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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63 - 1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2년 11월
평점 :
서른 다섯 살의 교사인 제이크 에핑은 친하게 지내던 레스토랑 주인 앨 다이너의 부탁을 받고 그의 식당으로 간다. 하룻밤새 머리가 하얗게 센 모습의 앨은 의아해하는 그를 식료창고로 이끌어 믿기 힘들 만큼 놀라운 얘기를 시작한다. 바로 여기, 눈앞에 보이지 않는 시간여행의 통로가 있다는 꿈에나 나올 법한 사실. 과거로 들어가 역사를 되돌려 미국의 대통령을 구해내고 전쟁을 막아 인류를 구하자는 앨에게 귀가 솔깃하면서도 믿지 못한다. 맞다. 스티븐 킹이 창조한 주인공 제이크는 또 한 명의 시간여행자이다. 이 소설은 그의 시간여행으로 이루어진다. 제목의 뜻을 1권이 끝날 때까지 몰랐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암호같은 건 줄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비로소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잘생긴데다 젊기까지한 청년스러운 남자 철도직원이 유레일패스 개시할 때 적어주던 숫자가 이런 방식이었다는 게 떠올랐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연도를 저런 식으로 안 쓰거든. 뼛속까지 한국인인 어떤 여자의 비극적 문화충격이랄까.
<11/22/63>은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한 1963년 11월 22일을 의미한다.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는 미국 역사상 선거로 뽑힌 최연소(43세) 대통령으로, 쿠바침공을 시도하다 흐루시초프와의 대결 끝에 소련과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체결한 외교경력을 가지고 있다. 케네디는 재위 3년(1961-1963)만에 오스왈드에게 저격당했고, 오스왈드 또한 케네디 암살 이틀 후 구치소 이송 도중 잭 루비에게 암살 당하면서 역사의 진실은 미궁으로 빠졌다. 암살 이유나 배후에 대해서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오리무중이다.
시간여행자는 천편일률적이지 않다. 초능력을 지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상 가고자 하는 시대(시간)를 설정할 능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티븐 킹의 시간여행자 제이크에게 주어진 여행은 많은 제한이 따를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앨의 레스토랑은 조만간 붕괴될 위기인데다, 바로 그곳의 구석지고 어두운 '식료창고'를 통해서만 오로지 '1958년'의 토끼 굴로 들어갈 수 있다. 기회는 단 한 번 뿐.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나갈 경우에는 이전의 바로잡은 상황 전부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한마디로 리셋. 어리벙벙한 제이크가 선택한 시범무대는 제이크가 근무하는 학교의 수위 해리의 운명을 바꾸는 것. 해리의 어린시절은 끔찍한 기억으로 얼룩져 있고, 그로인해 다리를 절고 말을 더듬는 장애인이 되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그의 레포트를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제이크에게는 해리가 겪은 모든 것이 죄악으로 여겨진다. 마침내 운명의 문이 열렸다. 케네디 암살을 막아내는 임무 돌입 이전, 제이크는 1958년의 토끼 굴로 들어가 해리 가족이 겪은 끔찍한 사건을 막아내기로 한다.
케네디가 대통령이 된 시기는 5.16 군사 쿠데타로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박정희가 정권을 잡기 시작한 때였다. 제이크가 살아야 할 1958년의 상황은 어떤가. 해방 후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지지하던 이승만이 발췌개헌('52)과 사사오입개헌('54)으로 마구 해드시며 자리를 지키던 시절에 진보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봉암과 전 간부를 북한의 간첩과 내통하고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이유로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해체시킨 이른바 '진보당 사건'의 해이다. 2년 후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에 참가하였다 실종된 후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김주열의 사체로 인해 한국 학생의 일련의 반부정(反不正)·반정부(反政府) 항쟁인 4.19 혁명('60)이 일어나고 다음 해 쿠데타로 인해 우리 역사 또한 파란만장한 과정을 거친다. 해리 가족을 구하러 돌아간 제이크의 얘기로 다시 가보자. 그는 해리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현재 그는 없다. 그가 다치지 않도록 보호했건만 다리가 무사한 해리는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다가 제이크의 제자는커녕 수위도 되지 못한 채 젊은 시절 삶을 다한다. 딜레마는 바뀐 과거가 현재에 유리하거나 행복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과 과거의 저항력을 타당화한다.
과거가 변화에 저항했던 이유는 미래를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해리를 터닝포인트로 하여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을 막으려 1958년으로 돌아간 제이크는 5년이나 과거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하지만 곧 목숨을 놓게 될 앨의 과제를 숙명처럼 받아들인다. 무려 15년 후에 자신이 태어나게 되는 세상에서 그가 만약 어떤 여자를 사랑하여 아기를 낳게 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시간여행자의 윤리는 이처럼 모호하고 덧없다. 1권이 제이크가 과거를 시험하는 무대라면, 2권에서는 과거로 들어간 제이크가 분한 '조지 앰버슨'의 삶이 세밀하게 묘사되고 있다. 조지 앰버슨으로 지내며 한 마을에 녹아들고, 우연히 학교에 근무하게 되어, 함께 근무하는 여선생과 사귀는 일련의 과정은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자세하다. 5년 동안 그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5년이란 유예기간은 턱없이 길게 느껴진다. 미국의 당시 사정을 상세하게 묘사해내는 것이 목적이었을 것이다. 주관적 정치판단을 보류한 채 담담히 묘사되는 1958년-1963년까지의 상황은 역사적이라기 보다는 개인적이다. 당시 남미 국가들과의 이런저런 대치상황 중 쿠바 미사일 위기(1962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의 11일 동안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려는 시도를 둘러싸고 미국과 소련이 대치하여 핵전쟁 직전까지 갔던 국제적 위기)는 냉전시대를 설명하는 가장 큰 틀이 된다. 에잇, 스티븐 킹 읽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냉전시대' 그리고 미국과 남아메리카의 관계까지 알아야 하는 더러운 세상. 퉤! (가서 미국 현대사 몇 개 공부하고 옴 - 예를 들자면, 미국 역대 대통령 재임기간이라든지?)
무언가를 바꾸려는 것은 그 이상의 엄청난 희생을 예고하는 일이다. 조지(제이크)는 과거의 끈 안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새디의 목숨을 희생시켜야 했다. 그를 사랑하는 그녀가 기꺼이 선택한 일이었다. 누군가의 소중한 죽음과 맞바꾸어지는 것이 인류역사의 물꼬를 트는 일이라면, 어느 누가 쉽게 그 길을 택할 지는 미지수다. 그가 멋지게 그 일을 해냈고 그로인해 좀 더 멋진 현재를 살 수 있다고 한대도. 마음이 왜 왔다갔다 하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잘하겠다는 사람의 말을 믿어주지 않는 건 편협하고, 무작정 믿어주자니 뼛속까지 못미덥다.
선거 때 그 사람을 뽑지는 않았지만, 미국인이니까 그 사람은 그냥 대통령이 아니라 우리 대통령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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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웬만해선 미래로는 안 가고 싶은 사람 중 하나이긴 한데(이왕이면 젊고 팔팔한 게 좋지 않겠어?), 그렇다고 과거로 가서 무언가를 막을 힘은 없어. 에너지도 없고 그게 잘될 지에 대한 확신도 없어. 내가 언제나 확신하는 길로만 가는 신중한 겁쟁이는 아니니까 걱정마. 포기는 아니야. 체념이나 절망은 더더구나 아니고. 그냥 좀 지쳤어. 왜 그런지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데 제이크가 시도한 시간여행과 역사 바꾸기는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아. 물론 되살리고 싶은 사람도, 절벽에서 밀어버리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래. 이번엔 먼저 가서 기다릴게. 나 쫓아오지 말고 이 세계 제대로 살다와서 조근조근 얘기해줘. 뭐가 좋았고 어떤 게 나빴는지. 딱 5년만 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때 더 안 좋으면 어떡하냐고? 그런 생각을 왜 해. 아니, 그럼 그때 또다시 5년 먼저 가서 기다리지 뭐. 계속계속 그렇게 미래로 가는 거야. 그래, 나는 미래에서 사는 거야. 그럼 나는 일찍 죽겠지. 지구에서 최고 빠른 속도로 소멸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이 되는 거야. 그런 게 시간여행일까. 한 번쯤 해보고 싶었는데 잘됐어. 힘들 땐 날 떠올리며 최선을 다해 살아. 그러면 우린 각자 어딘가에 살아있는 거야. 시간 다 됐다, 안녕. 미래에서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