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나무심는사람(이레) / 200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서부극의 악당, ‘야만적인’ 인디언

 어린 시절부터『세계역사학습만화대백과』류의 책을 너무도 좋아하여 종잇장이 너덜너덜하게 닳도록 읽을 정도로, 나는 역사광이었다. 그 중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으로 촉발되는 대항해시대편을 읽으면서, 희미하게나마 자연스레 떠오르는ㅡ누구나 한 번쯤은 해봤음직한ㅡ질문이 있었다. “ ‘신대륙 발견’이라고? 그럼 그 전에 거기서 살던, 콜럼버스가 만난 사람들은 뭐지? 그 사람들은 지금 뭘 할까?”

 초등학생이었던 내게 이 질문에 대해 속시원히 답해 주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기독교 문화 가운데서 자라나서 더욱 그랬을까, 오히려 어른들은 내가 묻지도 않았던 미국인의 개척정신, 청교도 정신을 이야기하며 입이 마르도록 ‘신께 선택받은 나라’ 미국을 칭송하곤 했다. 그러니 북미 인디언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내가 알 리가 있었으랴. 인디언은 기껏해야 서부극의 악당이며, 전투적이고 미개한 이미지로 남아있었을 뿐.

 그나마 그 ‘야만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게 해 준 것이 디즈니 애니메이션《포카혼타스》와 학창시절 《독서》 교과서에 수록된 시애틀 추장의 아름다운 연설문,「우리는 모두 형제들이다」였다(그나마 중요한 과목이 아니라서 그 연설문이 수록된 뒷부분까지 진도를 나가지도 못했고, 본인이 심심해서 뒤적거리다가 발견한 글이었다). 인디언들이 자연을 위대한 부모로 경외하고 모든 만물을 형제로 여기며 조화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은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적이었고, 내게 그들을 매우 신비로운 존재로 여기게끔 했다(지금 생각하면 그 ‘신비스러운’ 이미지조차 실제 포카혼타스 사건을 왜곡한 상업주의였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프다). 나는 북미 인디언 종족의 성격과 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무척이나 궁금해졌으며, 왜 그들이 북미 대륙의 주인 자격을 박탈당하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면서 ‘현재의 미국인’들에게 점차 분노하게 되었다.

 미국 인디언〈멸망사〉

 재작년, 서점 한 켠에서 이 책을 발견한 나는 두 가지 이유로 큰 충격을 받았다. 첫번째로는 빨간 색의 너무나도 선명한 부제,「미국 인디언 멸망사」라는 글귀 때문이었다. 그렇다, 왜 여태껏 생각하지 못했을까, 미국의 건국사는 달리 말하면 인디언의 멸망사인 것이다! 미국 건국에 얽힌 인디언의 시련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만 하던 나의 뇌리에는 그 직설적인 글귀가 뚜렷하게 각인되어 버렸다. 두번째의 이유는, 이런 역사서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당연한 사실에 놀라는 내 자신 때문이었다….

 이 책과의 만남부터 마지막 책장을 덮기까지는 말 그대로〈충격의 연속〉이었다. 나는 이 책을 출간 즉시 구입했지만, 완독하기까지는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두껍긴 하지만) 책이 지루해서도 아니었고, 내 취향과 맞지 않아서도 아니었다. 너무도 괴로워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읽어나가다 너무도 숨이 가빠와서 덮고, 책장에 꽂힌 이 책을 보고 미안한 마음으로 몇 달간 바라보다가 다시 꺼내서 얼마쯤 읽다가 또다시 덮어버리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진정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던 북미 인디언들

 에리히 프롬이 그의 저서『소유냐 존재냐』에서 밝히듯이, 인류 전체 역사에 비해 인간의 삶이 존재양식에서 소유양식으로 바뀌게 된 기간은 매우 짧아 몇 백년에 지나지 않는다. 산업화는 인류의 삶이 소유양식의 삶으로 전환되도록 박차를 가했고, 이 방식은 세계의 서구화와 함께 세계 방방 곡곡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재테크나 투자를 잘 해서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사회에서 대접받고 모두가 그를 부러워하며 본받고 싶어하는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야, 소유양식의 삶은 지극히 당연하다.

 하지만, 백 수십 년 전의 북미 인디언들은 탐욕스럽게 땅을 조금이라도 더 소유하고 싶어하는 백인들의 사고방식이 당연할 수 없었다. 인디언들은 자연의 일부로서 조화로운 삶을 살았다. ‘붉은구름’, ‘점박이꼬리’, ‘앉은소’ 등 그들의 이름이 자연친화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낯선 종족인데다가 더더욱이 자신들의 영역으로 조금씩 침투해 오는 백인들과도 조화롭게 ‘존재’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백인들은 그러한 그들의 순수함을 악랄하게 이용하여 그들의 땅을 야금야금 파먹어가 ‘소유’하기 급급했다. 소유가 당연한 개념인 백인들에 비해 인디언들에게는 땅을 소유한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자체가 커다란 충격이었다.

 온순히 당하고만 있던 인디언들도 결국은 자신들의 터전을 지키려 총을 들게 되었지만, 거의 700여 페이지 동안 백인과 화친하려고 부단한 애를 쓰는 인디언 추장들의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하다. 그러한 그들을 미군이 살륙하는 장면에서 가슴이 메어지지 않은 독자들은 없었을 것이다. 목격자의 생생한 증언으로 묘사된 샌드 크리크의 샤이엔족 학살 장면은 특히 그러하다. 임산부의 배가 갈라지고, 수많은 남녀(어린애까지)의 성기가 도려내진다. 학살당한 인디언들이 백기를 들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인디언들에게 정말 마지막으로 남은 땅 ‘검은언덕’ 마저 악랄하게 빼앗아 버리는 장면에서 나는 눈물을 흘렸다.

 진정한 ‘야만인’은 백인들이다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다. 우리 땅을 먹는다고 약속했고, 우리의 땅을 먹었다. ㅡ붉은구름(오글라라 수우족 추장) ]

 이것이 미국의 ‘개척정신’의 본질이다. 이 유명한 추장의 말처럼 결국 미국 이민자들은 북아메리카의 절반을 차지하는 영토를 먹었고, 지금은 세계 최강국이 되어 ‘팍스 아메리카나’를 표방하며 제국주의를 휘두르고 있다. 반면, 북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저자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운디드니 대학살 이후 자유를 완전히 잃고〈인디언 ‘보호구역’〉에 갖혀 비참하고 빈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더욱 가슴이 아프다.

 역사는 승리자의 관점에서 씌어진다. 패배자인 북미 원주민들의 관점에 서서 미국 건국사의 추악한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책의 존재 가치는 충분하다. 수많은 기록, 증언, 사진 자료 등의 사료를 수집하여 구성한 이 책은 구성 면에서도 탁월하다. 각 장의 첫 부분마다 사건과 관련된 인디언 추장들의 발언들을 발췌했고(자신들의 권리에 대한 부당함을 주장하는 발언조차도 영적이고 아름답기 그지없다), 각 장이 끝난 뒤에는 인디언들의 민요를 수록해 놓았다. 이 책의 압권은 단연 결말이다. 거의 700페이지를 분노와 슬픔으로 달려오던 독자는, 그 수많은 페이지에서 반복되던 미국의 만행을 반어적으로 압축한 맨 마지막 장면에서 씁쓸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다.

 [최종적으로 집계한 것을 보면 인디언 350명 중에서 거의 3백명이 목숨을 잃었다.…(중략)…1890년 크리스마스가 지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찢기고 피 흘리는 부상자들이 촛불 켜진 예배당에 옮겨졌을 때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인디언들은 서까래에 늘어뜨려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를 볼 수 있었다. 설교단 뒤 합창대석 위에는 엉성한 글씨로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땅에는 평화, 사람에게 자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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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4-08-12 1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살까 말까 계속 생각하다가 잊어버린지 한참 되었는데, 한 번 읽어봐야겠군요. 리뷰 좋습니다.

IshaGreen 2004-08-13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읽어보세요. 강추입니다!ㅠㅠ

sayonara 2004-09-19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의 아메리칸 드림이 어떤 사람들의 시체 위에서 세워졌는지 잘 알 수 있는 책이죠.
리뷰 좋습니다. 추천~ ㅎㅎㅎ

IshaGreen 2004-09-25 0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요나라님 감사합니다^^

잉크냄새 2004-12-02 1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디언 관련 서적을 검색하던중 우연히 님의 리뷰를 읽게 되었네요. 현재 오히예사의 < 인디언의 영혼> 을 읽고 있는데 백인들의 만행은 완곡하게 다루고 인디언 자체의 사상과 영혼을 이야기하네요. 서구문명에 의해 자행된 인디언 멸망사의 실체를 보기 위해 저도 꼭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IshaGreen 2004-12-16 0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냄새님 감사합니다^^ 인디언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그들의 영적 세계는 정말 아름답고 위대하지요. 웰빙트렌드에 맞춰 이용된다는 느낌때문에 안타깝긴 하지만요... 꼭 읽어보시면 좋을 책이랍니다^-^

가넷 2006-06-27 14: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괴로운 책입니다....@@; 그래서 사기는 몇년전에 샀는데 보다가 말고를 반복 하는 중 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