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자마자 한 권씩 리뷰했다면 되새겼을테고 떠올렸을테고 그러면 기억됐을테고 덜 까먹을 것이다. 하지만 쉼 없이 한 권을, 때로는 여러 권을 산발적으로 읽으며 생각은 덜했기에 감상은 남았지만 지식(이랄 것도 없지만)은 소멸했다. 예를 들면, 지명, 캐릭터 이름, 좋았던 부분의 정확한 구절 같은 것들. 리뷰하려면 등장인물과 줄거리 정도는 있어야한다고 여기지만, 흘러가는 것을 붙잡는 재주가 없다, 찾아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인공적이다 그건. 이번에는 없다. 다음번에는, 노력하겠지만 그래도 없을지도. 

 

 

<어떤 날들>의 엔딩은 어떤 면에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누군가는 그들이 가족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 때문에 책임감이 없다고 할 수도 있겠고 실제로 그럴지도 모르지만, 게다가 그들이 삶으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_선택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사소한 선택사항_중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있었다는 약간의 가능성으로 인해 비난받아야 마땅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같은 이름 다른 의미로 이 작고 무거운 커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기대된다. 무거운 책임감을 내려놓지 못해 짊어져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남자와 그런 사랑을 감당하고 책임지기 위해 가족을 떠난 여자_남자와 여자라 불리기에는 너무나 어린 그들_의 마음 같은 거, 사실 이 가족들을 생각하면 많이 몰염치할지도. 그러나 균열은 처음부터 없던 게 아니라 있어도 몰랐던 흠이기에 이 가족이 따로 살아가는 삶도 기꺼이 응원할 수 있다. 이 소설은 그런 이야기다. 가장 두려운 것을 책임질 수 있게 하는, 책임지지 못해도 용기내게 하는, 용기가 나지 않으면 신념과 신뢰를 지키게 하는, 뜨겁게 부서지는 게 미온하게 완벽한 것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글쎄, 난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은데. 띠지에 박힌 미스터리라는 문구가 낯설다. 내가 기억하는 이 이야기는 미스터리가 아닌데다 누가 살인마였는지 기억이 도통..나질 않아.. (어쩌면 나는 순간을 견디기 위해 소설을 읽는지도 모르겠다)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삼십년 복역 끝에 정신병원으로 온 살인마가 있고, 조울증 엄마와 자폐증 동생을 가진 청년이 있다. 술에 찌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엄마는 자폐를 앓는 동생을 제대로 돌보지 못할 때가 많지만 조는 지긋지긋한 엄마와 동생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먼 곳에 있는 대학을 선택한다. 적어도 밤낮으로 엄마와 동생을 돌보지는 않아도 된다는 자유를 스스로에게 허락하기 위한 선택이지만 사고치는 엄마와 혼자서는 위태위태한 동생 때문에 일상은 흔들릴 때가 많다. 그의 삶은 수업 과제로 삼십년 전 이웃집 소녀를 살해하고 불태운 혐의로 복역 중인 칼을 인터뷰하면서, 옆집에 사는 라일라와 사귀면서 점점 변화해간다. 누군가의 이야기(사연)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어떻게 달라지게 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이 소설이 도움이 될 것이다. 조의 일상과 (이제 기억이 난다) 삼십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을 추적하면서, 살인범 칼의 젊은 시절을 동시에 들을 수 있는 감동과 눈물의 시간이다.

 

 

 

이 소설은 열에 아홉이 좋다고 할 만한 그런 작품이 분명하지만 나는 당시 줄기차게 읽고 있던 추리소설에서 문학작품으로 복귀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매겼다. 별은 다섯을 매겼지만 좋아하는 형태의 소설은 아니라서 실질적 의미에서 네 개다. 왜인지 모르지만 <스토너>는 사실 지루했었다. <스톤 다이어리>를 읽으면 당연히 <스토너>의 여성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스토너보다 스톤이 더 나았던 건 역시 여주인공이라서였을까. <스톤 다이어리>를 다루는 빨간책방을 들었고, 알게 되었다. 누구나 겪는 삶을 진지하게 풀어가는 소설과 경험하지 못하는 세계를 보여주는 소설 중에 나는 후자를 좋아하니까, <스토너>나 <스톤 다이어리>에 큰 점수를 부여하지 않았던거다. 사건 배열의 미장센을 이용하는 건 영화지만 시간의 일방성으로 진행되는 느린 소설에서 몇 발짝 비켜나 있었기에 이 소설이 마음에 들어왔을 때 좀 놀랐던 것 같다. 신기한 사실은 정말 특별한 사건이 하나도 없다는 것(읽기 나름일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유려하게 읽힌다는 것. 읽는 사람의 진입장벽을 생각하면 위, 그리고 위의 위 책이 더 나을지도. 특정 사건이 없다는 것은 임팩트 찾기가 어렵다는 뜻이고 쉽게 읽히지만 길을 잃어버리기도 쉽다는 뜻이다.

 

 

 

왜 하필 이탈리아? 라는 물음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사랑이란 게 있을 수도 있다는 건 이미 경험했다. 이십대 내내 나는 딱 한번 가본 이탈리아를 품었고, 사실 가보기 전부터도, 십대부터 그 거대한 유적과 역사의 도시들을 품고 있었다. 남들은 이탈리아하면 쇼핑이라는데 쇼핑을 굳이 이탈리아까지 가서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줌파 라히리의 작은 책이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익히고 동경하고 사랑하는 사전이었던 것처럼 나도 언어 배우기 혹은 언어 공부라면 일가견 있다. 참고서, 문제집 사는 것도 소설책 사는 것만큼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고, 빽빽한 알파벳이나 꼬불한 히라가나 사이로 연필을 꽂아놓으면 으쓱하는 기분이곤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니 이탈리아를 사랑하여 이탈리아어를 배우고 그렇게 배운 타언어로 자신만의 언어 배우기 에세이를 쓴 도전을 얕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기대가 컸다면 실망도 큰 법이라, 대한민국이 아닌 땅에서 나고 자랐다면(혹은 부모가 타국인이었다면) 당연히 익히고 말했을 언어 배우기에 큰 로망이나 대단한 가치를 두고 싶지 않은 건 내 작은 고집이다. 서정적이면서도 그 서정성에서 약간은 빗겨나 있을 정도의 현실성을 획득하는 작가의 다른 작품을 기대한다.

 

 

 

가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계속 <LAST>의 미주를 생각한다. 떠오른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어떤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이 더욱 강렬해졌는데 어느 작품이었는지 모르겠다. 미주는, 아저씨도 잃고 회장님도 잃은, 유학을 가버린_집나온 학창시절 이후 처음으로 자유로워진_미주는, 이제 행복할까. 지금 가진 추억 속 사람들이 다 과거가 되어버리거나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되어버릴 때, 우리는 홀가분해질 수 있을까. 수수한 청바지에 새하얀 셔츠와 운동화를 좋아하는 여자가, 높은 구두와 값비싼 보석과 푹파인 드레스를 감당할 때, 그 삶으로도 살 수 있다고 느꼈을 때, 그녀는 정말 다 지킬 수 있을거라 생각했을까. 내것이 아닌 것을 단호하게 내려놓는 용기와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 포기하는 결단은 역시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 아니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때 서울역 사람들(정의)을 지키는 대신 미주(사랑)에게로 왔다면 그는 지금 살아있을까. 그들은 오래 행복했을까. 행복도 사랑도 평화도 그들에게는 너무나 먼 희망이었다. 희망이 그토록 먼 삶이라면 처음부터 피해야만 하는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은 이 붉은 계절이 곧 지나가는 것과는 달리 웬만해선 끝이 나지 않을 거란 걸, 더 좋은 책을 많이 읽으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오래도록 하고 싶다고, 선택의 폭이 넓어지기를 바라고 있다. 나는 소설에서 어느 드라마 속 파란만장했던, In Or Out의 삶을 살던 여주인공을 떠올리고, 또 그녀는 내게로 오버랩된다. 그렇게 세상의 모든 이야기들은 서로를 부여잡고 뱅글뱅글 돌고 있다. 그리고 나도.

 

 

 

 

 


댓글(18)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5-10-28 08: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1: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수철 2015-10-28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 글은 꾸준히 좇아 읽었지만, 댓글은 처음 남기는 것 같습니다. 안녕하세요.^^

....음, 저도 드라마 라스트를 제법 챙겨 보면서 흥미를 느꼈더랬어요.

그런데 미주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왜, 갑자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권투를 하는 넘버 투에게 주로 이입을 했거든요. 그런데 미주나 넘버 투 같은 사람은... 사실 같은 부류라는 생각이 드네요. 야망이 없고 선한.....

그 둘이 결국 함께 떠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공연히 억울해했던 기억도 나네요.ㅎㅎ

아무려나 `스톤 다이어리` 챙겨 갑니다.^^

아이리시스 2015-10-28 15:48   좋아요 0 | URL
한수철님 안녕^-^ 하세요.

오래 봐서 이제 거의 식구처럼 여겨지는데도 타이밍을 놓쳐 인사를 못 남기고 덧글도 생각만 하고 못 남기고 그랬어요. 저도 한수철님 글에서 언젠가 저도 보고 막 그랬는데요, 그때도 뒤늦게 봐서 인사를 놓치고.. 반가워요!

미주가 혼자 남았기에 그랬던 것 같은데, 이 사람들과 비슷한 사람들(궁극적으로 본인들 잘못이 아님에도 세상에 대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는 부류)이 `어떤날들`과 `우리가 묻어버린 것들`에 나오거든요. 그들은 행복해지지만 드라마 라스트 속 둘은 함께 떠나지 못하고 영원히 헤어지게 되는 게 좀 억울했고, 미주가 혼자 남아 가정을 꾸려 딸아이에게 자신의 얘기를 들려줄 생각을 하니 그 사랑과 세월이 애잔해서요.

기대하세요, `스톤 다이어리`는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두 권도요. 자주 뵈요^^

2015-10-28 12: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6: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6: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6: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9: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28 19: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진 2015-10-29 0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저는 막 킬빌을 보고 왔어요.
어떤 분하고 술 약속을 잡았고, 성사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요.
아이님, 저와 변요한을 연결짓지는 말아요. 부디.
아이님!!!!! 와락 ㅎㅎ

아이리시스 2015-10-30 21:06   좋아요 0 | URL
요즘 영화 보느라 바쁜 거예요? 좋다..킬빌..술 약속은 정말 안 어울리고(소이진님 술마신대! 이런 느낌)
변요한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는 한 소이진님은 계속 변요한..( ˝)
좀 참아봐요.. 그런데 막 새벽 3시까지 안 자고 뭐하는 거예요? 주말 잘 보내요. 2학기 시간표도 월요일 공강인가요?(월요일 맞나.. 금요일이었나..) 금토일월 이렇게 다 논다고 1학기때 그랬나.. 토일월이랬나.. 아 나이드니 저질 기억력이여.. (2학기도 그럴리 없어..)

2015-10-30 12: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0-30 2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