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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 - [할인행사]
조나단 캐플란 감독, 조디 포스터 외 출연 / 파라마운트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충격적인 집단강간씬을 포스터는 무려 스물 일곱살에 찍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하고 있기 힘든 포즈로, 가장 예쁜 나이에, 가장 눈부신 나이에 입은 상처는 본인이 상대에게 어떠한 상처를 얼만큼 줬는지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징역형을 내린다 해서 회복될 일이 아니었다. 몸에 생긴 상처가 아물 때에도 희미한 흉터를 남긴다. 하물며 마음에 찍힌 낙인 같은 상처는 그녀를 황폐하게 만들 것이다. 올바른 사랑과 믿음을 가질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세심히 돌봐야 한다. 나는 여자다. 누구보다 그녀를 알 수 있고 이해해야 하는 여자.
그녀의 검사로 배정된 캐서린조차 처음에는 사라가 입은 피해를 마주보지 않는다. 그녀는 애인과 동거중인데다 종종 마약과 술에 쩔어있고, 야한 옷차림으로 다니며 사내들을 유혹한다는 이유였다. 사라가 입은 강간은 명백했으나 그녀에게도 일정부분 책임이 있다고 캐서린조차 믿어의심치 않는다. 증거는 없고, 피해는 입증할 수 없어 답답하던 즈음, 포기하고 무너지는 사라를 찾아간 캐서린은 다시 한 번 사라를 돕기로 한다. 그녀를 강간한 이들과 형량협상을 끝마친 뒤지만, 집단강간인만큼 강간을 부추기고 방조한 이들의 죄를 밝히면 다시 한 번 강간범들의 형량 또한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번 당한 상처도 아픈데 소금 뿌리는 것마냥 증언대에 서서 자신의 피해를 고스란히 증명해야 하는 현실이 애달프다. 이것 또한 분노다.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아직도 남자로 인해 여자가 피해입을 수 있는 분야들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여성차별이라든지, 강간이라든지, 폭행이라든지. 남자들은 모른다. 본인들을 세상에 낳아준 것도 여자라는 걸. 김영하의 [오빠가 돌아왔다]의 표제작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집안에서 힘이 가장 센 오빠가 아빠 위에 존재하지만 엄마 밑에 존재하므로 집안 서열은 그렇게 잡힌다. 이건 거의 본능적이다. 본디 여자는 남자에게 힘으로 밀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기는 일련의 피해들. 남자와 여자가 존재하는 한 인류가 멸종할 때까지 끝나지 않을 여성 피해 사건들. 그 반대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사라는 오랜 시간 술집의 온갖 남자가 박수치며 부추기고 희롱하며 지켜보는 데에서 술집 안 게임대 위에 강제로 눕혀진 채 손과 발이 결박된 채로 강간을 당했다. 울부짖으며 소리쳤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녀를 도와주는 이 없다. 그녀의 피해 사실을 신고한 학생 또한 경악해하면서도 정작 말릴 엄두를 내지는 못한다. 술집에서 서빙하던 사라의 친구도 구석에서 집단적으로 이뤄지는 폭행 장면을 보고는 도망치듯 떠나버린다. 남자들의 집단광기는 무서웠다. 그들에게 강간은 성욕을 채우려는 욕심이기보다 여자를 정복하려는 게임이었다. 서로에게 보여주기 위해 자신의 무기를 아무렇게나 꺼내보이며 자랑하는 저질스런 게임이었다.
사라의 분노 앞에 당당할 자 없다. 나라면, 그 자리에서 당당히 그러지 말라고 할 수 있었을까. 그럴 거라는 확신도 그 반대의 확신도 없다. 나도 두려웠을 것이다. 나도 사라만큼 짧은 스커트를 입고 술에 취한 채로 남자들 앞에서 가슴과 엉덩이를 흔들어대는 여자라면, 어쩌면 위험하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강간을 당해도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다. 포스터는 신들린 것처럼 연기했다. 특히 캐서린이 강간범들과 형량협상을 해주고 돌아왔을 때, 그녀를 향해 내뱉는 사라의 분노와 실망, 깨진 신뢰를 표현할 때 탁월했다. 포스터는 고작 스물일곱 살이었는데. 그녀가 부러워질 만큼 뛰어난 연기였다.
<피고인>은 1988년에 만들어졌고 여성에 대한 집단강간의 법정영화로 분류되지만 충격적인 강간씬을 빼고나면 포스터의 연기를 감상하는 게 다다. 일직선으로 가는 스토리에다 지극히 뻔한 법정영화라 임팩트가 부족하다. 짧고 임팩트 있게 쓰자면, 여자는 언제나 자신의 삶을 강하고 풍부하고 보호받도록 만들 필요가 있다. 그건 권리이자 의무이고,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건 스스로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자신의 소중함 때문이어야 한다. 단 한 번, 사라의 삶이 부서진 건 맞지만 다시 얼마든지 빛날 수 있는 이유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맞서 싸우려는 용기를 냈고, 맞서 싸워 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