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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월드 - 가장 도발적이고 창의적인 예술가 피카소의 삶과 예술 이야기
존 핀레이 지음, 정무정 옮김 / 미술문화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예술가의 얼굴이라곤 카뮈만 겨우 떠올리는 내가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피카소(1881-1973). 스페인 말라가 태생으로 파리에서 활동한 입체파 화가이자 르누아르, 렘브란트, 뭉크, 고갱, 고흐, 고야, 마네 등의 영향을 받았고, 거트루드 스타인, 장 콕토, 기욤 아폴리네르와 친구로 지냈다.
전쟁의 참혹상을 그린 <게르니카, 1937>, 최초의 입체주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아비뇽의 처녀들, 1907>, 1950년 미군과 한국군이 진주한 북한 황해도 신천군에서 일어난 양민학살 소식을 듣고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 1951> 등이 대표작이다. 아버지 돈 호세 역시 화가이자 교사였으며, 어머니는 넘치는 에너지와 고도의 집중력을 가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피카소의 화풍은 크게 청색 시대(1901-4), 장미빛 시대(1904-6), 입체주의 시대(1908-15)로 구분된다. '청색시대'는 1900년 파리를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맥주 겸 여인숙으로 알려진 네 마리 고양이(4 cats) 카페에서 카탈루냐의 모더니즘, 강한 무정부주의적 또는 정치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극작가와 문인들을 만난다. 미술, 문학, 음악, 시, 정치 그리고 철학의 다양한 사상에 대해 배워나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1900년 10월에 피카소는 시인이자 화가였던 친구 카를레스 카사헤마스와 함께 파리를 여행하였다. 피카소는 열일곱 살이었던 1899년 봄에 이 지적이고 매력적인 카사헤마스를 만났다. 카사헤마스는 고군분투하는 데카당파로서 자기 파괴적이고 가난하며 격정적인 성격의 인물이었는데, 비극적이게도 알코올과 모르핀에 중독된 상태였다. 카사헤마스는 18개월 후에 자살을 하는데, 이 사건은 피카소와 그의 청색 시대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친다.(p.14)
검푸른색이나 짙은 청녹색을 사용하여 죽음이나 파리의 사교계, 고급 매춘부 등의 소재로 가난하거나 소외된 자들의 고독을 주로 그렸다. 유학 온 피카소가 낯선 파리 화단에서 겪었던 이방인으로서의 우울을 드러낸다.
연인 페르낭드 올리비에를 만나게 되고 이 때부터 빨강, 노랑, 장미빛 등의 색이 사용되어 밝고 따뜻한 느낌으로 그림이 변하게 되는데 이 시기를 '장미빛 시대'로 부른다.
파리에 정착하기 전의 피카소는 다양한 모색을 통해 새로운 주제를 찾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고전적 모티프를 탐색하며 그가 찾은 것은 거리의 유랑극단과 서커스 공연자의 도상이었다. 곡예사, 공연자, 어릿광대, 익살꾼들을 주로 그리기 시작한 것도 전통적으로 제3자로 간주되던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서툰 불어실력이 유랑과 사회적 고독에 중첩되었을 것이며, 낭만이라는 관념과도 연계되었다.
1904년부터 파리에 정착한 피카소는 1907년 파리 트로카데로에 있는 인류사 박물관에서 아프리카인들의 조각품과 가면들을 보았다. 이후 나온 작품이 유명한 <아비뇽의 아가씨들, 1907>이다. 매춘과 타락에 대한 반박으로도 읽히며, 죽음 충동, 메멘토 모리, 사드를 숭배하던 기욤 아폴리네르의 영향을 받는다.
그는 <아비뇽의 아가씨들>과 부족미술의 어떠한 관계도 부정하는 입장을 견지했으나 피카소의 원시주의 및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충격과 강렬함이 이 초자연적 현실을 그리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준비스케치나 이 그림이 미친 효과, 이후 작품경향이 적실하게 보여준다.
피카소와 곧 첫 번째 부인이 될 러시아 발레 무용수인 올가 호흘로바와 프랑스 시인이자 문인, 미술가, 영화제작자인 장 콕토와 찍은 사진이다. 피카소는 1908년경 입체주의 공동창시자로 평가받는 조르주 브라크(1882-1963)와 입체주의를 고안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1915년까지 전개되며 미술에 있어 재창조에 대한 탐색으로서의 모더니즘을 대변한다. 입체주의는 새로운 재료와 사물에 대한 탐구를 자극하여 전통적 묘사를 넘어서는 데 도움을 주었으며 콜라주, 파피에 콜레, 구성과 아상블라주 기법의 창안을 자극하였다.
마법의 근원을 소위 원시 문화에서 찾는 프로이트의 생각은 대체로 프랑스 사회학자들이 종교적 관습에 관한 기본적인 저서로 간주한 제임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1890-1915)에 상당 부분 뿌리를 두고 있다. 정신분석학자와 인류학자의 가정은 프랑스와 독일의 전위 그룹 사이에서 종교나 마법의 원리와 관련한 원시적 스테레오타입을 유행시키고 확정짓는 데 많은 역할을 했다. 야수주의자, 입체주의자, 초현실주의자와 같은 모더니스트 미술가 집단은 '원시 숭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확립하기 위해 아프리카 미술을 차용하였다.(p.65)
1920년대 초, 피카소의 회화는 <목욕녀들, 1918>을 필두로 <올가의 초상, 1923>, <판의 피리, 1923>, <경주(해변을 달리는 두 여인), 1922>처럼 평화와 몽상, 환락을 주제로 변화한다.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고전주의, 자연주의, 입체주의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뒤섞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오른쪽 페이지 윗그림 <경주>는 티치아노의 <바커스와 아리아드네, 1520-22>를 참고로 그린 작품으로 짐작, 술의 신 바커스를 방종한 행위의 원인으로 묘사한 신화적 주제를 잘 드러내는 작품으로 디오니소스적 흥분과 바커스적 춤에 몰두한 여성이라는 주제가 피카소와 초현실주의자의 관계를 확고하게 그렸다고 해석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초현실주의적 혁명에 들어서는 피카소는 1930년에 <초현실주의 제2선언, 1930>이라는 작품으로 그 정의를 확고히 한 앙드레 브르통(1896-1966)의 영역으로 편입된다. 그의 끊임없는 구애를 받았기 때문인데, 피카소는 초현실주의 이념과 이미지에 전적으로 동조한 적이 없지만 서서히 회화의 위기를 인정하면서 동조의 입장으로 변해간다. 미신적 성향, 비이성, 광기, 정신착란 그리고 욕망에 대한 초현실주의자들의 탐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는다.
여전히 버리지 못한 고대 투우의 말라가 출신의 안달루시안으로서의 피카소의 문화적 정체성은 <게르니카, 1937>에 묘사한 투우 이미지에서 언급된다. '전쟁과 폭력에 대한 혐오'를 표현한 이 작품은 정체성의 혼돈, 투우에 기초한 폭력적 주제, 고대 신화 속의 야수를 콜라주하여 신화적 피조물로서 그린 희생 의식이나 제의, 종교의 관습 등을 전쟁, 학살, 전투, 의식, 십자가 처형, 이교적 희생의식과 같은 신화적, 역사적, 종교적 주제에 뿌리를 내리고 그렸다. 더불어 개인의 갈등이나 정체성의 이해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문화적 정체성을 시각화한다.
실제로 이 시기 아내 올가 호흘로바와 아들 파울로와 함께 투우를 보기 위해 연속 세 번이나 스페인을 방문하였으며 곧 결혼이 파국을 맞는다. 1933년에서 37년까지 그려진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투우 이미지에서도 가장 기념비적인 <게르니카>는 1937년 4월 26일 나치 콘돌 군단에 의한 융단폭격을 둘러싼 비극적 사건을 기리기 위해 제작되었다.
1940년대 피카소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기념비로 생 제르맹 데 프레 광장에 놓인 조각 <도라 마르의 두상, 1941>을 비롯해 조각가로서의 작업에 몰두한다. 이교와 기독교, 홀로코스트, 집단 수용소에서 희생된 자들에 대한 메멘토 모리, 마술적 페르소나 등의 추상과 부재, 상실, 슬픔 등의 초현실적인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진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초현실주의적인 특징 가운데서도 가장 또렷한 특징을 보인다. 전쟁에 대한 불안과 도발적 분노, 일촉즉발의 상태와 파멸, 고독과 평화, 은둔, 자기반성의 징후와 파토스, 생애 말년의 무기력과 죽음에 대한 공포 등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피카소의 전형적인 샤머니즘적 행위, 즉 노령을 거부하고 병적인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이미지, 본성, 상상력을 이용하여 공포와 유약함을 드러낸 것이다.(p.175)
오리엔트적 관심을 반영한 <알제의 여인들, 1955>, 벨라스케스 작품을 토대로 제작한 45점의 유화 중 하나인 <시녀들, 1957>, <사비니 여인의 약탈, 1962>, <한국에서의 학살, 1951>이 억압과 전쟁의 희생자, 보편적 고통이라는 주제를 형상화시킨 이 시기의 작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