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상 - 도스또예프스끼 전집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김연경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1월
평점 :
절판


(주의 : 심각하지는 않은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누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소설가가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도스또예프스끼라고 망설임없이 대답한다. 그 유명한《죄와 벌》과 세계 최고의 걸작 장편 소설이라고 일컬어지곤 하는《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그 외에 4대 장편 중 하나인《백치》는 각각 두세번 정도 읽었으며, 그 외 많은 단편집과 자전적 성격이 강한《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또예프스끼의 가장 아름다운 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백야》도 여러 번 읽었었다. 그런데 4대 장편 중 하나로 꼽히는《악령》을 어쩌다가 이제서야 읽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소설은 내가 2005년에 처음으로 완독한 소설이다. 제목부터 강렬하게 다가오는 1100여 페이지 가량의 이 소설을 다 읽으면서 든 느낌은 우선, 매우 재미있다는 것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면 뾰뜨르 스쩨빠노비치의 음모에 의해, 그리고 내면적인 원인으로는 각 캐릭터들의 성격과 그들의 세계관과 사상에 결부지어져 얽혀서 등장인물들이 비극적인 파국을 맞게되기까지의 과정은 손에 땀을 쥐게 만들었다. 사건의 뒷 이야기들과 등장인물들이 각각의 파국까지 달려가는 과정들이 상당히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솔직히《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최고의 소설이고 너무나도 재미있긴 했지만, 읽는 데 조금 힘에 부치긴 했었는데 이 소설은 그에 비해서는 술술 잘 읽히는 편이었다.

다음으로, 등장인물들과 소설적 구성 및 그로 인한 소설의 느낌에 있어 기괴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가 강한 듯하다. 일단은 소설적 화자의 시점이 매우 애매모호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소설들을 예로 들면, 《죄와 벌》은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이었고,《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은 표면적으로는 1인칭 관찰자 시점이지만 화자와 등장인물들이 관계를 전혀 맺지 않은데다가 내면 심리까지 서술하므로 거의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이 소설도 시작할 때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시작하길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와 비슷한 시점으로 서술하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화자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친구이자 상담역로 등장하는 것이었다. 수면 위로 확실하게 드러나지는 않아서 화자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읽고 있었는데, 나중에 이 '화자'의 이름도 드러나고 등장인물들과의 대화도 나온다. 거기다가 아주 가끔 '화자'의 성격도 드러나며, 녹슨 대작가 까르마지노프와 마주쳤을 때의 '화자'의 행동은 매우 희극적인 성격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그래서 가끔씩 드러나는 이 '화자'가 도대체 어떤 캐릭터인지 궁금해서 자세히 관찰하면서 읽었지만, 소설 대부분에서 화자는 수면 아래로 숨어버리며, 화자가 없었던 장소에서 일어났을 법한 사건이나 등장인물들의 내면 심리까지 뻔뻔스럽게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서술하기도 하며, 가끔씩 드러났던 희극적인 성격과는 달리 냉철하고 통찰력 있는 판단력으로 사건과 의의를 정리해서 서술하기도 하여 매우 기이하면서 모순적이다.

또, 이 소설은 주인공이 누구인지 종잡을 수 없다. 초반부에서는 스쩨빤 뜨로피모비치(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의 아버지)에 초점이 맞춰져서 이야기가 전개되며, 특히 그와 그가 신세를 지고 있는 바르바라 뻬뜨로브나 (니꼴라이 프세볼로도비치 스따브로긴의 어머니)와의 관계에 큰 비중이 실려져 있다. 그러다가 그들이 있는 현의 주요 인물들이 하나 둘씩 등장하고, 스쩨빤 뜨로피모비치의 우스꽝스러운 약혼 사건을 배경으로 스따브로긴과 뾰뜨르 스쩨빠노비치 등 주요인물이 등장한다. 그리고 나서 스쩨빤은 잊혀지고 현지사 부인인 율리야 미하일로브나의 권력과 스따브로긴의 카리스마를 이용하여 정치적 음모를 꾸미는 뾰뜨르와 5인조, 그와 연관된 끼릴로프와 샤또프 등 제반 인물들의 사건들이 등장하며, 모든 것이 파국으로 치달은 후에는 다시 스쩨빤이 등장하고 스따브로긴가(家)의 비극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이러한 시점의 불명확성과 중심인물의 불명확성, 충격적인 사건들, 상당히 특이한 캐릭터들의 성격으로 인해 소설 전체가 그로테스크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한 반면에 읽는 도중 실제로 실소를 자아내게 하는 장면들도 여럿 등장하는데, 기이하면서도 희극적인 사건과 희극적 인물들의 캐릭터들은 소설의 기괴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만 보아도 매력적인 인물들이 다수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인물을 꼽으라면 스따브로긴과 이반 샤또프이다. 스따브로긴은 매우 귀족적이고, 아름답고 완벽한 미모를 갖고 있으며(그 교활한 뾰뜨르가 이성을 잃고 이 점을 칭송하기도 할 정도로), 냉정하고 악마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다. 사실, 몇 년 전 들었던 교양수업이나 평론집 등 도스또예프스끼의 다른 작품에 대한 평을 들을 때마다 평자들은 꼭 스따브로긴을 연관시켜서 이야기하곤 했었다. 그래서 많은 기대를 하고 이 작품을 읽었지만, 의외로 스따브로긴은 이 작품의 주인공이라고 밝히기도 민망할 정도로 거의 드러나지 않으며, 《죄와 벌》의 라스꼴리니꼬프와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의 이반 까라마조프 처럼 방대하게 사상적 체계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소설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사건과 등장인물들은 스따브로긴과 얽혀 있으며, 실제로 모든 음모를 계획하는 것은 교활한 뾰뜨르 스쩨빠노비치이지만 상징적 의미로는 스따브로긴이 모두 조종하고 있는 기분조차 들 정도이니. 그런데, 스따브로긴의 개인적인 목소리와 생각, 자신의 본성에 대한 고백 등이 독자에게 가장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마지막 장〈찌혼의 암자에서(스따브로긴의 고백)〉에서야이다. 하지만 이 막장에서 나타나는 스따브로긴의 성격은 매우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소설 내내 카리스마로 일관하던 그의 캐릭터는 찌혼 앞에서 비굴하기 짝이 없는 캐릭터로 나타나며, 매우 희극적이기까지 하다.

또 매력을 느꼈던 인물 이반 샤또프는 대학생이며, 한 때 스쩨빤의 모임에 등장하곤 했던 인물이다. 소설을 한 번 밖에 못 읽은데다 사건과 인물 중심으로 읽어서 소설에 나타나는 그의 사상적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샤또프의 사상적인 성격에서라기보다는 보다는 인간적인 캐릭터에 큰 매력을 느꼈다. 이 인물은 고집스럽고 어떤 면에서는 매우 현명하기까지 하나, 희극적인 성격도 매우 강하다. 2주만에 자신을 버리고 도망간 부인 마리 샤또바가 3년만에 갑자기 나타나 스따브로긴의 아이를 출산하는데 평소의 현명한 조심성까지 버려가며 그녀의 출산을 돕고, 생명의 무한한 신비를 느끼며 단란한 세 가족을 꿈꾸고 행복해하는 그의 모습은 이 소설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였다.

그 밖에도 이 소설에서 가장 인기있는 인물인 끼릴로프, 희극적 인간 유형의 극치를 달리는 스쩨판 뜨로피모비치도 매우 매력적인 캐릭터였다. 자신의 무신론을 천명하기 위해 자살을 감행하는 끼릴로프의 매력은 일찌감치 많은 이들이 언급하기도 했었다ㅡ(예전에 읽어서 자세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마도;;) 예를 들면 알베르 까뮈도 《시지프의 신화》에서 끼릴로프를 언급했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의 제목인 '악령'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 유명한 맨 마지막 장 〈찌혼의 암자에서〉에서 스따브로긴의 고백에 나타나듯 흉악한 짓을 저지름으로서 느끼는 새디스트적인 쾌감을 느끼는 인간의 본성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설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사상적으로 혼란한 그 시대의 러시아에 만연하게 떠돌아다니는 어떤 기운을 뜻하는 것일까?

여러 의문점과 이상한 점들도 많았지만 매우 기괴하면서도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무척 재미있었지만 역시나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과 고통이 따른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며, 새해 처음으로 고전 소설을 읽었다는 점에 아주 뿌듯해하면서 글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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