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 30주년 기념판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06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자연계에서 펼쳐지는 생존 기계의 ‘합리적인’ 생존 전략, ESS
―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서평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에 대한 논쟁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앞으로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생존 양식이 각기 놀라울 정도로 다르며 고도로 다양한 형태로 분화한 지구상의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서도, 인간은 특이하게도 자아를 인식하는 능력을 획득한 존재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논쟁은 인간 특유의 특성에서 비롯한 물음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특성은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일까? 왜 인간은 자연의 보편적 법칙에서 일견 위배되어 보이는 행위를 일삼는 것처럼 보이는가? 인간에서 더 나아가, 종의 외연을 확장한 모든 생명체의 본성에 대해 일관적으로 서술하는 법칙은 존재할 수 없을까?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인간의 본성에서 더 나아가, 생명체의 본질에 대한 일관적인 물음을 희구하는 태도로 이 책을 서술하였다. 도킨스는 스스로를 다위니즘의 신봉자이자 전도사라고 지칭한다. 그는 기존에 두루 지지받았던 학설인 그룹 선택설에 내포된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그룹의 경계를 어디까지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외연이 확장될 수도 있고, 따라서 ‘종을 위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개체들이 어디부터가 적이고 아군인지 분간하기 힘들게 된다는 문제―을 비판한다. 도킨스는 더 나아가 자연 선택을 유도하는 주체가 ‘개체’가 아닌 ‘개체의 몸-운반체’를 빌린 유전자라는 주장을 펼친다. 또한 유전자는 의식적 존재가 아니고 유전자 풀에서 자신의 사본을 될 수 있는 한 많이 퍼뜨리는 방향으로 운반체의 진화 양상을 유도하는 이기적인 존재라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논점이다. 물론 이 책에서 제시하는 내용은 꽤나 설득력이 있지만 반드시 정답은 아닐 것이다. 확장된 표현형을 다루는 마지막 장에서는 석연치 않다고 여겨지는 부분(거의 과학 논픽션에 가깝다는 기분이 들었다)도 있었다. 어떠한 과학적 진리라도 반증 가능성이 성립해야 한다는 포퍼의 지적이나 과학자-인간의 ‘확증편향’이라는 경향성을 굳이 예로 들지 않고서라도 말이다.  


여러 생물체들은 일견 합목적성과 의식을 지니고 때로는 이타적으로 행동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많은데, ‘이기적 유전자’ 가설은 어떤 법칙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자칫 독자가 오독할까봐 도킨스가 우려하는 바를 강조하자면, 유전자의 이기적 경향은 의식적인 게 아니라 기능적인 성향이라는 점이다. 수많은 유전자들이 증식을 경쟁하는 유전자 풀에서 살아남아 오늘날까지 생명의 진화를 주도한 유전자들은, 자연 선택에 의해서 살아남은 것이지 유전자의 운반체일 뿐인 생명체 개체가 의도적으로 이기적 행동을 일삼는다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즉, 이기적 전략을 짜서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데 성공한 유전자의 운반체들이 후세에 유전자 사본을 전달할 가능성을 높인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유전자의 운반체들은 반드시 이기적일 필요는 없고, 이타적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모순적 진술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재미있는 것은 ‘이기적 유전자’ 가설이 경제학에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도킨스는 오늘날 다양한 분야에서 인기 있는 이론인 ‘게임 이론’을 빌어 이기적 유전자들의 생존 경쟁을 설명한다. 그는 이기적 유전자 가설을 역설하기 위해 메이나드 스미스와 액셀로드 같은 학자들의 이론을 빌어 서술하는 데에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매파와 비둘기파간의 싸움에서 시작하여 세대 간 경쟁, 성(性) 간 경쟁이 게임 이론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죄수의 딜레마 같은 비영합 게임(non-zero sum game),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까지 면밀히 소개하면서 이타적으로 보이는 개체들의 행동이 이기적 유전자의 ‘생존 전략’에서 비롯하였음을 논증한다.  


죄수의 딜레마가 1회성 게임이라면 상대가 어떤 전략을 펼치든 나의 우월 전략(dominated strategy)은 무조건 상대를 배신하는 것이다. 만약 나는 협력(예 : 나는 내 부리로 진드기가 붙은 동료의 머리에서 진드기를 떼어준다)하는데 상대는 나를 배신(예 : 동료는 내 머리에 진드기가 붙었을 때 방관한다)하면 최악의 결과를 얻기 때문이다. 물론 둘 다 협력하면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 있지만, 나는 상대가 내게 협력할지 배신할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런데 죄수의 딜레마가 한번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되는 게임이어도 무조건 상대를 배신하는 게 우월 전략일까? 한번 만나면 끝인 관계가 아니라 집단을 이뤄 살아가며 오늘도 만나고 내일도 또 만나고 긴 시간동안 매일 만나는 관계끼리도 늘 배신하는 게 우월 전략은 아닐 것이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살펴보면, 액셀로드의 유명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실험에서도 수백 회 반복되는 게임을 시도했더니 다양한 전략을 수행하는 개체들 중에서 대체로 협력(단, 배신자는 기억해뒀다가 다음에 만나면 배신으로 응징한다)하는 전략인 ‘tit fot tat(당하면 갚는다)’ 전략이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게임 이론이 생명체의 이타적 행동과 생존 전략에 있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자식에 대한 부모의 이타적 행동이나, 천적의 출현을 알리지만 정작 본인은 위험에 노출시키는 경계음을 내는 조류의 이타적 행동도 근원을 파고들어가 보면 유전자의 이기적 발로로 귀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타적 행동을 하는 개체들의 입장에서 벗어나 유전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특정한 유전자는 꼭 그 개체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특히 근친도가 가까운 개체(부모자식, 형제자매 등)는 자신의 유전자를 상당수 지니고 있다. 유전자의 입장에서는 근친도가 높은 개체의 이득과 해당 유전자를 포함한 운반체(즉, 해당 개체의 몸)의 이득을 종합적으로 계산했을 때 자신의 유전자가 더 널리 보존될 수 있는 방향으로 행동하게끔 개체의 생존 양식과 패턴을 진화시킨다는 말이다. 이것을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volutionarily Stable Strategy, ESS)’이라고 한다.
반복 죄수의 딜레마 게임은 개체들의 이타적 성향과 더 나아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 세계에서 우리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해야 할 행동에 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무임승차(상대가 협력할 때 이익을 얻으면서 나는 배신하는 전략)를 하는 개체가 무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면 무리는 절멸의 위기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런 성향을 지닌 무리는 자연 선택에 의해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 유구한 진화의 역사를 거치면서 생명체들은 무임승차의 전략이 당장은 이득일지 몰라도 근본적으로 봤을 때 근시안적 전략이라는 교훈을 얻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책을 덮고 나니, 세계를 바라보는 경제학적 사고가 투영된 진화생물학의 논증을 따라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여행하고 긴 여정을 겨우 마친 기분이다. 경제학은 선택에 대한 학문이며, 주류 경제학은 합리적 인간관을 기본으로 한다. 경제학에는 인간은 자신의 효용을 극대화하기 위해 최소의 노력으로 최적의 효과를 얻으려 한다는 제레미 벤담 식의 공리주의식 사고가 투영되어 있다. 사실상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인간의 ‘합리적’ 성격이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이기적’ 성격이 아닌가? 반대로 ‘이기적’ 유전자를 ‘합리적’ 유전자라고 기술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어쩌면 도킨스 식의 진화생물학은 경제학적 세계관의 극치를 보여주는 이론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해본다.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결국 호모 에코노미쿠스의 눈이라는 도구로 세계를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매우 흥미로웠고 설득력도 있었지만 도킨스의 단정적 어조가 시종일관 불편하게 느껴진 구석도 없잖아 있었는데, 책을 덮으며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어쩌면 세계를 바라보는 편리한 도구인 경제학이 비판을 허용하지 않은 하나의 거대한 이데올로기에서 도그마가 된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뇌리에 스쳐 섬뜩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경제학은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편리한 도구일 뿐, 기실 불완전한 학문이다. 경제학 이론이 모든 현상에 적용될 수 없는 비일관적인 이론인 것을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유전자가 이기적이어서 인간이라는 종도 합리적(또는 ‘이기적’)인 경제적 인간으로 진화한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투영되어 이기적 유전자관이 설득력을 얻게 된 것일 뿐, 다른 해석 포인트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결코 진실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라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를 고찰하는 즐거운 사변에 빠져들기도 했다. 


아직 의문이 다 풀리지는 않았다. 인간은 왜 존재할까? 인간은 왜 의식을 지니게 된 것일까? 자기 존재를 자각하고 의식을 지닌 인간의 행위―앞서도 서술했듯이 ‘일견 반자연적으로 보이는 행위’ ―는 이기적 유전자 이론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의식’을 ‘실행상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기계가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된다고 하는 진화 경향의 극치’라고 서술한다.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은 진화 과정에서 왜 이런 경향의 극치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비정상적으로 큰 뇌를 지니고 괴상한 생존 양식을 지녀 ‘문화’라는 것을 발전시키며 존재해 왔을까? 도킨스는 유전자(gene)가 아닌 밈(meme)이라는 새로운 자기 복제자를 제시한다. 감각 지각-상황대처(운동)의 연계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발생한 기관인 뇌가 인간의 경우 특수하게 커지며 ‘밈’이라는 자기 복제자가 활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밈은 인간의 문화와 영성을 풍부하게 해주는 창조적 원동력이 되어 왔다. 그래서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밈의 복제를 통해 영원을 꿈꾸게 되고, 그래서 시간 속에 스러져가는 초라한 존재인 자기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아무도 알 수 없고, 우리는 그래서 또다시 문화를 창조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