상사 (4th reading)
2.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버틀런트 러셀/사회평론
3. 마담 보바리/귀스타브 플로베르/민음사
4. 시선은 권력이다/박정자/기파랑
5. 삼월은 붉은 구렁을/온다 리쿠/북폴리오
6. 88만원 세대/우석훈·박권일/레디앙미디어
7. 흑과 다의 환상 (상) (하) /온다 리쿠/북폴리오
8. 불한당들의 세계사/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민음사
9. 고도를 기다리며/사뮈엘 베케트/민음사
10. 인간문제/강경애/문학과지성사
11. 페미니즘/제인 프리드먼/이후
12. 설국/가와바타 야스나리/민음사
13. 변신 이야기 2/오비디우스/민음사
14. 스키니 비치/로리 프리드먼 · 킴 바누인/디자인하우스
15. 도살장/게일 A. 아이스니츠/시공사
16. 촘스키의 아나키즘/노암 촘스키/해토
17.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을유문화사
18. 2008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김애란 외/해토
19. 스타일/백영옥/위즈덤하우스
20. 아름다움의 과학/울리히 렌츠/프로네시스 
21.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유시민/돌베개
22. 고종황제 역사 청문회/이태진 김재호 외/푸른역사
23. 눈먼 자들의 도시/주제 사라마구/해냄
24. 소비의 사회/장 보드리야르/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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