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3-4월에 겪은 두 가지 일의 스트레스를 5월을 지속적으로 소비하며 하나둘 털어내기 시작했다. 뜬금없이 참았던 책 얘기를 하고싶어졌다. 읽은 책보다 읽는 중의 책이 훨씬 많은데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당시엔 어려웠어도 이미 지난 일은 또 금방 잊히는 게 사는 이치같다. 좋은 일과 나쁜 일이 번갈아 오고 좋은 책과 나쁜 책이 교차하는 것도 삶. 마음 너머 저 어딘가의 당신에게 고맙다고 쓴다. 그간 이곳 서재의 기능도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지만 기본은 늘 변함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중한 일상과 텍스트(책,영화 콘텐츠)의 나눔. 겉으로 드러나는 부질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 말고.
잃어버린 밤을 찾아서(지구상 가장 어두운 곳으로 떠나는 깊은 밤으로의 여행, The End of Night), 폴 보가드, 2014, 뿌리와이파리
1월에 만나 첫 페이지를 읽으며 이미 올해의 첫 번째(순위아님, 날짜순) 베스트()에 넣어두었다. 베스트()안에 몇 권이 꼽힐 지 확신할 수 없지만 설령 앞으로 읽을 책들이 모조리 더 좋다해도 이 책의 가치와 의미를 놓치거나 잊을 순 없다. 개인적으로 '시간'과 '밤'이라는 소재는 정겨우면서 질리지도 않는다. 6월이면 통합도서카드를 만든 지 일 년 된다. 도서관을 이용하며 세운 원칙 중 하나는 먼저 읽고 나중에 사는 것.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있다 해도 '소장하고 싶음'을 어느 선까지 설정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한다. 서재를 꾸미는 것도 귀찮다. 차라리 집이 도서관이었으면. 다시 읽는 타입이 아닌데 좋은 책은 읽히고 또 읽히는 게 마땅하고, 읽어야 한다. 그러나 밤에 대한 분석과 의미가 짐작처럼 달콤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 책을 처음 만날 때, 내가 떠나온 혹은 나를 떠난 잃어버린 밤을 찾고 싶어한 것 같다. 낮을 아는 이는 많지만 밤을 아는 이는 흔하지 않으므로. 밤의 의미를 아는 사람과 밤이 주는 고요와 안락을 얘기하고 싶었다.
밤을 낮보다 더 환한 밝음으로 사는 현대인들이 가엾다. 밤이 밤이 아니고 낮이라서 고마운 적도 있었을 것이다. 밤은, 그러니까 밤은, 오래 다른 시간, 공간, 세계였다. 나를 웃게 하고 울게 하고 숨쉬게 하고 외롭게 하고 기쁘게 했었다, 밤은. 그러니까 밤은, 내가 낮보다는 밤에 더 가깝다고 느끼게 한다. 낮만 아는 사람은 밤을 통과할 힘이 없고, 밤만 아는 사람은 낮의 빛을 피로하다고 느낀다. "어둠이 사라지면 모든 생명이 고통받는다."고 저자 폴 보가드는 썼다. "어둠을 알려면 어둠 속에 거하라."고 웬들 베리는 조언한다. 폴 보가드는 자연이 주는 선물인 밤의 어둠을 막는 인공적 빛이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기 위해 여행했다. 빛의 공해 속에서 모든 생명체는 제대로 안정하고 숙성할 시간이 없다. 빛과 어둠, 그 혼돈에서 각각 피어나는 가치들이 있다는 것을 현대인은 간과한다. 모두가 잠든 시간, 가로등, 주차장, 네온사인, 주유소, 신호등, 간판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불빛들이 어색하지 않게 된 세계에서 굳이 왜 어둠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역설해야 하는지 묻는다면, 2001년 조사한 이탈리아인 피에란토니오 친차노와 파비오 팔키가 만든 인공 밤하늘 밝기에 관한 세계지도를 보라고 답하겠다.
이에 따르면 미국과 서유럽에 사는 사람들 99%가 빛의 공해 속에 산다. 그들 모두가 평생 불빛 없는 밤을 경험하지 못하며 비정상적인 수면으로 생체리듬을 교란당한다. 피로와 소음에 압도된다. 빛과 소음에 익숙해진 나머지 시각적 불능 상태를 의도적으로 재현하지 않고는 더이상 경험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지나친 시각적 즐거움을 누리는 대신 청각, 미각, 촉각, 후각적 기능을 상실했다. 총체적 감각이 합세해야 비로소 발현되는 예술적 사유의 가능성을 잃었다. 찰스 디킨스는 <밤 산책>에서, 버지니아 울프는 <거리를 떠돌며:런던 탐험>에서 밤에 대한 예찬을 펼쳤다.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을 수도 있는 게 삶이라 하더라도 자연적으로 누릴 수 있는 감각을 다 못 누리고 사는 건 억울하다. 김영하 작가는 온 감각으로 글을 쓰라고 조언하고, 나는 메모지에 무심코 밤이 그립다고 쓴다. 좁은 땅, 넘치는 인구, 치열한 경쟁이 일상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에서 밤을 찾아나서는 여행은 무의미하지 않다. 충분한 수면과 온 감각의 활성화, 제대로된 사유의 힘. 잃어버린 밤을 찾아야 하는 이유는 내가 밤을 사랑하는 이유와도 닮았다. 이렇게 말해 볼까, 우리 밤에 만나요.
굶주린 길(The Famished Road), 벤 오크리, 2014, 문학과지성사
새삼 환상문학, 초현실주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운운하며 라틴 아메리카의 거장들-마르케스, 보르헤스, 아옌데-을 소환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한강의 <소년이 온다>, 이현수의 <나흘>, 마거릿 애트우드의 <눈먼 암살자>, 임철우의 <등대>, 바버라 킹솔버의 <화가 혁명가 그리고 요리사>를 처음 듣는 나이지리아 작가 벤 오크리의 <굶주린 길> 옆에 놓아보자. 무려 750페이지에 달하는 소설이다. 성장 혹은 역사와 현실을 비틀기 위해 의도적으로 초현실적 스토리를 빌려온 혹은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존재를 화자로 등장시키는 혹은 실제 존재한 인물을 사실과 전혀 다른 상황과 위치에 넣은 소설들. 그렇게만 나누면 이 소설은 혼령 아이가 등장하는 <소년이 온다>와 비슷하다.
1959년생인 나이지리아 출신의 작가 벤 오크리는 극도로 혼란한 격동기의 나이지리아를 몽환적인 언어로 그려내 1991년 부커상을 받았다. 한 아이(아자로)가 죽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중요하지도 파헤칠 필요도 없다. 아이 생사를 모르는 부모는 삶과 죽음이 뒤바뀐 삶을 살고, 아직 저 세계로 완전히 넘어가지 못한 혼령 아이=아비쿠(아자로)는 아비쿠의 협정을 위반한 채 이 세계로 넘어온다. 1, 2가 아닌 3의 세계에 존재해야 할 아자로에게는 특이하게도 1,2 중에 머무를 곳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졌다. 부패와 부조리로 얼룩진 삶은 상상가능한 모든 경계를 희미하게 만든다. 경계에 존재하는 아비쿠들의 투닥임, 미래와 재앙을 보는 아자로의 시선이 닿는 모든 시공간이 나이지리아가 당면한 문제, 곧 이 세계의 부조리를 대변한다. 작가가 구축한 환상성은 줄거리의 특수성-나이지리아 현실-에서도 나타나지만 현실과 초현실에 존재하는 아비쿠의 위치로부터 나온다. 모든 인물이 익명성을 띄고 시공간의 구체성이 사라지는 것, 굶주린 길이 의미하는 나이지리아의 정체성-흑인, 가난, 민족(종족) 등의 곤혹과 수난-을 더이상 문학적일 수 없을 것처럼 아름다운 문체로 잘 다듬어냈다. 올해 만난 책 중 세 번째(순위아님, 날짜순) 베스트().
작가에 대한 정보를 찾다가 열 번째 소설 <마법의 시대(The Age of Magic)>로 배드 섹스(Bad Sex in Fiction Award)상을 받기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기사에 인용된 "우주가 그녀 안에 있었다. 한 번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우주가 펼쳐졌다. 칠흑 같은 어둠 어딘가에서 길 잃은 로켓이 폭발했다."라는 구절은 굉장히 다의적으로 해석되고, <굶주린 길>에서 느낀 벤 오크리의 매력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다른 작품이 계속 출간됐으면. 게다가 문학과지성사 대산세계문학총서는 모두 가지고 싶은 아끼는 전집 중에 하나다.
바다 사이 등대(The Light Between Oceans), M.L. 스테드먼, 2015, 문학동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작고 좁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나 호감을 갖고 헤어질 뻔하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헤어지는 이야기는 흔하디 흔하다. 그러나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 평생(영원히) 가족과 뭍을 떠나 아무것도 없는 등대에서 살아야 한다는 조건이 붙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 남자를 사랑해서 외딴섬 야누스 록으로 들어간 한 여자와 한 여자를 사랑해서 여자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할 수 없는 한 남자의 눈부시고 아름다운 신앙같은 사랑이다. 톰과 이저벨, 딸 루시, 루시의 부모-톰과 이저벨만큼 대단하게 서로 사랑했던 비운의 커플-의 이야기가 잔잔하고 따뜻하다.
서로 아끼고 존중하며 더이상 부러울 게 없는 톰과 이저벨 커플에게 찾아온 두 번의 유산은 커다란 시련이었다. 섬에 갇힌 이들이 예고없이 닥친 퍼석거리는 아픔을 치료하는 방법은 서로가 서로를 완전히 믿고 의지하는 것밖에 없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때마침 우연히 섬으로 흘러들어온 아기에게 위험을 감수하며 인생 전부를 걸어버린 이저벨과 한번의 동조 후 그녀를 말리지 못해 생긴 일그러진 상황을 바로잡으려 끊임없는 죄책감으로 그녀를 설득하는 톰. 그들에게 선택과 책임 그리고 아기는 거의 신앙이 되어가고 있다. 좁은 섬, 타인을 밝히되 자신들은 전혀 밝아지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에 대한 딜레마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지치지 않고 '당신이라면'이라는 질문을 던지며 도덕적 판단과 운명에의 순응 사이로 몰아넣는다.
마이클 패스벤더와 레이첼 와이즈 그리고 알리시아 비칸데르, 야누스 록의 적막과 고독,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바다 위의 이정표 등대, 매일매일 등대를 지키는 등대지기, 바다 옆 자그마히 놓인 고독의 삶, 1차 대전 후 오스트레일리아를 관통한 상실의 고통과 쓸쓸함, 등대를 사는 이들의 물결치는 행복.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능가하는 행복을 향한 욕망과 이어지는 삶.삶.삶. january(1월)의 어원인 janus(야누스)는 두 얼굴의 신을 의미하고, 야누스 록이라는 이름은 이로부터 왔다. 과거를 반성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외딴 바위섬 야누스 록이 실어온 이야기는 또 있다. 작은 보트에 실려 센 물살에 떠내려온 아비를 잃은 갓난 여자아이와 사랑하는 남자와 딸의 생사를 모르고 하염없이 기다리는 여인, 언젠가 루시를 원래 부모에게 돌려줄 수밖에 없다는 걸 아는 톰과 이저벨의 슬픈 운명. 빛은 무대 위 조명처럼 짧지만 등대지기는 누구보다 강하다. 전쟁으로 오빠 둘을 잃고 부모님의 유일한 소망으로 사는 이저벨과 전쟁 때문에 죽음을 끌어안고 메마르고 불안한 삶을 이어온 톰, 독일(오스트리아)인이던 루시의 생부와 어렵게 자수성가한 남자의 딸인 루시의 생모까지, 모두의 사연들이 불행을 딛고 존재하는 가운데, 파도와 밤의 어둠은 연이어 바다와 빛을 삼킨다. 어둠은 머지않아 다시 재빠르게 빛과 온기를 토해내게 될 것이다. 그들이 빛을 잊지 않고, 빛이 그들을 떠날 의지가 없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