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그림에게 나를 맡기다 - 영혼을 어루만지는 그림
함정임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12월
평점 :
그저 개인적인 공간이라 여기는 곳에 사적인 단상을 끄적거리다가 비로소 불특정다수가 읽을 수 있는 '블로그'를 시작했을 때, 머릿속에 'Love, Art, Trip'이라는 세 키워드를 담고 있었다는 걸 언젠가 말한 적 있는 것 같다. 유려하지 않은 관심사와 형편없는 몰입도 탓에 시작도 못하고 이만큼이나 지나버렸지만, 적어도 'Art'라는 관심사가 미술사와 미학, 철학과 사상사, 음악과 문학을 칭한다는 건 덧붙일 필요가 있겠다. 20대 초반 블로그 지도가 이 분야들이라면, 지금은 세계사, 경제, 요리 정도가 더 포함될 수도 있을 정도로 관심의 대상이 늘었는데, 세월이 흐르면(나이를 먹으면) 어떤 식으로든 넓고 깊어져야 하는 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나이로 깊이와 넓이가 설명된다면, 연장자가 가장 전문적이고 지혜로워야 한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인간이 그렇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아는 일이고, 진단은 자기분열을 하든 자아성찰에 빠지든 각자 알아서 해보면 된다. 내가 이렇게 넓이도 깊이도 전무한 책읽기에 리뷰라는 이름으로 블로그를 만드는 대신, 계획을 밀고 나갔다면, 그래서 전문성과 개연성은 없어도 열정 하나만으로 운좋게 책이 되었다면 이와 비슷한 그림 에세이 정도 되지 않았을까.
정임쌤도 내가 알기로는 미술이나 미술사를 전공하신 적이 없다. 아무 것도 몰랐던 시절, 많은 것에 나만의 계보가 없던 시절, 그녀에게서 '폭풍의 언덕'과 '묘지기행'과 '불문학'의 플로베르,발자크,스탕달을 배웠고, '마담 보바리'의 김화영 선생님을 알게 되었다. 그녀를 통해 모네와 마네와 르누아르와 램브란트를 만나고, 모네의 '생 라자르 역(La gare Saint-Lazare)'을 들여다보며 당대를 회상하는 시간을 내공화할 수 있었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이런저런 시들. 행여 그녀의 수업에 들어가지 않고 졸업했거나 그녀의 전공이 불문학이 아니라, 노문학이나 영문학이었다면, 플로베르와 보들레르 보다 도스토옙스키나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를 더 좋아했을까. 영문학에서 샐린저는 늘 사랑했었다. 그를 예외로 하고도, 예술의 황금기는 프랑스가 쥐고 있었다는 걸, 파리로 몰려들던 수많은 예술가들의 설렘으로 무장된 표정을 여전히 잊을 수 없다.
대학 때 '카피작성론' 수업의 학기 말 과제는 광고카피 100개를 만들어 제출하는 것이었다. 창조는 아니었고, 모방에서 창조하라는 거여서, 매일 미친듯이 잡지를 뒤적거리며 오리고 붙여서 기존 카피를 비틀거나 변형해야 했다. 그림 에세이를 읽는 것도 처음이 아니어서 <그림에게 나를 맡기다>처럼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그림 에세이를 읽고 나면 자연스럽게 쓰고 싶은 욕망과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따라온다.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일주일에 한 편 그림 에세이 쓰기. 역사가 되지 못하더라도 시작은 오직 열정을 구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 아는' 구멍이 숭숭 뚫린 미술사 지식, 제대로 구입 한 권 못해본 화집, 이어가지 못하는 화가 연대기는 어쩔 수 없이 자괴감처럼 따라붙는다. 뭣모를 때나 루브르에 가면 그림에 대한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만 같았지,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단숨에 읽어내린다고 웬만해선 메워지는 지식이 아니란 것도 너무나 명징해서, 자료가 정보가 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수많은 가공 즉, 학습과 시행착오, 암기와 재검토의 시간을 타당화 시켜준다.
그렇게 짠-하고 내가 쓴 글 공개하면 좋겠는데 에세이는 고사하고 그림구경 안한 지도 제법 오래돼서 그저 읽었다. 잠들기 전 어쩌다 한 편씩. 부담이 없어 좋고 단편적으로 지나가는 지식들을 고스란히 적어두지 않아도 될 만큼 그때그때 소화하려고 애썼다. 그렇게 터너를 만났다. 루브르와 퐁피두, 테이트 갤러리와 내셔널 갤러리에 갔었다. 전부터 그림에는 관심이 있는 편이었는데도 남들 보지 못하는 것까지 볼 수는 없는 게 그즈음 내 실력이었다. 터너의 그림 중에 '황금가지'라는 작품이 있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와 같은 제목. 사실 영국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역사학자 토인비와 인류학자 프레이저인데, 책이 사전이다. 두께뿐만 아니라 내용도 그렇다. 작년에도 <역사의 연구>에 열 몇 번의 시도를 했고, 프레이저는 아직은 뭐 어쩔 재간이나 작정 따위 없다. <황금가지>는 종교의 기원과 진화과정에 대한 신화학이다. 프레이저에 의하면 과학은 주술이 진화한 것. 종교를 문화적 관점에서 접근해, 인간의 문명이 미신, 주술에서 종교로 그리고 종교에서 과학으로 진화해왔다고 주장한다.
윌리엄 터너, <황금가지>, 1834
터너가 그린 '황금가지'는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서사시 <아이네이스>에 삽화로 실린다. 그리고 <아이네이스>는 르 귄이 쓴 <라비니아>의 탄생에 기여한다. 디아나의 거울이라 불리던 네미 숲 조그만 호수를 환상적으로 그려낸 터너의 '황금가지'는 황금색 위엄을 있는대로 드러내며 런던 테이트 갤러리에 있다.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터너의 그림에서 촉발된 열세 권짜리 인류학의 보고이며, 테이트 갤러리는 영국의 자랑 터너의 그림들로 특별실을 만들어 그의 그림을 걸어두고 있다.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의 대가 터너의 그림 속에는 눈부신 황금빛 색채가 두드러지며 추상성을 극대화시킨다. 1825년 영국 철도가 처음 개통되자 새로운 교통수단의 힘과 속도에 압도된 이들이 여럿이었으며, 터너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달리는 열차의 속도와 풍광을 느끼기 위해 관찰한 끝에 '빛, 증기, 속도'라는 그림을 그렸다. 윤곽과 형태를 뭉개고 검은 증기기관차가 육중한 속력으로 다가오는 순간 포착. 대기와 속도, 자연과 인간이 만나는 지점을 감각적 에너지와 빛나는 힘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보관되어 있다.
윌리엄 터너, <빛, 증기, 속도>, 1844
그리고 파리에서 볼 수 있는 모네의 '수련'과 '생 라자르 역'을 지나 네덜란드 황금기 17세기를 살았던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를 만나러 간다. 인간을 둘러싼 상황, 즉 자연의 풍경이 아니라 인간 그 자체, 사적 생활의 영역으로 파고들던 시대의 예술.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브렐의 <도시의 모퉁이>는 뚜렷한 회화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시간의 속도와 흐름의 이미지가 인상적인 작품들이다. 프리다 칼로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마리 로랑생 등 세계 여성 화가의 역사 또한 만만찮다. 그림을 이어봤다면 사진에 대해서도 잠깐 시작해볼까. 헬뮤트 뉴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토마스 스트루스 등의 사진가들의 작품을 감상하기 전에, 사진이라는 장르가 언제부터 회화처럼 예술의 한 장르로 인정받기 시작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21세기 사진의 영향력은 막강해졌다. 사진은 예술이자 일상 속으로 침투한 또 하나의 현재다.
'현대'라는 시간성에 사로잡힌 예술가치고 사진을 간과한 사람은 드물다. '현대성'의 창시자로 불리는 19세기 상징주의 시인이자 미술평론가 샤를 보들레르가 그렇고, 보들레르에 열광해 아예 파리에 와 살다가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파리에 관한 매혹적인 책까지 쓰고, 결국은 나치의 독일로 돌아가지 않고 스페인 국경을 넘다가 눈을 감은 발터 벤야민이 그렇고, 보들레르와 벤야민과 같은 대문자 B의 성을 가진 20세기 주목할 만한 문화기호학자 롤랑 바르트가 그렇다. (pp.184-186)
포착이라는 단어의 순간성. 대상의 실물이 의식 사이로 끼어드는 순간의 재현. 그것은 '내가 본 것'인가 '내가 봤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손택의 <타인의 고통>의 상징성을 굳이 끼워넣지 않아도 브레송이나 케르테츠의 사진집을 한 번 들춰보면 알게 될 것이다. 사진 속에 고스란히 투여된 사진가의 시선과 내 자부심과의 간극 혹은 차이를.
이 책 속에 가장 마지막 등장하는 화가는 고흐. 사실은 브뢰헬이라는 화가인데 또렷한 겨울 눈 속 풍경을 그린 꽤 맘에 드는 작품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처음 보는 화가라서 마지막은 내게 고흐다. 고흐로 끝난다. 이제 아무리 뛰어난 언변의 누군가가 말해도 기존의 말 속에 기존의 말을 또다시 섞을 뿐인, 그림 에세이에서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말해지는 화가. <꽃핀 편도나무 가지>와 <해바라기>. 예전에 고흐의 그림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리스트에 정물화는 없었다. 주로 풍경화이거나 자화상이었다. 이제는 정물화가 눈에 들어온다. 가장 행복한 순간을 포착하는 시선이 있다면 그 반대의 것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그림들.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99센트>, 1999
현대미술을 거의 모르고 사진도 잘 모르지만 이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일부러 찾아냈다. 2006년 필립스 경매에서 $2,480,000(약 24억 원)에 낙찰되어 전후 사진으로는 최고 낙찰가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사진 설명은 구구절절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겠지만 한 장 정도는 각자 혼자 생각해보도록 하는 게 좋겠고, 이 사진을 본 이후 급격히 배가 고파진 내가 한 일은 나만 아는 걸로 하는 게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