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주의 : 심각하지는 않은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도스또예프스끼라고 망설임없이 대답한다. 그 유명한《죄와 벌》과 세계 최고의 걸작 장편 소설이라고 일컬어지곤 하는《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그 외에 4대 장편 중 하나인《백치》는 각각 두세번 정도 읽었으며, 그 외 많은 단편집과 자전적 성격이 강한《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또예프스끼의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백야》도 여러 번 읽었었다. 그런데 4대 장편 중 하나로 꼽히는《악령》을 어쩌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소설은 내가 2005년에 처음으로 완독한 소설이다. 제목부터 강렬하게 다가오는 1100여 페이지 가량의 이 소설을 다 읽으면서 든 느낌은 우선, 매우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뾰뜨르 스쩨빠노비치의 음모에 의해, 그리고 내면적인 원인으로는 각 캐릭터들의 성격과 그들의 세계관과 사상에 결부지어져 얽혀서 등장인물들이 비극적인 파국을 맞게되기까지의 과정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사건의 뒷 이야기들과 등장인물들이 각각의 파국까지 달려가는 과정들이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솔직히《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최고의 소설이고 너무나도 재미있긴 했지만, 읽는 데 조금 힘에 부치긴 했었는데 이 소설은 그에 비해서는 술술 잘 읽히는 편이었다.

다음으로, 등장인물들과 소설적 구성 및 그로 인한 소설의 느낌에 있어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가 강한 듯하다. 일단은 소설적 화자의 시점이 매우 애매모호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소설들을 예로 들면, 《죄와 벌》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고,《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표면적으로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지만 화자와 등장인물들이 관계를 전혀 맺지 않은데다가 내면 심리까지 서술하므로 거의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소설도 시작할 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시작하길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와 비슷한 시점으로 서술하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화자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친구이자 상담역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수면 위로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아서 화자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읽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 '화자'의 이름도 드러나고 등장인물들과의 대화도 나온다. 거기다가 아주 가끔 '화자'의 성격도 드러나며, 녹슨 대작가 까르마지노프와 마주쳤을 때의 '화자'의 행동은 매우 희극적인 성격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그래서 가끔씩 드러나는 이 '화자'가 도대체 어떤 캐릭터인지 궁금해서 자세히 관찰하면서 읽었지만, 소설 대부분에서 화자는 수면 아래로 숨어버리며, 화자가 없었던 장소에서 일어났을 법한 사건이나 등장인물들의 내면 심리까지 뻔뻔스럽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하기도 하며, 가끔씩 드러났던 희극적인 성격과는 달리 냉철하고 통찰력 있는 판단력으로 사건과 의의를 정리해서 서술하기도 하여 매우 기이하면서 모순적이다.

또, 이 소설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종잡을 수 없다. 초반부에서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의 아버지)에 초점이 맞춰져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특히 그와 그가 신세를 지고 있는 바르바라 뻬뜨로브나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따브로긴의 어머니)와의 관계에 큰 비중이 실려져 있다. 그러다가 그들이 있는 현의 주요 인물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고,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우스꽝스러운 약혼 사건을 배경으로 스따브로긴과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등 주요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서 스쩨빤은 잊혀지고 현지사 부인인 율리야 미하일로브나의 권력과 스따브로긴의 카리스마를 이용하여 정치적 음모를 꾸미는 뾰뜨르와 5인조, 그와 연관된 끼릴로프와 샤또프 등 제반 인물들의 사건들이 등장하며,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은 후에는 다시 스쩨빤이 등장하고 스따브로긴가(家)의 비극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러한 시점의 불명확성과 중심인물의 불명확성, 충격적인 사건들, 상당히 특이한 캐릭터들의 성격으로 인해 소설 전체가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한 반면에 읽는 도중 실제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장면들도 여럿 등장하는데, 기이하면서도 희극적인 사건과 희극적 인물들의 캐릭터들은 소설의 기괴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보아도 매력적인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스따브로긴과 이반 샤또프이다. 스따브로긴은 매우 귀족적이고, 아름답고 완벽한 미모를 갖고 있으며(그 교활한 뾰뜨르가 이성을 잃고 이 점을 칭송하기도 할 정도로), 냉정하고 악마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사실, 몇 년 전 들었던 교양수업이나 평론집 등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작품에 대한 평을 들을 때마다 평자들은 꼭 스따브로긴을 연관시켜서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래서 많은 기대를 하고 이 작품을 읽었지만, 의외로 스따브로긴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밝히기도 민망할 정도로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이반 까라마조프 처럼 방대하게 사상적 체계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소설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사건과 등장인물들은 스따브로긴과 얽혀 있으며, 실제로 모든 음모를 계획하는 것은 교활한 뾰뜨르 스쩨빠노비치이지만 상징적 의미로는 스따브로긴이 모두 조종하고 있는 기분조차 들 정도이니. 그런데, 스따브로긴의 개인적인 목소리와 생각, 자신의 본성에 대한 고백 등이 독자에게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마지막 장〈찌혼의 암자에서(스따브로긴의 고백)〉에서야이다. 하지만 이 막장에서 나타나는 스따브로긴의 성격은 매우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소설 내내 카리스마로 일관하던 그의 캐릭터는 찌혼 앞에서 비굴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로 나타나며, 매우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또 매력을 느꼈던 인물 이반 샤또프는 대학생이며, 한 때 스쩨빤의 모임에 등장하곤 했던 인물이다. 소설을 한 번 밖에 못 읽은데다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읽어서 소설에 나타나는 그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샤또프의 사상적인 성격에서라기보다는 보다는 인간적인 캐릭터에 큰 매력을 느꼈다. 이 인물은 고집스럽고 어떤 면에서는 매우 현명하기까지 하나, 희극적인 성격도 매우 강하다. 2주만에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부인 마리 샤또바가 3년만에 갑자기 나타나 스따브로긴의 아이를 출산하는데 평소의 현명한 조심성까지 버려가며 그녀의 출산을 돕고, 생명의 무한한 신비를 느끼며 단란한 세 가족을 꿈꾸고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그 밖에도 이 소설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인 끼릴로프, 희극적 인간 유형의 극치를 달리는 스쩨판 뜨로피모비치도 매우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자신의 무신론을 천명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하는 끼릴로프의 매력은 일찌감치 많은 이들이 언급하기도 했었다ㅡ(예전에 읽어서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예를 들면 알베르 까뮈도 《시지프의 신화》에서 끼릴로프를 언급했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인 '악령'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유명한 맨 마지막 장 〈찌혼의 암자에서〉에서 스따브로긴의 고백에 나타나듯 흉악한 짓을 저지름으로서 느끼는 새디스트적인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설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사상적으로 혼란한 그 시대의 러시아에 만연하게 떠돌아다니는 어떤 기운을 뜻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점과 이상한 점들도 많았지만 매우 기괴하면서도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무척 재미있었지만 역시나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과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새해 처음으로 고전 소설을 읽었다는 점에 아주 뿌듯해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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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
남인숙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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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오랜만에 영풍문고에 들렀다가 베스트셀러 순위권에 진열된 책들을 훑어보다가 제목에 눈이 번뜩 띄어서 솔깃해서 집어들었다. 나도 지금 20대이고, 자기계발과 자아실현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저자가 도대체 뭘 말하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는 단정적 제목부터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 인간의 신념으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생존전략으로써 인정되는 처세술은 다를 수 있으니까, 라고 생각해도 일관성없는 발언들은 읽는 내내 실소를 자아내게 했다.

우선은 그럴듯하게 '…해라'는 식으로 늘어놓은 제목들. 제목들만 봐서는 훌륭하다. 하지만 뭔가 그럴듯한 주장을 하기보다는 사례를 늘어놓는데 급급하고 그에 한두마디정도 의견을 정리해서 늘어놓는 식이다. 제목에서 거창하게 이야기하는 것에 비해 너무나도 빈약한 구성들이 우스웠다.

그리고 두번째는 일관성없는 이야기들. 대표적으로 하나만 예를 들겠다. 결혼으로 인생을 결정짓지 말라고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성공을 위해 결혼을 이용하란다. 수록된 수많은 사례들 중에서 가장 어이없었던 사례는 부잣집에 시집간 한 여자의 사례인데, 그 여자는 부잣집 며느리로 들어가서 남편의 여동생인 학벌도 좋고 잘 나가는 시누이에 늘 눌려 살았단다. 그런데 시누이가 평범한 샐러리맨의 아내가 되었고, 그 이후 집안 모임이 있을 때마다 시누이의 기는 점점 눌리게 되었으며 그 잘나가던 시누이가 "우리 형편에 뭘…"이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남편의 위치에 따라 두 사람의 위치가 완전히 역전되었으며 그 이후로 자신도 기를 펴고 살게 되었다는 사례가 있었는데 이것이 여자의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고 거창하게 주장하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사례인가? 나는 읽으면서 씁쓸하게 피식피식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세번째. 이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지만 인정하기 싫은 이야기이고, 책의 두드러진 단점이라기보다 뭐, 사람 가치관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는 사실이긴 하지만, 미모가 인생의 '마스터키'란다. 그래, 정말 싫은 현실이긴 하지만 인정한다.  늦게 학교에 입학해 아직 학생인 나에게는 취업을 이미 했거나 취업 준비중인 친구들이 있으니까. 남자는 뚱뚱하다고 취업이 안 되지 않으나 여자는 뚱뚱하고 못생기면 취업이 되지 않는다. 알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미모도 경쟁력이라는 것은 서글픈 현실이긴 하지만, 현실을 변혁하려는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 스스로가 그러한 사회적인 인식적 폭력에 갖혀 있기 때문에, 아 여성이여, 그래서 너희가 차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좀 알아라, 라고 소리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 나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고 자기 자신을 가꾸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긴 하지만, 외모 때문에 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인정을 받는다는 사례를 들며 미모가 인생의 마스터키라고 주장하는 저자의 말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뭐, 결론을 내리자면, 이 책은 여자가 살기 위해서는 속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정도는 다 알고 있는 사실들을 거창한 제목으로 책으로 출판한 것을 보고, 요즘 정말 책 한권 내기도 쉽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내용이 좋으면 팔아주려고 했으나 그냥 서서 다 읽어버렸다). 문제는, 속물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여기서도 속물, 저기서도 속물이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하나 보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도 많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도대체가 일관성이 없다는 거지. 도대체 어쩌라는 거냐구. 별점 한 개만 주려다 그래도 쓸모있는 이야기 하나에 도움을 얻었기에 두 개를 준다. 도움이 된 이야기도 적어야겠지. 경제관념에 관한 이야기에서 은행 수수료처럼 정말 사소한 것들은 아끼면서도 자기가 좋아하는 거라면 비싼 청바지라도 과감하게 투자해서 사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에는 공감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여성들이여, 20대에 인생을 좋은 방향으로 결정짓고 싶으면 이런 책 한 권 읽을 시간동안에 더 좋은 양서들이 많으니 양서를 읽으며 마음과 지식을 살찌우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니 책 좀 많이 읽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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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장미 2004-12-22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극찬은 누구나 할수 있지만 비평은 아무나 할수 없다고 생각해요. 비평을 할수 있다는건 책을 아주 제대로 읽었다는 뜻이겠죠.^^ 그래서 책을 살때 비평위주로 글을 본후 구입하는 편인데... 님 너무 멋지세요!!^^

IshaGreen 2004-12-22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뭐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모두가 극찬하는 글에 대한 비판이니 제가 비뚤어져있을수도 있다고 생각되기도 한답니다-_-; 하지만 어떡해요. 전 아무리 읽어도 그렇게 보이는걸요..;;ㅋㅋㅋ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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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부극의 악당, ‘야만적인’ 인디언

 어린 시절부터『세계역사학습만화대백과』류의 책을 너무도 좋아하여 종잇장이 너덜너덜하게 닳도록 읽을 정도로, 나는 역사광이었다. 그 중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촉발되는 대항해시대편을 읽으면서, 희미하게나마 자연스레 떠오르는ㅡ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음직한ㅡ질문이 있었다. “ ‘신대륙 발견’이라고? 그럼 그 전에 거기서 살던, 콜럼버스가 만난 사람들은 뭐지? 그 사람들은 지금 뭘 할까?”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이 질문에 대해 속시원히 답해 주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기독교 문화 가운데서 자라나서 더욱 그랬을까, 오히려 어른들은 내가 묻지도 않았던 미국인의 개척정신, 청교도 정신을 이야기하며 입이 마르도록 ‘신께 선택받은 나라’ 미국을 칭송하곤 했다. 그러니 북미 인디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내가 알 리가 있었으랴. 인디언은 기껏해야 서부극의 악당이며, 전투적이고 미개한 이미지로 남아있었을 뿐.

 그나마 그 ‘야만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이 디즈니 애니메이션《포카혼타스》와 학창시절 《독서》 교과서에 수록된 시애틀 추장의 아름다운 연설문,「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였다(그나마 중요한 과목이 아니라서 그 연설문이 수록된 뒷부분까지 진도를 나가지도 못했고, 본인이 심심해서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글이었다). 인디언들이 자연을 위대한 부모로 경외하고 모든 만물을 형제로 여기며 조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고, 내게 그들을 매우 신비로운 존재로 여기게끔 했다(지금 생각하면 그 ‘신비스러운’ 이미지조차 실제 포카혼타스 사건을 왜곡한 상업주의였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나는 북미 인디언 종족의 성격과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졌으며, 왜 그들이 북미 대륙의 주인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면서 ‘현재의 미국인’들에게 점차 분노하게 되었다.

 미국 인디언〈멸망사〉

 재작년, 서점 한 켠에서 이 책을 발견한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큰 충격을 받았다. 첫번째로는 빨간 색의 너무나도 선명한 부제,「미국 인디언 멸망사」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그렇다, 왜 여태껏 생각하지 못했을까, 미국의 건국사는 달리 말하면 인디언의 멸망사인 것이다! 미국 건국에 얽힌 인디언의 시련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나의 뇌리에는 그 직설적인 글귀가 뚜렷하게 각인되어 버렸다. 두번째의 이유는, 이런 역사서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놀라는 내 자신 때문이었다….

 이 책과의 만남부터 마지막 책장을 덮기까지는 말 그대로〈충격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 책을 출간 즉시 구입했지만, 완독하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두껍긴 하지만) 책이 지루해서도 아니었고, 내 취향과 맞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너무도 괴로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읽어나가다 너무도 숨이 가빠와서 덮고, 책장에 꽂힌 이 책을 보고 미안한 마음으로 몇 달간 바라보다가 다시 꺼내서 얼마쯤 읽다가 또다시 덮어버리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진정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북미 인디언들

 에리히 프롬이 그의 저서『소유냐 존재냐』에서 밝히듯이, 인류 전체 역사에 비해 인간의 삶이 존재양식에서 소유양식으로 바뀌게 된 기간은 매우 짧아 몇 백년에 지나지 않는다. 산업화는 인류의 삶이 소유양식의 삶으로 전환되도록 박차를 가했고, 이 방식은 세계의 서구화와 함께 세계 방방 곡곡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재테크나 투자를 잘 해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대접받고 모두가 그를 부러워하며 본받고 싶어하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야, 소유양식의 삶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백 수십 년 전의 북미 인디언들은 탐욕스럽게 땅을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고 싶어하는 백인들의 사고방식이 당연할 수 없었다. 인디언들은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 ‘붉은구름’, ‘점박이꼬리’, ‘앉은소’ 등 그들의 이름이 자연친화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낯선 종족인데다가 더더욱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조금씩 침투해 오는 백인들과도 조화롭게 ‘존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백인들은 그러한 그들의 순수함을 악랄하게 이용하여 그들의 땅을 야금야금 파먹어가 ‘소유’하기 급급했다. 소유가 당연한 개념인 백인들에 비해 인디언들에게는 땅을 소유한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자체가 커다란 충격이었다.

 온순히 당하고만 있던 인디언들도 결국은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려 총을 들게 되었지만, 거의 700여 페이지 동안 백인과 화친하려고 부단한 애를 쓰는 인디언 추장들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러한 그들을 미군이 살륙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메어지지 않은 독자들은 없었을 것이다.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으로 묘사된 샌드 크리크의 샤이엔족 학살 장면은 특히 그러하다. 임산부의 배가 갈라지고, 수많은 남녀(어린애까지)의 성기가 도려내진다. 학살당한 인디언들이 백기를 들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인디언들에게 정말 마지막으로 남은 땅 ‘검은언덕’ 마저 악랄하게 빼앗아 버리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진정한 ‘야만인’은 백인들이다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먹는다고 약속했고, 우리의 땅을 먹었다. ㅡ붉은구름(오글라라 수우족 추장) ]

 이것이 미국의 ‘개척정신’의 본질이다. 이 유명한 추장의 말처럼 결국 미국 이민자들은 북아메리카의 절반을 차지하는 영토를 먹었고, 지금은 세계 최강국이 되어 ‘팍스 아메리카나’를 표방하며 제국주의를 휘두르고 있다. 반면,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운디드니 대학살 이후 자유를 완전히 잃고〈인디언 ‘보호구역’〉에 갖혀 비참하고 빈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

 역사는 승리자의 관점에서 씌어진다. 패배자인 북미 원주민들의 관점에 서서 미국 건국사의 추악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수많은 기록, 증언, 사진 자료 등의 사료를 수집하여 구성한 이 책은 구성 면에서도 탁월하다. 각 장의 첫 부분마다 사건과 관련된 인디언 추장들의 발언들을 발췌했고(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는 발언조차도 영적이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각 장이 끝난 뒤에는 인디언들의 민요를 수록해 놓았다. 이 책의 압권은 단연 결말이다. 거의 700페이지를 분노와 슬픔으로 달려오던 독자는, 그 수많은 페이지에서 반복되던 미국의 만행을 반어적으로 압축한 맨 마지막 장면에서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최종적으로 집계한 것을 보면 인디언 350명 중에서 거의 3백명이 목숨을 잃었다.…(중략)…1890년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찢기고 피 흘리는 부상자들이 촛불 켜진 예배당에 옮겨졌을 때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인디언들은 서까래에 늘어뜨려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수 있었다. 설교단 뒤 합창대석 위에는 엉성한 글씨로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땅에는 평화, 사람에게 자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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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08-1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살까 말까 계속 생각하다가 잊어버린지 한참 되었는데,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 리뷰 좋습니다.

IshaGreen 2004-08-13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세요. 강추입니다!ㅠㅠ

sayonara 2004-09-1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아메리칸 드림이 어떤 사람들의 시체 위에서 세워졌는지 잘 알 수 있는 책이죠.
리뷰 좋습니다. 추천~ ㅎㅎㅎ

IshaGreen 2004-09-25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요나라님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2004-12-0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디언 관련 서적을 검색하던중 우연히 님의 리뷰를 읽게 되었네요. 현재 오히예사의 < 인디언의 영혼> 을 읽고 있는데 백인들의 만행은 완곡하게 다루고 인디언 자체의 사상과 영혼을 이야기하네요. 서구문명에 의해 자행된 인디언 멸망사의 실체를 보기 위해 저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IshaGreen 2004-12-16 0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감사합니다^^ 인디언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그들의 영적 세계는 정말 아름답고 위대하지요. 웰빙트렌드에 맞춰 이용된다는 느낌때문에 안타깝긴 하지만요... 꼭 읽어보시면 좋을 책이랍니다^-^

가넷 2006-06-2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괴로운 책입니다....@@; 그래서 사기는 몇년전에 샀는데 보다가 말고를 반복 하는 중 이네요...
 
 전출처 : mannerist > 파격이란 - 명연의 독이 철철 흘러넘치는 위험한 연주

경고: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처음 듣는 사람이라면 가능한 한 피할 것.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어떤 곡인지 모르고 이 음반부터 접한다면 이 연주의 파격과 그 충격이 어느 정도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이 곡에 대한 잘못된 편견에 빠지기 딱 좋다.

참 여러번 재발매되는 연주다. 글렌 굴드 에디션으로 한 번, 재작년 글렌 굴드 서거 20주년 기념 the states of wonder라는 제목으로 리마스터링을 거쳐 두번째 녹음과 같이 낸 게 두 번, 아직도 이 두 판본이 계속 팔리고 있는 와중에 또 이걸 찍어내다니. 양심에 찔리긴 하는지 보너스 트랙을 좀 넣고 - 사실 전체 연주시간은 38분 내외이다 - 예전의 멋진 LP자켓을 되살렸다. 하긴. 글렌 굴드 에디션의 지나치게 깔끔한 자켓보다, the states of wonder의 몰아지경에 빠진 굴드의 할랑한 차림보다, 서른 장의 굴드 사진으로 서른 개의 변주를 묘사하고 있는 원본 LP 자켓이 몇배 멋져보이긴 하다. 저 원본 LP자켓 사진을 가리켜,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의 저자 미셀 슈나이더는 바이런적 영웅의 모습이라 극찬하기도 했으니까. 이미 글렌 굴드 에디션으로 이 연주를 가지고 있지만 저 원본 LP자켓을 되살린 걸 보자마자 가지고 있던 CD를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고 이걸 살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으니까. 가장 컬트-이 형용사를 붙이기에 그의 인기가 너무 좋긴 하지만-적인 연주자 굴드 팬의 성향을 정확히 꿰뚫긴 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래 리뷰를 쓰신 분이 지적하셨듯이 작곡 의도는 '자장가'라고 한다. 불면증에 시달리던 카이젤베르크 백작은 바흐의 제자이자 자신 휘하에 있는 쳄발로 연주자 골드베르크를 통해 불면증을 위한 곡을 하나 지어달라는 의뢰를 하고 이를 통해 탄생한 것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골드베르크는 매일 밤 이를 연주했고 백작은 크게 흡족해하며 바흐에게 큰 잔 가득 금화를 주었다고 한다. 이게 바흐의 인생에서 받은 최대의 작곡 보수였다.  바흐의 제자 골드베르크의 나이와 생몰연도, 무서울 정도로 엄밀한 수학적 구조를 가진 곡의 성격 등을 들며 이게 과연 자장가가 맞는지, 저 에피소드가 사실인지에 의문을 제기하는 음악학자들도 있다고 한다. 그럼 이게 자장가가 아니라고? 그들은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불면증'을 위해 작곡되었다는 말에 주목한다. 그거 들으면서 잠들라는 얘기가 아니라, 잠이 안올때 들으면서 마음 편히 지내고, 다른 일을 편하게 할 수 있게 해 주는 의미가 아닐까.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어느 게 맞을까? 자장가? 아니면 잠안올때 마음편히 듣는 곡? 여러 연주에 따라 그 답은 달라질 수 있겠다. 가장 완벽히 곡의 구조를 재현해 낸 로잘린 투렉 여사의 연주나, 절제되고 나즈막한 울림을 전해 주는 안젤라 휴이트 여사의 연주, 모나지 않고 둥글둥글한 범생이 안드라스 쉬프의 연주를 들으면 자장가라는 말이 맞는 거 같기도 하다. 깃털처럼 가볍고 챙강챙강 파열음을 내는 굴드의 두번째 연주를 들으면 잠을 청하는데 도움이 되진 않아도 마음을 편안히 하는데 도움되는거 같기도 하고. 그럼 이 굴드의 첫번째 연주는 어느 쪽에 기울어져있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어느쪽도 아니다. 이 연주 들으면서 잠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의 신경 굵기를 난 상상할 수 없고, 이 연주를 들으며 딴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의 산만함을 떠올릴 수 없다. 가장 짧은 말로 이 연주를 평하자면, '미친듯한 집중력과 몰입'이 아닐까?

첫번째 아리아부터 무언가에 쫓기는 듯 빠르게 처리해나갈때부터 심상찮은 분위기를 내비친다. 길지 않은 아리아 마지막 음의 여운이 끝나기도 전, 그야말로 질주하는 듯한 첫번째 변주가 이어진다. 반복구, 도돌이표를 거의 지키지 않는다. 각 변주의 핵심부만 건드리고 나면 그다음 바로 다음 변주로 미친듯이 내달린다. 조화와 균형, 바흐의 전 작품을 통해 추구하려고 했던 곡의 내적 질서와 균형보다는 악보의 지시사항이 전혀 없던 시대, 연주자의 재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자유를 굴드는 만끽하고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굴드의 연주는 맹독을 품고 있다. 고전주의 시대의 음악상이 어떠하였는가,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그당시 어떤 모습이었는가에 대해서 굴드는 일절 관심도 없다. 그 음표 하나하나를 몸으로 받아들여 자유롭게 창조해내는, 바흐가 아닌 굴드의 골드베르크변주곡인 것이다. 이를 소름끼칠정도의 속도감과 가벼운 터치를 통해 자신만의 해석을 빚어내었다. 바흐에게 그가 빌린 것은 음표뿐이었다. 작곡자의 의도 대신 자신의 자유로운 의식을, 음과 음 사이의 빈자리, 피아노 소리가 커버하지 못하는 공간마저 자신의 허밍으로 채우고 만다. 이 강렬한 곡에 대한 지배의식. 전곡이 연주되는 38분여는, 굴드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 사이에 들어갈 수 없다. 그곳엔 작곡자 바흐의 자리도, 듣고있는 당신의 자리도 없다(굴드는 청중에 대한 혐오를 죽을 때까지 버리지 않았음을 기억하라). 오로지 피아노와 굴드만 있을 뿐이다. 그의 전기를 골드베르크 변주곡의 구조에 맞추어 서술한 미셀 슈나이더가 그 제목을 Glenn Gould, piano solo라 한 건 정말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준 것이다.

난 그래서 이 음반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처음 듣는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지 않다. 파격을 제대로 소화해내기 위해선 그만한 기반이 그 사람안에 쌓여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굴드의 이 연주가 얼마나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는지 알 수 있고, 골드베르크 변주곡 자체의 매력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강렬한 연주를 접했다면 로잘린 투렉 여사의 잔잔하고 탄탄한 연주의 매력을 쉽게 느낄 수 없을게다. 연주의 질 자체는 최상급이지만 섣부르게 들어볼 음반은 결코 아니란거다. 글렌 굴드를,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궁금해하는 분들이라면 굴드의 두번째 1982년 녹음이나, 투렉 여사의 음반 등 보다 보편적인 연주를 먼저 듣고 기반을 쌓은 다음 반.드.시. 들어보시기 바란다. 이만한 파격은 서양고전음악 역사상 없었으니까. 게다가, 예전에 발매된 CD와는 달리, 38분의 본 연주 말고 쉽게 들을 수 없는 보너스 트랙이 여러 개 추가된데다, 오리지널 LP자켓을 복원한것도 장점이고. 게.다.가. 가격도 mid아닌가.  오죽하면 이런 말이 서양고전음악 애호가들 사이에서 돌아다닐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그건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아니라 굴드베르크 변주곡이지."

그가 말한 예술에 대한 정의를 덧붙이며 모자란 리뷰 닫는다.

The purpose of art is not the release of a momentary ejection of adrenaline, but rather the gradual lifelong construction of a state of wonder and serenity.

예술의 목적은 순간적인 아드레날린의 분출이 아니라, 전 생애에 걸쳐 점진적인 경이와 평정의 상태를 구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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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페이퍼가 비어서리...한번 끄적끄적....-_-;;

블로그랑 싸이도 있는데 여기에 글을 잘 남기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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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진 2004-08-02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블로그랑 싸이에 있는 글을 여기에다가 올려도 좋지 않을까요?
잉, 아쉽네요. 우르바시 님의 좋~~은 페이퍼를 기대하고 왔는데
페이퍼가 하나밖에 없다니..잉...ㅠ_ㅠ
앞으로 많은 글 올려 주세요! ^^

IshaGreen 2004-08-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네 예진양^^ 제 서재에 들러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