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즈오 이시구로가 쓴 순은 『창백한 언덕 풍경 1982』,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1986』, 『남아있는 나날 1989』이고, 내가 읽은 순은 1,3,2이다. 1을 읽을 때만 해도 3은 진작에 나와 있고 유명한데 2가 곧 나올 줄은 몰랐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순을 들춰보지도 않았고 작품연도도 눈여겨 보지 않았다. 『위로받지 못한 사람들 1995』, 『우리가 고아였을 때 2000』, 『나를 보내지 마 2005』, 『파묻힌 거인 2015』도 나와 있지만 3부작에 대해 기록하는 페이지다. 나는 나와있는 그의 작품을 모조리 읽었다. 아니다, 『녹턴 2009』이 남았구나. 도무지 못 넘는 단편의 장벽.. 옆에 뒹구는 김연수의 『스무살』..

 

삼부작이 한 권이라고 작가가 말했는데(『파리 리뷰』에서), 말하지 않았어도 아마 문학팬들이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전쟁-신념-행동-패전-회고-부끄러움-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일련의 이야기. 어떤 의미에서는 2세대 혹은 3세대, 부모-자식, 스승-제자 의 갈등과 화합이기도 할 것이다. 다음 세대는 늘 이전 세대를 긍정하는 동시에 부정하고, 잇는 동시에 단절하며, 연결하면서 능가하기를 원한다. 1은 자살한 딸과 떠나온 고향(나가사키) 친구(모녀)를 회상하는 엄마의 회상, 2는 노老화가의 회상, 3은 옥스퍼드 대저택 집사의 회상. 세 권의 공통점은 전쟁과 제국주의, 2,3의 공통점은 특정 직업을 가진 사람을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입으로 이야기를 진행한 것. 1은 예외인데, 읽는 중에도 세 권 모두 읽은 지금도 제일 아련하고 정교하며 우아하다. 엄마와 딸의 이야기라서인지 회상과 묘사가 가장 아름답다. 삼부작을 읽고나니 얼마 전 읽은-귄터 그라스가 십 대에 자원입대한 나치 친위대 활동을 고백하기 위해 쓴 자서전- 『양파 껍질을 벗기며』와 상통한다. 이 자서전은 귄터 그라스가 젊은 시절-10대부터 30대까지-의 회고록을 집필한 것이지만, 흑역사를 고백하는 바람에 형식상 결론은 그렇게 되어버린 면이 있다. 엄마, 화가, 집사, 귄터 그라스는 한때 신념을 가지고 행동했지만 이제 달라진 세상에 지난날의 흑역사를 고백하고 솔직히 사과(화해)하는 방법을 택한다.

 

물론 그 저녁의 몇몇 순간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던 척하지는 않겠다. 또한 상황에 밀려 신중함을 발휘해 그렇게 해야 할 상황이 아니었다 해도, 내가 그렇게 자진해서 지난날에 대해 그런 종류의 발언을 했을 거라고 주장하지도 않겠다. 그렇긴 해도 자존심을 소중히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이 과거에 한 일에 대한 책임을 오랫동안 회피하고 싶어 한다는 말은 이해하기 어렵다. 언제나 쉬운 일이 아닐 테지만, 한 인간이 삶의 과정에서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끗하게 인정함으로써 얻어지는 만족감과 권위가 틀림없이 있다. 어쨌든 신념에 차서 저지른 실수는 그렇게 부끄러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인정할 수 없거나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이 훨씬 더 수치스러운 일임이 분명하다.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p.171)

 

 

 

 

 

 

 

 

 

 

 

 

 

 

 

 

 

"기사부로는 불행한 사내일세. 그의 삶은 서글펐지. 그의 재능은 점점 스러지고 있어. 그가 한때 사랑했던 것들은 오래전에 죽거나 그의 곁을 떠났지. 우리가 젊었을 때에도 그는 이미 외롭고 슬픈 인물이었네." 모리 선생은 잠시 말을 멈춘 다음 다시 이었다. "하지만 이따금 술을 마시고 환락가의 여인들과 즐길 때면, 기사부로는 행복해했지. 그 여자들은 그에게 그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모두 해주었고, 어쨌든 그날 밤 동안은 그는 그 말을 믿을 수 있었어. 아침이 밝으면, 물론 그는 똑똑한 사람이어서 그런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지. 하지만 기사부로는 그런 밤들을 아침만큼이나 가치있게 여겼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곤 했지. 가장 좋은 건 밤과 일체가 되었다가 아침과 함께 사라지는 거라고 말일세. 사람들이 부유하는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 말일세, 오노, 기사부로는 그걸 제대로 평가할 줄 알았다네."

(중략)

"이제 그는 더 늙고 더 서글퍼졌네. 하지만 많은 점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어. 오늘 밤 그는 행복하네. 그 옛날 환락의 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는 마치 담배 연기를 내뱉듯이 긴 한숨을 토해 냈다. 그런 다음 다시 말을 이었다. "화가가 포착하고자 하는 가장 섬세하고 부서지기 쉬운 아름다움이 해가 진 뒤 환락의 집 안에 떠돈다네. 그리고 이런 밤들이면 말일세, 오노, 그 아름다움 중 어떤 것이 이곳 우리의 거처로 은연중에 스며든다네. 하지만 저기 있는 저 그림들은 그런 덧없고 꺼지기 쉬운 꿈 같은 그 무엇을 암시조차 못하지. 저 그림들에는 지독한 결점이 있다네, 오노."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 p.201)

 

주인공들 모두 직간접적으로 전쟁과 연관이 있고, 의도하든 의도치 않든 전쟁의 시절을 겪으며 가진-혹은 고수한-신념에 기반해 행동한 전력들이 있다. 시간이 흐르고 패전하면서 그들은 나빴지만 성취에 젖었던 시절을 수치와 신념이 뒤섞인 복합적 감정으로 떠올린다. 집사의 경우, 자신의 직업적 신념 때문에. 화가의 경우, 나이 찬 둘째딸을 괜찮은 집과 혼인 맺어주기 위해. 옮긴 문장들은 회상 중 가장 아름다운 부분들. 삼부작이 밑줄 그어 하고자 하는 주제와 가장 가깝다. 과거에 했던 일과 선택이 틀렸다고 해도 시간을 되돌려 다시 다른 결정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인정하고 고백하고 사과할 수는 있다. 용기와 정의는 어떤 점에서는 닮은 단어인지도 모른다. 해가 밝으면 별빛이 자취를 감추는 것처럼 당연하다. 

 

 

#밤과 일체되었던 모든 것들은 아침이 되면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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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5-11-0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럽습니다. 언제나 책을 에너지 넘치게 읽으시는 아이님을 보면...
국내 국외 할 것 없이 여행도 다니시고.
제가 원하던 삶이었는데...ㅠㅋㅋㅋ
그래서 그렇게 지난 여름 뵐 수가 없었나 봅니다.
요즘엔 자주 보게 되네요.^^
그런데 제목 앞에 Ep. 1, 2...는 뭘 의미하는 건가요?

아이리시스 2015-11-03 11:31   좋아요 0 | URL
별 걸 다 부럽다고 하시고.. 좋아하는 일이고, 특별히 매여있는 일이 없으니까요..^^
기름 많이 먹는 차라서 기름만 몇 십만원어치를 썼으니까요.. 담번엔 기차타기로 꼭.. 그래도 6월쯤인가 정동진 갈 때는 기차 탔습니다.. 비 오고 춥고, 15년 전 갔던 것보다 많이 변한 정동진 풍경이 낯설었어요. 바다는 여전했지만.. 뜸했던 건 맥북이 사망해서.. 완전 사망은 아닌데 켜면 승질이 나서 그냥 안 켜는 방법으로..

Ep. 는 에피소드인데, 리뷰/페이퍼가 저는 좀 긴 편이니까 생각날 때마다 까먹지 말고 짧게 남기려고(아무 주제나 막 하루에 하나씩 쓰는 느낌?) 했는데 점점 길어지고.. 이거 스텔라님 예전에 하루에 한 편씩 글 남기던 때 생각나요. 아마 그러진 못할 거지만..

좋은 하루! :)

stella.K 2015-11-03 12:20   좋아요 0 | URL
ㅎㅎ 그때를 기억해 주시다닛! 황송하여라...ㅠㅋㅋㅋ
아, Ep가 그런 뜻이었군요.;;

정동진이 그렇게 달라졌던가요? 저도 생각해 보니 가 본지가 20년쯤 되오나 봅니다.
올해 시작하면서 여행을 해 보리라던 불가능한 목표를 세웠는데
역시 이루지도 못하고 한 해가 가려나 봅니다.ㅠㅠ

아이리시스 2015-11-03 13:39   좋아요 0 | URL
그때 언젠가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
특별한 건 아니고 열여덟살인가에는 가족들과 차 갖고 갔거든요. 역을 아예 안 통해서 잘 몰랐을 수도 있고 기억이 왜곡됐을 수도 있는데, 예전엔 정말 한가로운 느낌이었는데 이제 수많은 게스트하우스들이.. 엄청 저렴하고 예쁜 게스트하우스들이 그 좁은 도시 기차역 앞에 오밀조밀하게 있는 게 신기했어요. 바다는 여기나 거기나 별 차이가 없었어요. 어릴 때는 강원도 바다가 정말 운치있고 드넓고 아름답게 느껴졌었는데..

장소가 중요한 건 아니니까 가까운 곳이라도 꼭 가시면 좋겠어요. 한번 가면 또 자꾸 가게 되니까..

2015-11-03 13:1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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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3 13:3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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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3 22: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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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3 23:2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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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18: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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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6 0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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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3 02: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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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3 21:5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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