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18세기 조선을, 사화와 붕당을, 숙종과 영조와 정조를, 연암과 다산을 좋아한다. 아마 조선을 통틀어 많은 사람들이 가장 흥미롭게 여기는 대목일 것이다. 그 복잡한 붕당의 흐름과 권력암투을 따라가다보면 그것이 있어서는 안될, 없어도 좋을 당파싸움이라는 사실과는 별개로, 현대와 얼마나 많이 닮아 있는지 또 융합되지 못한 다양한 목소리들이 있는지 놀라울 정도다. 무엇보다 이 시대 얘기들은 무궁무진하고 권력구도와 학문, 사상적 일대기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사람을 매혹시킨다. 팽팽한 긴장선을 타고 흐르는 시대의 봉인. 영정조 시대를 가르는 두 줄기. 연암과 다산. 이런 전무후무한 라이벌. 매력넘친다, 이분들. 평생 같이 갈 남자를 고르는 거면 조금 더 끌리는 스타일을 찾을 수 있는데, 인간적으로라면 그럴 수 없다. 너무나 상반된 분위기, 성격, 가치관이 그가 곧 그 사람이므로 가능한 것. 단점조차 인정해주고 싶은 연인이랄까. 생애와 시대가 밀착된 운명, 아름다운 블랙홀 속으로 지금 출발. 잘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연암과 다산의 생애와 명리학,양자역학적 사주 분석, 문체와 세계관, 사상과 윤리, 곁들어지는 붕당적 흐름까지. 붕당정치의 흐름을 교양 이상으로 잘 이해하고 있는데도 연암의 벗들이나 다산의 친인척, 정조 곁의 남자들 이름이 낯선 경우가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천재들. 그들은 왜 단 한 번도 공식적인 만남이 없었을까. <두개의 별 두 개의 지도>는 이를 시작으로 2년에 한 권씩 3탄을 계획중이란다. 두 별의 생애와 업적, 18세기 정치사상지도와 시대적 흐름 그리고 세계문명권 지성사로 넓혔다가 돌아오는 과정으로. 길고 먼 여행이 되겠지.

 

 

물과 불(불을 품은 물과 물을 품은 불). 지혜와 열정. 사건과 사실을 꿰뚫는 힘과 어둠을 밝히는 투시력. 유머와 박학. 좁쌀 한알과 세상 모든 진리. 완격과 급격. 파동과 입자. 수많은 해석과 모호함의 제거. 노론 '벽파'와 남인-성호 '좌파'.

 

앞이 연암, 뒤가 다산의 특징이다. 두 사람의 출생에 25년이라는 격차가 있었다.

 

'삼중주'를 위한 세 개의 연대기

 

연암 : 1737~1805년

정조 : 1752~1800년

다산 : 1762~1836년

 

 

이 연대기가 말해주는 것? 맘고생 하면 권력과 재물을 다 가졌더라도 단명한다. 정조처럼. 권력의 중앙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쳤던 연암이 살 만큼 살았고, 군주를 잃고 권력으로부터 멀어져 학자로 변신하여 18년, 해배되고 18년을 더 산 다산이 가장 장수한 걸 보면 욕심과 화를 놓고 편히 지내는 기간이 길어야 오래 살 수 있다. 권력과 재물 없이 길고 가늘게 살면 뭐하냐고 묻진 마시고.

 

어쨌거나 두 별 사이의 교집합은 조선의 '달' 정조였다. 연암은 느슨한 권력욕, 자유, 호방한 성격, 다산은 강한 집념과 천주교, 정조는 문체반정과 개혁군주로 요약된다. 연암은 쉰 이후 아내가 죽자 생계형 관직에 딱 한 번 진출한 이외에는 관직과 멀어지려 애쓰는 삶을 살았다. 능력이 특출했기에 군주의 부름을 수없이 받지만 한사코 긍정의 응답을 사양한다. 다산은 달랐다. 과거에서 일부러 백지를 내거나 쓸데없는 글을 끄적이다 나오는 연암에 비하면, 다산은 어릴 때부터 차근차근 관직으로의 진출을 꿈꾸었다. 대과에 네 번 낙방하지만 합격 후 왕이 내는 과제를 매번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할 만큼 훌륭했다. 정조가 시도한 '초계문신'이나 '문체반정'은 정치와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였지만 '문체반정'은 사실상 흩트러진 조선의 성리학적 기반을 다스리고 군주의 권력을 확고히 하는 목적에서 시행되었다. 개혁정치가 아니라 보수정치였던 셈이다.

 

벗과 가문, <열하일기>와 <목민심서>, 연암협과 다산초당, 문체와 서학(천주교). 성리학적 기반과 강상의 모든 것을 뒤엎고 유일신(군주)을 해체하며 평등을 주장하는 천주교 교리가 사실상 서양의 학문으로 들어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학문이었기에 더욱 타당성을 가질 수 있었고, 대가없이 목숨 바치는 순교자가 늘어났다. 문체반정은 실패했지만 이 '반정'이 조선 시대의 다른 반정(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과는 다른 모습, 색다른 방향의 개혁구도인 것만은 분명하다. 타이르고 어르고 벌하고 유배하는 식으로 어긋난 것들을 바로잡을 거라 믿었던 어진 군주의 순진한 판단인지는 몰라도. 다산은 원칙주의자에 도덕주의자다. 정조의 개혁을 성공시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타당하다고 여긴 듯하다. 비록 어디에도 들어맞지 않는 유머와 패러독스를 구사하는 연암의 문체를 군주와 함께 눈감아버림으로서 갈길을 잃어버리지만 말이다. 자신은 배교하지만 피해갈 수 없었던 가족들의 피바람.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던 군주. 군주의 죽음 후 닥친 신유박해. 다산의 삶은 천주교를 빼놓고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문체와 서학은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 세계화와 맞물리지만 성리학적 지반을 뒤흔든다는 이유로 극렬한 변주를 시작했고, 많은 목숨을 희생시킨다. 서학으로부터 비교적 멀리있어 인정하거나 인정하지 않을 근거를 갖지도 못한 연암, 서학이 아니라면 후반부 인생을 설명할 수도 없는 다산. 이렇게 두 사람. 균열과 불길에 휩싸이며 꿋꿋하게 나아갔던 신념과 평행가도를 달리는 정반대의 삶, 그 운명이 돋보인다.

 

 

 

 

 

 

 

 

 

 

 

 

 

 

 

 

 

 

신기하다. 무신정권과 대동법이 그런 것처럼 연암 출생부터 다산 사망까지 100년. 영조는 조선역사상 가장 긴 52년의 재위기간으로 유명하고, 정조는 스물 다섯에 왕위에 올라 약 25년간 자리를 지킨다. 가장 개혁적인(보수든 진보든) 시도를 했던 두 왕의 사후, 조선이 급격한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걷는다는 것도 눈여겨볼 점이다. 그 세도정치기가 60년이 넘어간다는 것도, 이후 외세의 개방요구에 한없이 직격탄을 맞았다는 것도.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할아버지를 향한 애증을 모두 가졌던 정조는 탕평책, 법전편찬 등 할아버지의 업적을 이어가는 의아함을 보여준다. 폭군이 되지 않았다. 권력의 무자비를 휘두르지 않는 대신 학문과 개헉으로서 나아가고 싶어했다. 영정조 시대는 거의 77년이다. 연암과 다산이 왕에게로 통한 행태 역시 다르다. 한쪽은 가능할 때까지 도망갔고, 한쪽은 죽을 때까지 해바라기 사랑을 퍼부었다. 다산을 믿고 의지하고 높이 평가한 건 맞지만 왕이 신하 한 명에게 모든 것을 걸었을 리 없으니 다산의 군주를 향한 사랑이 더 맹목적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심환지에게 보낸 비밀어찰인 '정조어찰첩'을 통해 밝혀진 걸로만 봐도 정조는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인맥으로 통치했다. 정조 시대의 측근으로 늘 다산이 등장하는 이유, 정조만 들어도 단 하나의 얼굴이 떠오르는 이유, 그게 바로 반복과 주입이 주는 교묘한 세뇌라할 수밖에.

 

다산이 학자로 변신한 것은 유배지에서다. 군주를 잃은 후 닥친 피바람이 그를 정숙한 학자로 만든 원동력이었다. 연암이 <열하일기>만을 남긴 데 비하면 다산의 저서는 나열하기도 벅찬 양이다. 다양한 주제의 사상적 텍스트들은 질적으로도 우수하다. 그의 시선과 마음은 늘 궁을 향해 있었다. 유배지에서의 많은 나날, 이미 없는 군주를 그리워하며 시대에 대한 애환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을까. 연암이 훨훨 날아가듯 썼다면 다산은 주석과 인용을 통한 잘 짜인 백과사전식 구축에 힘을 쏟았다. 다른 사람이 가지 않는 길을 여행하며 붓 가는 대로 물 흐르듯이 쓴 <열하일기>와 목민관에서 지켜야 할 수령의 도덕적 지침서로 여겨지는 <목민심서>가 서로 다른 문체를 잘 설명해준다. 연암은 자신을 깨진 조각으로 여기며 전체에 필요한 일부가 되려 했다. 호기심 대왕, 유연한 지성, 호방한 성격, 폭발하는 역마살을 가진 그의 인생은 소리없이 흘렀다.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한문소설과 시짓기에 능했고, 성리학과 북벌론이라는 거대담론에 휩싸이지 않았다. 반면 다산은 세세한 사항에 집착했다. 세밀한 디테일과 방대한 주석이야말로 맞아떨어지는 대목이다. 청렴과 절욕, 윤리적 내공 등 덕을 지닌 학자가 도달할 수 있는 도덕성에 기반을 둔 삶이다. 명랑과 진지. 두 사람의 기질은 고루 섞여야 마땅했다.

 

천 개의 '고원'과 천 개의 '계단', 유머와 패러독스 그리고 리얼리즘과 파토스. 쭉 읽어가다 알만큼 알게 되었을 때 이제껏 알던 모든 지식과 합쳐지면서 이 두 가지의 비교가 결국 두 개의 별을 밝히는 모든 것이라는 결론이 섰고,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개인사, 사상사, 생활상, 정치사까지 훑어내려온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백 년의 시간이 순간처럼 여겨지기 시작할 때 나는 비로소 지금까지의 독서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다. 나에게는 고문이 어렵다. 적어도 아직은 <목민심서>나 <열하일기>를 읽을 능력은 되지 않는다. 연암과 다산이 지향하는 주제 역시 결국 같은 얘기였겠지만 상당부분 달랐다. 양반과 탐관오리의 무능과 허위를 비판하거나 밑바닥 백성들의 삶을 어루만지는 여러 소설들에 드러난 풍자와 역설이 연암의 소설에서 드러난다면, 적나라하게 표출된 비장한 현실의 재현 속 고난과 분노와 격정을 드러내는 건 다산이었다. 서로 다른 글쓰기는 주제든 문체든 그 자체 측면에서 태생적 한계와 생애, 가치관과 세계관을 반영한다. 부조리와 저항 정신만은 꼭 닮았다. 두 사람의 시대를 향한 애증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같은 시대를 이토록 다른 방식으로 살 수 있다니. 심지어 먼저 간 지인의 묘비명 짓기에도 뛰어났던 이들의 차이는 애도와 증언인데, 지인의 다한 생을 두고 연암이 시를 지었다면, 다산은 증명하고 요약했다. 차이의 향연과 의미의 명징성, 프리랜서와 정규직, 에세이와 백과사전의 차이. 그들이 서로를 건드리지 않거나 만나지 않았던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 대한 이러한 차이를 잘 알았고, 결코 융합되지 못하리라 여겼거나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후자였으면 좋겠다.

 

 

 

 

 

 

 

 

 

 

 

 

 

 

 

 

 

<정조와 18세기>는 스스로를 태양과 달로 표현한 군주 루이 14세와 정조를 비교, 지금껏 개혁군주로 통한 정조에 대한 보수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새로운 시각을 담았다고 신문 북세션에서 소개하던 책이다. 심한 학술서 냄새, 이런 책이 교양도서로 자리잡을 리도 없지만 그나마 가장 개혁가였던 정조를 보수주의자로 결론내리면 내 사랑 정조, 그 이미지가 깨어지는 건 슬픈 일인데, 어떤 개체가 반드시 한 가지 평가로 귀결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예전에 <사도세자의 고백>을 읽고 사도세자가 왕인 나라에 살고 싶다고 썼던 기억난다. 아, 그래서 역사와 시각이 진보하고, 덩달아 독서도 진보하는 거라니까. 고집이 세서 태생상 팔랑귀는 절대 될 수가 없지만 역사를 어쩌나. 자, 제가 나서서 진실을 구하겠습니다,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최근 학계의 다수설은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가 당파정쟁의 희생양이기보다는 살인을 서슴지 않던 미치광이였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한사코 자결을 거부했고, 그 더운날 뒤주에서 홀로 몸부림치다 외롭게 죽었다는 것. 어쨌거나 왕위를 이어야 할, 조선의 미래를 짊어진 세자가 뒤주에 갇혀죽은 사실이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닌데다, 이쪽이든 저쪽이든 충격이 거듭되고 있다. 진실은 하나일텐데 새로운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시각은 뒤집히지 않는다. 역사의 어떤 사건을 두고 다수의 힘으로 밀어부치거나 지나친 소설짓기는 불편한데, 그렇다면 재미로 보면 그만이라는 사극도 문제가 된다고 본다. 김태희가 연기하는 장옥정은 인현왕후와 영혼체인지한 것 같다. 비난하기 위해 읽는다는 말도 있으니 난 언제나 그저 보고 읽을 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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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21:1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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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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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2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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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1 2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6-23 04: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리뷰를 쓰려고 했지만 페이퍼로 변질된 이야기. 이유는 에피쿠로스와 인문주의자들, 에라스무스와 토머스 모어 그리고 몽테뉴 덕분이다. 그런데 이 이름들은 정말이지 이 책을 대하는 아주 쉬운 일부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기원전 1세기, 사물의 본성에 대해 쓴 로마 시인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루크레티우스였다. 에피쿠로스의 계승자였던 그의 원자론은 중세의 세계관으로 볼 때 위험천만한 내용이었고,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 책은 고결하고 끈기 넘치는 한 책사냥꾼에 의해 발견되어 그간 지켜져온 총체적 우주질서와 종교적 신념을 뒤엎는다. 제목은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학자들은 이 책이 발견된 순간을 근대의 탄생이라 표현한다.

 

 

 

 

 

 

 

 

 

 

 

 

 

 

 

이렇게 서로를 소유하는 동안에도 연인들의 열정은 불확실성 속에서 솟구치며 방황한다. 자신의 눈과 손으로 먼저 무엇을 즐길지를 결정하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의 욕망의 대상을 강하게 움켜쥐면서 육신에 고통을 가져오고, 대부분의 경우에 상대의 입술에 이를 들이밀면서 서로의 입을 거칠게 부딪친다.  -루크레티우스

 

-<1417, 근대의 탄생>, p.247

 

 

이 순간도 언젠가 역사가 될 것이다. 30세기에도 지구가 굳건하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이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겠지. 그치만 개인적으로 30세기에 지구와 인간이 없어졌으면 좋겠다. 어쨌거나 닭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고, 책이 발견되든 괴생명체가 나타나든 세계는 변화한다. 고대의 희귀본 하나를 발굴한 중세의 책사냥꾼이 르네상스(근대)를 연 것처럼 말이다. 철학과 사상을 쭉 공부해왔다면 다르겠지만 생소한 고대 철학자와 정치가는 물론이고, 고대 문헌의 철학적 내용까지 사유해야 한다는 게 여간 까다로운 일이 아니다. 크게 보면 라틴어(중세 로마어)를 잘 배운 한 남자의 책사냥기, 사실상 고대중세와 근대의 핵심을 이해해야 하며, 포조와 루크레티우스를 비롯한 철학사상가들을 알아야 한다.

 

1390년대 말 청년 포조 브라촐리니가 발들인 어두침침하고 좁은 도시, 페스트의 그림자가 주기적으로 덮쳐오던 중세의 피렌체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어떻게 기회의 도시 로마로 진출했는지, 중세에 '책'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지, 필사가의 지위란 얼마나 경이로운지, 교황청 공증인이자 필사가로서 권력 제일 가까이 다가갔던 포조가 혼란한 정치상황 중 어떻게 일자리를 잃었는지 알아야 한다. 발굴한 후 정작 필사본을 소유하지도 못하고 그 소유의 첫 필사본이 후대에 전해지지도 못하지만 그로인해 개인적, 문화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포조의 중년과 말년이 어땠는지, 그가 원한 사회는 어떤 것이었으며 인문주의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어떻게 고수할 수 있었고 또 희망은 어떻게 깨어졌는지.

 

 

교회는 세상의 중심이었고 극단적이었으며 맹목적 믿음을 요구했다. 포조보다 몇십 년 앞섰던 시인 페트라르카와 살루타티의 인문주의는 단순히 괜찮은 고대 양식의 모방이 아니라 그를 넘어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더 큰 목표가 있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모든 면에서 폐허와 치부를 드러낸 채 부패하고 있었는데, 페트라르카를 이은 포조와 교황청 사무국의 인문주의자들은 살아있는 장(場)에서 비로소 냉소, 혐오, 염세주의, 비관주의와 대치하기 시작한다. 수도원은 면죄부를 남발하며 각종 음모와 속임수, 위협과 고문을 서슴지 않았고 신의 이름으로 살인마저 묵인한다. 포조는 어리석음과 사악함으로 가득 찬 이 시대를 로마 옛 영광의 애처로운 그림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교황청의 계속되던 권력 다툼 아래 발다사레 코사가 수십 가지의 혐의로 고발 당하고 공식적으로 퇴위된 1415년, 주인 잃은 포조는 실직자가 된다. 근근이 같은 일을 이어갈 수는 있었지만 과감히 거절하는데 이는 다른 꿈이 있었고, 더 이상 방관자로 비굴하게 지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독서와 사라진 고전 문헌에 대한 열정이 다시 한 번 책사냥꾼의 기질을 발휘하게 하면서 1416년 갈렌 수도원에서 퀸틸리아누스의 <연설 교육론> 전권을, 1417년 풀다 수도원에서 루크레티우스의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를 찾아낸다.

 

강렬한 서정적 아름다움의 순간, 종교에 관한 철학적 명상, 쾌락, 죽음, 물질계, 인간 사회의 발전, 성의 위험과 즐거움, 그리고 질병의 본질 등에 관한 복잡한 이론들을 하나로 아우르고 있다. 시의 언어는 대체로 까다롭고 어려우며, 구문은 복잡하고, 전체적으로 놀랄 정도로 수준 높은 지적 야망으로 가득하다.

 

-<1417, 근대의 탄생>, p.229

 

그렇다면 이 시인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표현했기에 '발견한 일'만으로 암흑기를 닫고 재생의 시대를 여는 일이라고 했을까. 설명과 함께 잘 정리된 챕터가 있다.

 

                            루크레티우스,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주장 - 펼치기

 

 

사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입자들로 만들어진다.

물질을 구성하는 기초 입자인 '사물의 씨앗들'은 영원하다.

기본이 되는 입자들은 그 수는 무한하나 형태와 크기에는 제한이 있다.

모든 입자는 무한한 진공(void)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우주에는 창조자도 설계자도 없다.

사물은 일탈(swerve)의 결과로 태어난다.

일탈은 자유의지의 원천이다.

자연은 실험을 멈추지 않는다.

우주는 인간을 위해서 혹은 인간을 중심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인간은 특별하지 않다.

인간 사회는 평화롭고 풍부하던 황금시대에 시작된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원시의 전쟁 속에서 시작되었다.

영혼은 죽는다.

사후세계는 없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모든 체계화된 종교는 미신적인 망상이다.

종교는 일관되게 잔인하다.

천사니, 악마니, 귀신이니 하는 것들은 없다.

인생의 최고 목표는 쾌락의 증진과 고통의 경감이다.

쾌락에의 가장 큰 장애물은 고통이 아니라 망상이다.

사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은 깊은 경이로움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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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왕정복고기 대표문인 존 드라이든(1631-1700)은 만족할 줄 모르는 성욕의 성질, 동일한 사랑행위의 반복, 반복된 행위에서 오는 쾌락, 사랑의 감정적인 고통을 공격적인 충동과 황홀경 사이의 갈망으로 이해한다. 첫문단에서 인용한 루크레티우스의 성과 즐거움(사랑이든 아니든)이 그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나면 더 아름다운 표현으로 변한다.

 

...젊은 한 쌍의 연인이 더욱 가깝게 결합할 때,

손과 손을 마주 잡고, 허벅지와 허벅지를 휘감을 때,

가득 찬 욕망은 부글대는 거품처럼 끓어오르고,

두 사람이 서로의 몸을 누르고, 함께 속삭이고, 함께 숨을 내쉴 때,

그들은 움켜안고, 꼭 짜내듯 쥐고, 촉촉한 혀로 서로를 찌르니

서로 상대의 심장을 향해 나아가지만 헛되도다.

그들은 단지 주변만 유람할 뿐이니,

육신은 꿰뚫을 수 없고 서로의 육신 안에서 어쩔 줄을 모르나니

아무리 그러려고 애써도, 둘이 엮인

격동적인 순간의 분노 속에서 더 확연해질 뿐이라.

그들이 누운 사랑의 둥지 속에 그렇게 뒤엉켜

넘치는 즐거움 속에 녹아내릴 때까지 그러하리. -1685, 존 드라이든

 

-<1417, 근대의 탄생>, p.248

 

 

 

 

중세인들은 비로소 전지전능한 신, 우주의 중심이자 만물의 기원인 인간, 정통 기독교인의 눈에 비친 과학, 잘못된 환상, 쾌락과 관능의 마법에서 풀려난다. 고대로부터 내려온 루크레티우스의 시가 할 수 있는 일이었고, 해낸 일이었다. 물론 우여곡절이 많았다. 영혼의 존재와 사후세계를 부정하고, 우주가 원자와 진공으로 이루어졌으며, 전지전능한 존재는 없고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주장은 충격적이면서 지금까지의 우주질서와 기독교가 지배하는 사회를 모조리 부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어서, 루크레티우스의 책은 아주 오랫동안 금서 혹은 숨어서 몰래 보는 책으로 정의되었다. 포조가 발견했을 때 당연하게도 수도원에서는 이 책을 빌려주지 않았다. 필사가를 구하라는 닦달이 있을 뿐이었다. 힘겹게 필사한 결과물을 포조가 피렌체의 니콜로 니콜리에게 보냈고, 니콜리 역시 필사한다. 니콜리의 필체가 예술적이었는지 그의 사본은 이후 수십 여 개의 필사본의 기초가 되었다. 포조가 니콜리에게 전하기 전 독일인 필사가를 고용해 만든 최초 사본은 전해지지 않으며, 니콜리의 것은 9세기의 필사본을 베낀 포조의 것을 필사한 것으로 로렌치아나 도서관에 보관 중이다. 책은 그 이후로도 10년 이상 니콜리의 책장에 잠자다가 필사본 제작, 인용, 책의 내용을 암시하는 글귀, 미묘한 영향력을 나타내는 표시로 나타나기 시작해 곧 다른 곳으로 퍼져나간다.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세상을 떠돌다가 금서의 운명을 피하지 못한 채 인쇄술이 발달할 때까지는 필사본으로, 인쇄술 후에는 기독교 눈을 피해 읽히던 책을, 우리는 바로 지금 여기서 서점으로 주문 한 통만 넣으면 받아볼 수 있다.

 

 

'죽음이 운명의 굴레에서 우리를 구출한다'는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루크레티우스에게로 계승된다. 여기서 쾌락은 고통을 제거하는 것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무한대의 욕구충족과 거리가 있는, 더이상은 갈증이 없는 상태/배가 고프지 않은 상태의 그것이다. 물을 마시거나 배터지게 먹음으로서의 향락이 아닌 갈증과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 고통의 부재, 정신적 쾌락을 의미한다. '절제'의 측면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과도 연결되며, 아타락시아(ataraxia)로 통한다. 충분한 것을 적다고 여기거나, 오늘 배터지게 먹고 내일 다이어트하는 현대인들을 이 이론으로 비판할 수 있다. 신과 교회(교황)가 곧 모든 것인 중세에 죽음과 사후세계를 부정하고, 종교와 지배계급에 비난의 여지를 남기는 회의주의가 환영받았을 리 없다. 추종자들의 수가 적지 않았지만 늘 수면 아래에서만 활동할 수 있었던 에피쿠로스 학파의 쾌락주의는 낙원, 종교적 믿음에 대한 확신, 죄 없는 사회를 주장하던 중세의 세계관으로 볼 때 이단이었고,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처럼 처형될 가능성도 있었다. 포조는 그런 가운데 한 권의 책을 찾아냄으로서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기 시작했던 것이다. 도미니쿠스회 소속 수도사 조르다노 브루노는 바로 이 책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로 인해 세계관과 믿음을 바꾸었고, 얼굴에 십자가형을 당한 채 화형되었다. 믿음과 신념은 목숨보다 강했고, 그럴수록 루크레티우스의 시는 더욱 강력한 힘으로 세상에 울려퍼졌다.

 

브루노의 표현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눈멀고 악의적이며 거만하고 시기심 많은 무지의 동굴 아래 파묻혀 있던 고대의 진정한 철학이라는 태양이 떠오르기에 앞서, 새벽을 알리는 자가 되도록 신들이 임명한 사람이다.

 

-<1417, 근대의 탄생>, p.298

 

 

 

포조와 루크레티우스 사이에는 무려 1500년 이상의 강이 흐른다. 중세의 필사가들, 현대의 독서가들과 닮았다. 책을 수집하고 모으고 진열하고 먹는다. 책벌레, 습기, 곰팡이, 양피지와 라틴어, 희랍어와 싸우던 고대 중세에 비하면 더 많은 책, 더 난해한 책을 우걱우걱 씹어먹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아야 한다. 책은 때로 나이와도 비례하지 않는다. 당연한 게 조금 두렵다. 쉽게 따라잡기도, 따라잡히지 않기도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인가. 책 한 권을 발견하고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걷고 달려 발견, 필사, 전도했을 때의 즐거움을 현대인들은 잊은 지 오래지만, 인쇄술이 발달한 시대를 살아가는 것만큼은 행운이다. 나는 책구입증이나 책보관증에 걸린 욕심쟁이는 아니다. 뿌듯한 건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의 희열이지 책을 사는 순간 자체는 아니다. 다행이다. 책 둘 공간이 없어 가족을 죽이거나 무게에 못 이긴 바닥이 폭삭 내려앉을 염려는 없으니. 그러나 이와 비슷하거나 행여 다른 이유로 오늘도 쌓인 책 사이 어디쯤에서 괴로워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이 열린 이후로 책이 없는 시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살았을 뿐.

책은 그렇게 인간 역사 너머로부터 인간을 위해, 인간에 의해 세상을 오갔다. 그것이 책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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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1 21: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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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3 04: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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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월드 - 가장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 피카소의 삶과 예술 이야기
존 핀레이 지음, 정무정 옮김 / 미술문화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예술가의 얼굴이라곤 카뮈만 겨우 떠올리는 내가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피카소(1881-1973). 스페인 말라가 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한 입체파 화가이자 르누아르, 렘브란트, 뭉크, 고갱, 고흐, 고야, 마네 등의 영향을 받았고, 거트루드 스타인, 장 콕토, 기욤 아폴리네르와 친구로 지냈다.

전쟁의 참혹상을 그린 <게르니카, 1937>,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아비뇽의 처녀들, 1907>, 1950년 미군과 한국군이 진주한 북한 황해도 신천군에서 일어난 양민학살 소식을 듣고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1951> 등이 대표작이다. 아버지 돈 호세 역시 화가이자 교사였으며, 어머니는 넘치는 에너지와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피카소의 화풍은 크게 청색 시대(1901-4), 장미빛 시대(1904-6), 입체주의 시대(1908-15)로 구분된다. '청색시대'는 1900년 파리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맥주 겸 여인숙으로 알려진 네 마리 고양이(4 cats) 카페에서 카탈루냐의 모더니즘, 강한 무정부주의적 또는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극작가와 문인들을 만난다. 미술, 문학, 음악, 시, 정치 그리고 철학의 다양한 사상에 대해 배워나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00년 10월에 피카소는 시인이자 화가였던 친구 카를레스 카사헤마스와 함께 파리를 여행하였다. 피카소는 열일곱 살이었던 1899년 봄에 이 지적이고 매력적인 카사헤마스를 만났다. 카사헤마스는 고군분투하는 데카당파로서 자기 파괴적이고 가난하며 격정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는데, 비극적이게도 알코올과 모르핀에 중독된 상태였다. 카사헤마스는 18개월 후에 자살을 하는데, 이 사건은 피카소와 그의 청색 시대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p.14)

검푸른색이나 짙은 청녹색을 사용하여 죽음이나 파리의 사교계, 고급 매춘부 등의 소재로 가난하거나 소외된 자들의 고독을 주로 그렸다. 유학 온 피카소가 낯선 파리 화단에서 겪었던 이방인으로서의 우울을 드러낸다.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되고 이 때부터 빨강, 노랑, 장미빛 등의 색이 사용되어 밝고 따뜻한 느낌으로 그림이 변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장미빛 시대'로 부른다.



파리에 정착하기 전의 피카소는 다양한 모색을 통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고전적 모티프를 탐색하며 그가 찾은 것은 거리의 유랑극단과 서커스 공연자의 도상이었다. 곡예사, 공연자, 어릿광대, 익살꾼들을 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전통적으로 제3자로 간주되던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서툰 불어실력이 유랑과 사회적 고독에 중첩되었을 것이며, 낭만이라는 관념과도 연계되었다.

1904년부터 파리에 정착한 피카소는 1907년 파리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사 박물관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조각품과 가면들을 보았다. 이후 나온 작품이 유명한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이다. 매춘과 타락에 대한 반박으로도 읽히며, 죽음 충동, 메멘토 모리, 사드를 숭배하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영향을 받는다.

그는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부족미술의 어떠한 관계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피카소의 원시주의 및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충격과 강렬함이 이 초자연적 현실을 그리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준비스케치나 이 그림이 미친 효과, 이후 작품경향이 적실하게 보여준다.



피카소와 곧 첫 번째 부인이 될 러시아 발레 무용수인 올가 호흘로바와 프랑스 시인이자 문인, 미술가, 영화제작자인 장 콕토와 찍은 사진이다. 피카소는 1908년경 입체주의 공동창시자로 평가받는 조르주 브라크(1882-1963)와 입체주의를 고안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1915년까지 전개되며 미술에 있어 재창조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대변한다. 입체주의는 새로운 재료와 사물에 대한 탐구를 자극하여 전통적 묘사를 넘어서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콜라주, 파피에 콜레, 구성과 아상블라주 기법의 창안을 자극하였다.

마법의 근원을 소위 원시 문화에서 찾는 프로이트의 생각은 대체로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종교적 관습에 관한 기본적인 저서로 간주한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1890-1915)에 상당 부분 뿌리를 두고 있다. 정신분석학자와 인류학자의 가정은 프랑스와 독일의 전위 그룹 사이에서 종교나 마법의 원리와 관련한 원시적 스테레오타입을 유행시키고 확정짓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야수주의자, 입체주의자, 초현실주의자와 같은 모더니스트 미술가 집단은 '원시 숭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확립하기 위해 아프리카 미술을 차용하였다.(p.65)



1920년대 초, 피카소의 회화는 <목욕녀들, 1918>을 필두로 <올가의 초상, 1923>, <판의 피리, 1923>, <경주(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1922>처럼 평화와 몽상, 환락을 주제로 변화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고전주의, 자연주의, 입체주의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뒤섞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른쪽 페이지 윗그림 <경주>는 티치아노의 <바커스와 아리아드네, 1520-22>를 참고로 그린 작품으로 짐작, 술의 신 바커스를 방종한 행위의 원인으로 묘사한 신화적 주제를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디오니소스적 흥분과 바커스적 춤에 몰두한 여성이라는 주제가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의 관계를 확고하게 그렸다고 해석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초현실주의적 혁명에 들어서는 피카소는 1930년에 <초현실주의 제2선언, 1930>이라는 작품으로 그 정의를 확고히 한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그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았기 때문인데,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이념과 이미지에 전적으로 동조한 적이 없지만 서서히 회화의 위기를 인정하면서 동조의 입장으로 변해간다. 미신적 성향, 비이성, 광기, 정신착란 그리고 욕망에 대한 초현실주의자들의 탐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는다.

여전히 버리지 못한 고대 투우의 말라가 출신의 안달루시안으로서의 피카소의 문화적 정체성은 <게르니카, 1937>에 묘사한 투우 이미지에서 언급된다. '전쟁과 폭력에 대한 혐오'를 표현한 이 작품은 정체성의 혼돈, 투우에 기초한 폭력적 주제, 고대 신화 속의 야수를 콜라주하여 신화적 피조물로서 그린 희생 의식이나 제의, 종교의 관습 등을 전쟁, 학살, 전투, 의식, 십자가 처형, 이교적 희생의식과 같은 신화적, 역사적, 종교적 주제에 뿌리를 내리고 그렸다. 더불어 개인의 갈등이나 정체성의 이해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정체성을 시각화한다.

실제로 이 시기 아내 올가 호흘로바와 아들 파울로와 함께 투우를 보기 위해 연속 세 번이나 스페인을 방문하였으며 곧 결혼이 파국을 맞는다. 1933년에서 37년까지 그려진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투우 이미지에서도 가장 기념비적인 <게르니카>는 1937년 4월 26일 나치 콘돌 군단에 의한 융단폭격을 둘러싼 비극적 사건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1940년대 피카소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기념비로 생 제르맹 데 프레 광장에 놓인 조각 <도라 마르의 두상, 1941>을 비롯해 조각가로서의 작업에 몰두한다. 이교와 기독교, 홀로코스트, 집단 수용소에서 희생된 자들에 대한 메멘토 모리, 마술적 페르소나 등의 추상과 부재, 상실, 슬픔 등의 초현실적인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적인 특징 가운데서도 가장 또렷한 특징을 보인다. 전쟁에 대한 불안과 도발적 분노, 일촉즉발의 상태와 파멸, 고독과 평화, 은둔, 자기반성의 징후와 파토스, 생애 말년의 무기력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피카소의 전형적인 샤머니즘적 행위, 즉 노령을 거부하고 병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 본성, 상상력을 이용하여 공포와 유약함을 드러낸 것이다.(p.175)

오리엔트적 관심을 반영한 <알제의 여인들, 1955>, 벨라스케스 작품을 토대로 제작한 45점의 유화 중 하나인 <시녀들, 1957>, <사비니 여인의 약탈, 1962>, <한국에서의 학살, 1951>이 억압과 전쟁의 희생자,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를 형상화시킨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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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2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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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03:0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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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19: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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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19:3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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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1 08: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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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4 16:3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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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도 사람도 다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또렷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것들이 있다. 아버지의 삶에 대한 이야기지만 이 소설을 읽으며 우리 아빠와 아빠의 삶에 대해 떠올리지는 않았다. 이 세상 부모들은 다 가여운 존재니까, 그래서 부모되기를 두려워한 이십대를 보냈지만 그 지독한 환멸은 사실 아이에 대한 나의 모자람이 걱정돼서가 아니라 아이를 가진 주변인들의 뻔뻔한 자기과시로부터 올 때가 많았다. 물론, 아빠의 청춘에도 눈물 없이는 못듣는 사연이 제법 되지만, 그걸 글로 옮기지는 않으련다. 경험보다는 생각을 담고 싶기도 하고, 경험이 생각을 따라잡지 못하리라는 희미한 체념의지를 느낀다. '영원한 청년작가'의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이번 소설도 그 서정성을 한껏 드러낸다. 소금이 상처에 닿을 때의 쓰라림. 땀흘리며 일하는 늙은 등을 사랑한다. 정확히 말하면, 땀자국으로 시큼해진 우중충한 색 티셔츠와 쪼글쪼글한 손바닥과 시꺼매진 손톱이 말하는 세월, 까칠까칠 촉감을 나는 아버지라 여긴다. 나쁘게 말하면 세상을 아름답게 혹은 서정적으로 보려는 작가의 취향 혹은 의도이겠지만, 그래서 그를 현실적이거나 실체적이지 못하고 감성 안에 머무는 작가라고 평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가끔 읽는 그의 소설에서 느껴지는 그 감정과잉의 애절함을 좋아한다.  

 

스무살 생일파티를 앞두고 디지털카메라를 사오기로 한 그가 언덕배기에서 되돌아 내려가는 뒷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만 해도 이토록 오랫동안 찾아다녀야 할 줄은 몰랐다. 첫사랑, 청춘, 애착, 취미, 호오,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모르는데 무엇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찾아서 뭘 어쩔 것인가. 왜 찾아야 할까. 찾아나서긴 했지만 반드시 찾아야 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사라지고서야 비로소 통장잔고와 빈자리, 잊혀진 이름 세 글자로 뚜렷하게 남겨진 사람. 제 청춘과 시간을 잔뜩 바치고야 우리를 얻었던 사람. 유일하게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우리의 행복을 빌어주었을 사람. 평생 그래야 할 사람. 그래야 했던 사람. 그래서 당연했던 사람. 아무 것도 아니던 사람. 알려고도 하지 않던 사람. 자식을 위해 악착같이 세상의 치사함과 더러움을 참아낸 사람. 이름만으로도 심장 한 조각이 뭉텅 잘려나간 듯 그리움이 차오르게 하는 사람. 

 

사람들은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땐 아버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요즘은 알아. 그 양반이 당신의 꿈을 버리고 치사해져버렸기 때문에, 그나마 내가 배우고 굶지 않았다는 거.

 

알까. 숨바꼭질처럼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숨겨버린 그로 인해 세상을 배웠다는 걸. 스무살 어린 딸이 서른의 어엿한 여자로 자랄 때까지 아버지는 무엇을 해줘야 했을까.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아빠는 프린터 잉크를 갈아주기 위해 프린터를 들고 동네 문구점으로, 진통제를 얻기 위해 약국으로, 시골집에서는 갑자기 필요해진 생리대 패드를 사주기 위해 읍내로 뛰어가는 사람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다른 동네에 있는 학교까지 매일 등교를 시켜주었고, <인셉션>을 함께 보러간 남포동 극장에서 덥다며 하드를 함께 사먹고, 정작 상영중에는 뭔 영화가 저래, 라면서 계속 졸던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가 특별히 살갑거나 따뜻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모든 아빠들 속에는 다 저런 마음이 있는 거였다. 실패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릴 만들던 순간부터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 덜 여문 나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기억하는 단 한 사람을 십 년간 찾아헤매는 이야기, <소금>은 자리를 뺏음으로서 비로소 이 시대, 이 가정, 이 관계의 아버지를 다시 써내려간다. 모든 부모들의 진혼곡. 그리고 소금. 바람과 햇빛의 밀도에 따라 그 맛과 형태를 달리하는 놀라운, 어렵게 얻어 더 소중한 한줌이다. 파도와 햇살의 풍파를 온몸으로 받아내고도 고유의 성질을 잃지 않고 살아남은 흰 가루. 자식처럼 공들여 키워내지 않으면 안되는 예민한 물질. 소금이 만들어지는 자연과 과학의 놀라운 조화와 그가 소금이고자 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소금이 음식에 그런 것처럼, 아버지에게 자식이 그렇다. 쓰게도, 달게도, 맵게도, 짜게도 하는 것. 그래서 애물단지가 되어버리는 것.

 

우리나라 소금, 천일염은 향과 미네랄이 실종된 중국산과는 한없이 다른 건강염 그 자체라는 것, 그런 국내산 대신 강제적으로 중국산을 구입할 수밖에 없는 슬픈 국제관계의 실상도 덤으로 알게 된다. (예전부터 그랬다고하니, 이게 아직 협상단계인 FTA의 실상일리는 없고 대체 뭣때문이더라, 책을 좀 오래전에 속성으로 읽어서-_-)

 

아버지는 수많은 해석의 길을 거느린 놀라운 텍스트였다.

 

감히 부르지 못하는 선.명.우. 그의 이름이다. 딸 셋에 억척스런 아내. 부잣집 딸이던 아내의 끈질긴 구애에 진짜 사랑하는 세희누나를 포기하고 체념처럼 결혼한 비운의 남자. 생산과 자본이라는 적 앞에 무력해진 아버지가 어째서 염전으로 걸어들어가 장애가족의 가장이 되었는지, 왜 끝내 돌아오지 않는지를 추적한다. 졸업식에 가기 위해 식사를 건너뛰고 소금을 길어올리다 쓰러져 눈감은 어떤 남자의 마지막을 가슴이 아니라 언어로 표현하려면 어떤 재주가 더 필요할까. 

 

그가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영원히 소유하기 위한 방법은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어느 시대에나 자식은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또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삶 하나도 평온하지 않다. 큰딸 정애에게 장애를 가진 아내와 나머지 자식들을 떠넘기듯 가버린 아버지는 방관자인 동시에 실패자다. 남자가 실패했으므로 여자 역시 행운을 비켜간다. 그런 시대였다. 부조리에 대한 순응이 온 공기를 휘감은 뿌연 시대, 마지막 남은 선연한 광기가 비운의 주인공들을 타고 부유한다. 아버지가 가정을 내친데서 시작된 폭력은 한 가정과 개개인의 존엄을 연쇄적으로 망가뜨리며 마지막 남은 희망까지 철저히 유린한다. 울타리를 잃어버린 가족이 세상의 위협에 대항하지 못한 채 적을 늘려가다 쓰러진다. 세계는 이 가족들을 일으켜세우지 않는다. 순애는 동네 남자에게 몹쓸 일을 당하고 죽었다. 같은 일을 당했지만 순애는 죽었고 정애는 살았다. 살아있음과 죽음 사이에 일련의 인과관계가 없다. 묘자와 정애는 여자 힘으로 먹고사는 허망함, 치사함, 생활의 억척스러움을 유일하게 나누는 존재들이다. 무지의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가난한 자들의 운명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무자비한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을 끝내고 싶은 이들의 간절한 외침이 새마을운동과 겹쳐지며 지역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들춰낸다. 목표도 없고 애착도 없이 그저 살아가는 주인공들을 관조도 낙관도 아닌 눈으로 비추는 작가의 문체는 해학적이면서도 뭉클한 상황을 통제하는데 효과적이다. 존재한다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추궁당하는 이들, 늘 희생자와 가해자가 바뀌지 않는 세상을 물색하는데서 오는 비극이 썩 편하지는 않다. 그조차 명랑과 쾌활로 통과하려는 의지가 눈물겨워졌다. 산다는 것은 반쯤 미치거나 미친 노래를 흥얼거려야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가난이 거듭 쌓이면 희망과 미래가 잊힌다. 삼켜지지 않는 울분이 구천을 떠돌며 미친 이들의 노래에 섞이거나 빗물을 가장한 눈물에도 섞였다.

 

어디로 가는지, 왜 왔는지 모르는 자들은 마지막 투혼으로 노래한다. 미치지도 못하는 자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다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고, 노래할 수도 없는 자들은 하루하루 말라가며 시간을 통과한다. 대다수가 성지를 찾아나섰지만 극소수의 사람만이 이런 세상을 통곡하거나 원망했다.

 

 

*

물국수를 좋아하시는 아빠는 국수(고구마나 감자 아니고?)가 주식이라면 좋겠다고 하신 적도 있다. 국수 삶으면 막 맨국수에 김치 올려먹으면 맛있다고 시범 보여주시고 그랬는데, 라면이 그렇듯이 젓가락질 덜 배운 나는 국수에 김치를 올려 한입에 먹을 자신이 없;; 더군다나 후루룩 쩝쩝인데, 없어보여ㅠㅠ 그리고 캠핑, 태국관광 갔다오시고는 늙은이처럼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기념품 가게에서 물건 사라고 강요당하는 거 말고 인도나 베트남처럼 못사는(응?) 나라가서 직접 느끼고 싶다고 하셨다. 아빠ㅠㅠ 우리는 언어도 안되고, 특히 아빠는 길치잖아요ㅠㅠ 

 

참, 스타렉스 짐칸을 침대로 개조해 밤낚시를 다니고 싶다고 하셨는데, 왜 스타렉스냐면 캠핑카는 너무 비싸서 살 수가 없으니까. (아빠 이제 스타렉스 캠핑카 나왔는데요ㅠㅠ 낚시 몇 번 다니기에는 너무 비싸죠, 붕어를 사드시는 게 낫겠어ㅠㅠ) 그리고 바다보다는 계곡물 흐르는, 우리 외갓집처럼 계곡이 흐르는 산골짜기 방갈로 집에서 살고 싶다고 하셨고, 아빠만 따르는 비글 닮았지만 비글은 아닌 짱이를 엄청 예뻐하신다. 아빠 닮아 생라면을 아작아작 씹어먹는 귀여운 그 짱이 예전에 내가 만만한지 폴짝 뛰어오르기에 뒤로 넘어가면서 기함할 뻔했던 내가 아빠 안보실 때 몇 대 때려줬다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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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5-31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 아이리님.... 너무 오랜만이죠? ^^

<남포동>이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쫄면을 생각해내는 것은 무슨 심리인지...
남포동과 쫄면은 정말 관계가 없는데 말이죠.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물국수도 아니구. ㅋ

아버님이 참 매력적이시네요. 울 아빠는 요즘 상추 농사 짓느라고 정신 없으심... ^^

아이리시스 2013-06-04 16:17   좋아요 0 | URL
남포동에서 쫄면을 드셨어요? 근처에 백화점이 하나 생겼지만 요즘 그쪽으로 상권이 다 죽어버려서 아쉬운 게 많아요. 저도 안간지가 오래됐는데, 부모님은 아직 그쪽을 더 편해하시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자갈치에서 회 한접시 먹고 그렇게 시내나들이 하는게요.

많이 바쁘셨구나. 보고싶었다는 말도 못하게 엄청엄청 오랜만인 거 알아요? 저희 아빠는 열무를 그렇게 심으세요..하하. 거긴 풍경은 안그런데 희한한 청정지역이라 뱀이 마당에도 출몰해요. 저희집 짱이가 짖길래 나가보니 뱀이 두꺼비를 잡아먹고 있었다고 했어요. 자연체험학습을 마당에서 할 수 있어요. 큭큭.

프레이야 2013-06-01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님, 짠한마음으로 읽었네요. 자식은 아버지가 흘리는 눈물의 또다른 이름! 이 글귀! 내일은 늙으신 아버지가 바람 쐬러 자주 가시는 양산천변으로 김밥 사서 동행할까 해요. 고마워요.^^

아이리시스 2013-06-04 16:1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어릴 때 내원사 통도사 엄청 다닌 부녀 여기 추가요! 정말 많이 갔었는데 오히려 자가용이 없던 아주 어린시절에 부모님이 앞뒤 배낭 매시고 동생하고 저 하나씩 챙겨서 대중교통 타고 걸어서 그렇게요. 예전에는 거기 취사,텐트가 다 가능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요즘은 환경이 워낙에..

벌써 주말 지났으니까 좋은 시간 되신 것 맞죠? ^^

2013-06-03 01: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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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4 16:0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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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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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3: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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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2: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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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3: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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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5 2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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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6 00:1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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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6 10: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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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04: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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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7 11: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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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09 0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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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1 08: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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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4 16:3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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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타 베를링 이야기
셀마 라게를뢰프 지음, 강윤영 옮김 / 다산책방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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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그날을 덮었다. 그럼에도 나는 밤이면

내가 그녀를 품에 안고 입을 맞추었던

그 자리를 찾는다.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달빛에 환한 베란다 지붕뿐. 그러나 나는 잊지 않으리

바로 저 달이 그녀의 젖은 눈시울 또한 비추었던 것을.

내 사랑은 떨리는 입술로 이별을 고하고 떠났다.

이 고통! 어째 씻어야 할까.

이 순결한 여인의 가슴에 번뇌를 불러일으키고

그녀를 내게 묶으려 했던 죄를.

 

 

당신은 곧 아무것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모험에 동참하려면 기꺼이 영혼을 팔아야 한다. 구성과 문체의 특이, 형식과 스토리의 파괴, 서정성과 향토성으로 중무장한 고전의 향기, 전해내려오는 전설과 지방 지주와의 조우, 마녀와 요정의 활약까지, 파우스트, 돈 후안, 아서 왕으로 대변되는 전설적인 이야기의 구조에 환상이라는 양념을 버무려 편지글 형식으로 구운 이 작품에 몰입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그 시도가 얼마나 새로운 것이었는지는 알 것 같다. 희대의 낭만주의자를 창조한 셀마 라겔뢰프는 라틴문학에서 마술적 리얼리즘 기법이 등장하기 전 이미 스칸디나비아반도 출신의 독보적 여류작가가 된다. 자국 최초의 노벨상을 거머쥔, 그것도 노벨상 최초 여성작가였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 특유의 윤리와 구원을 바탕으로 자연과 도덕에 맞서는 인간의 호전적 성향과 베름란드 지역 특유의 색채를 조화시킨다.

 

미남의 노랫소리는 모든 여자를 홀린다. 1820년 스웨덴의 작은 시골마을 베름란드를 배경으로 시간적으로는 근대와 현대, 공간적으로는 도시와 시골의 비교를 통해, 지배와 예속, 소유와 경작, 보편과 특수를 초월하는 '선과 악'을 운명과 저주라는 파격적 형식으로 그린다. 몽환적인 문체에 녹아든 '전설의 원형'에 살을 붙여 만든 이야기가 중구난방으로 펼쳐지는데 뇌가 아찔해질 정도의 현기증에 나는 누구인가, 무엇을 읽고 있는가, 를 실현한다. 영국 고전주의와 독일 낭만주의를 합친 한편의 모험담을 듣는 기분이다. 장원의 기사들은 교구의 세력가 에케뷔 소령 부인의 지배 아래 하나같이 술과 도박에 미친 한량의 비권력을 지향한다. 빼어난 외모와 달콤한 말솜씨로 가는 곳마다 여자의 환호를 받는 예스타 베를링 역시 그 중 하나다. 윤리를 소거하고 타락과 방종을 부추기는 선과 악의 모호함이 파스텔톤 입자로 부유한다.

 

 

"이 원고 안에서는 신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고 그 중에는 사랑의 신도 빠지지 않습니다. 사랑이 육체적 욕구 외엔 뭐랍니까? 어째서 육체의 다른 욕구보다 사랑이 고상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지요? 그렇게 치면 굶주림이나 피로도 신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들 또한 사랑만큼 가치 있는 욕구입니다. 하지만 이런 어리석음도 끝납니다! 진리만이 살아남을 겁니다!"

 

 

구전과 설화, 민담과 신화를 차용한 개성적 스토리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당시(1820년대)를 사로잡았던 사랑과 모험, 죽음에 대한 인식과 세계관을 짐작가능케 한다. 사실적이고 자연적인 문학이 주가 되던 스웨덴 사회를 서서히 뒤흔들게 된 것 역시 낙관과 낭만을 중요시하는 작가의 인간을 보는 방식이 특출났기 때문인데, 100년 이상 흘러버린 지금 그들이 이 소설에 보낸 환호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지만, 새로운 문학지평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그 위치를 상정해볼 수 있을 듯하다. 1858년에 출생한 셀마 라겔뢰프는 태어나기 전인 1820년대를 배경으로 쓴 이 소설을 1891년 발표했는데, 막 근대가 시작되던 시기로, 1차산업(농장, 광산의 자급자족)이 2차산업(기계화)으로 급격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던 때였다. 베름란드는 작은 시골마을이었으므로 그 변화가 도시보다는 조금 더뎠을테고, 지역으로부터 전해내려오는 민간설화들이 많았을 것이다. 자세히 보면 흠투성지만 멀리서 보면 각자 사랑스러운 구석을 한두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주인공들을 환상의 세계로 데려다놓고 지역 설화와 접목시킴으로서 유럽에서 제일 잘나가는 전설 속 영웅들을 재탄생시키고 문학사를 재배열하는 효과를 부수적으로 얻을 수 있었다.

 

사랑을 지상과 하늘이 벌이는 싸움, 천당과 지옥의 힘겨누기로 표현한다. 절대힘을 가진 숲의 곰을 잡기 위해 기회를 노리는 남자, 그 기회를 사랑하는 여자의 아버지에게 거부당하는 청년에게 넘겨주고 아쉬워하는 남자, 욕망과 허세를 형상화하고 있다. 내가 하면 영웅이 될테지만 불쌍한 저이를 위해 내가 영웅이 될 기회를 과감히 포기하겠어, 라는 거창한 선심. 곰을 잡고도 장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청년을 보며 괜히 기회를 넘겨줬어, 하는 알량함. 그 덧없는 순간의 자만을 도덕으로 착각하는 찌질함. 사랑은 또 어떤가. 좋아하는 여자의 마음을 얻기 위해 상사병을 앓는 고상한 마음이 아니라 나의 매력과 유혹이 어디까지 통할 것인지 시험하는 차원에서의 그것. 사랑의 부수물인 고통과 번뇌, 영혼의 흔들림을 오래된 수수께끼처럼 소중히 여긴다. '문학의 미적범주'로 따지면, 숭고미와 비장미, 우아미와 골계미가 고루 섞여 일련의 미적범주를 완전히 초월하게 되는 것이다,  

 

환상은 인간의 선한 본성과 과거와 미래를 향한 낙관으로부터 온다. 둘다 지독히도 근거가 없는데, 초자연적 현상의 미스터리를 초현실주의적 서술함으로서 한가지 해석과 이해를 의도적으로 방해한다. 그러니 파악이 어려울 밖에. 애초 그렇게 쓰여진 소설인데 왜 그렇게 썼냐고 따지는 건 조악한 평가다. 밤에 울면 호랑이가 잡아간다는 할머니의 회유와 협박이 사실은 사랑이었던 것처럼, 예스타 베를링의 시간 역시 작가의 독특한 배열 안에서 하나의 신화가 되었다. 그래도 여전히 해석이 불가능한 지점을 수두룩하게 남겨놓았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이다. 쓰다보니 이렇게 쓰여진 게 아니라 철저히 의도하고 썼을 거란 짐작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독서로만 따지면 파우스트, 돈 후안, 아서 왕에 대해 읽은 기억이 없는, 유럽신화의 원형에 대해 거의 모르는 내가 말하기에는 여러 모로 해석의 힘이 딸리는 어려운 텍스트였다. 제아무리 노벨문학상인들 책 한 권 읽자고 고이 간직해온 영혼을 팔 수는 없지 않은가.

 

 

아이야, 너는 사랑을 했지만

더 이상은 사랑의 기쁨을 맛보지 못하리라.

영혼아, 한때 정열의 폭풍이 너를 뒤흔들었다면

이제는 안심하라, 안식이 찾아왔으니.

영혼아, 너는 더 이상 천상의 기쁨을 향해 날갯짓하지 않아도 된다.

이제는 안심하라, 안식이 찾아왔으니.

더 이상 고통의 밤 속으로 침잠하지 않아도 된다.

아, 더 이상 그러지 않아도 된다!

 

아이야, 너는 사랑을 했지만

더 이상은 네 영혼이 불길 속에 타오르지 않으리라.

불타버린 초원처럼

너는 한순간에 불꽃으로 채워졌다.

재와 연기가 만들어낸 숨 막히는 구름에

새들은 놀라 울부짖으며 달아났었다.

돌아오라. 이제 너는 더 이상,

더 이상은 불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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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3-05-30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북유럽 신화는 기독교 전파 이전의 유럽을 알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고 하죠.특히 게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신이 많다고 합니다.

라게를뢰프 작품 중에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여인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그린 중편 <늪텃집 처녀>일 것입니다.정말 재밌게 읽은 작품입니다.요즘도 나오려나...워낙 오래전 것을 읽었거든요.

아이리시스 2013-05-30 18:15   좋아요 0 | URL
노자님은 정말로 안읽은 책이 없으시군요! 지금 읽고 계신 책이 뭔지도 궁금하고, 안보신 책이 뭔지도 궁금하고, 보니까 동화로도 유명하던데 저는 처음 들어서 역시 저는 멀었구나..싶었어요.

그래서 읽기도 어렵고 두발 담그기도 어렵고 리뷰쓰기는 더 어렵고 그랬군요. 북유럽 신화는 북유럽을 동경하면서도 이질적인 질감 때문에 읽지 않고 있었는데 정말 북유럽 신화를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어요. 게임이랑도 연관되고, 기독교 전파 이전의 유럽을 알기 위해서도 중요하다면 더더욱이요.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