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서양미술 순례 창비교양문고 20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 창비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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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 상처를 보여주는 그리스도(p.139)

 

이 책의 제목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이다. 자기 자신의 순례. 서양미술에 대한 어떤 정보를 주기 위한 책이 아니다. 작자는 이 순례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본다, 보여준다. 고흐를 통해 '생활'을 생각하고, 피카소의 게로니카에서 5월 광주를. 미켈란젤로의 노예상에서 감옥에 있는 형들을 떠올리며, 레온 보나의 화가 누이의 초상을 통해 자신의 누이를 본다. 낯선 호텔방에서 죽은 아버지의 영혼을 만나고... 오랫동안 이 책이 사랑받는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집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집을 만나는 것, 먼 시간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외면하고 싶었던 상처를 자기 스스로 드러낼 수 있는 것. 그것이 순례가 아닐까.

 

작자의 뒤에서 함께 그림을 보는 느낌이다. 작자를 통해 그림을 만나고 그림을 통해 작자를 만난다. 고야의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가 오래 기억에 남는다. 작자는 개가 고야 자신이라는 걸 알지만 이 그림을 볼 당시에는 자신이 그 개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표현하고 싶지만 표현하지 못한 것을, 혹은 자기 마음속에 있는 줄도 몰랐던 감정의 덩어리를 대신 나타내 주는 작품에 눈길이 가기 마련이다.

 

고야, 모래에 묻히는 개(p.109)

 

 

돌아보지 마라, 하고 나는 자신에게 말한다. 돌아보면 훌쩍 사라져 버릴는지 모른다. 그건 서운한 일이다.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아버지같이 여겨졌다. 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시다가 반년 전에 돌아가셨다.
창 밖에는 검고 그로테스크한 탑, 달에는 커다란 달무리.
이런 데까지 오셨습니까, 보세요. 여기는 스트라스부르예요...... 등뒤의 아버지에게 말하듯 중얼거려본다.
대답은 없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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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20-08-10 21: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쿠, 올려주신 조각도, 그림도, 뭉클합니다.
나 자신이 순례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순례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군요.

이누아 2020-08-10 22:54   좋아요 0 | URL
예. 글도 그림도 뭉클해요. 읽고 나서 오래 여운이 남아요.

바람돌이 2020-08-10 21: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책인데 이렇게 다른 분의 리뷰로 만나니 반갑네요. 덕분에 이 책을 다시 보고싶어지는 밤입니다.

이누아 2020-08-10 22:56   좋아요 1 | URL
다 읽고나서도 자꾸 뒤적거리게 됩니다. 아마 우리 다 다시 읽게 될 거예요.^^

하나 2020-11-04 2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굉장히 좋아하는 책인데, 이렇게 이누아님 덕분에 다시 보게 되네요. 이런 밤에 다시 읽으면 좋을 거 같아요. ^^

이누아 2020-11-04 21:44   좋아요 1 | URL
하나님 서재에서 글 읽고 있었어요. 하나님은 반유행열반인님 서재에서 뵀는데 서재에는 오늘 처음 가 봤어요. 진작 가볼 걸 그랬어요.^^ 반갑습니다.

하나 2020-11-04 20:58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저도 반가운 책을 여러 권 이누아님 서재에서 다시 만나서 신나고 있었어요 :) 저녁 운동 다녀와서 또 놀러 올게요! 시집 리뷰들 너무 아름답네요. 저도 덕분에 이 계절에 시집 몇 권 새로 들여야겠어요. 반갑습니다. ^^

이누아 2020-11-04 21:02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님 서재에서 제가 읽은 책을 아직 못 만났어요. 독서량이 많지 않거든요. 모르는 책을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보는 것도 재미있어요. 따라 읽게 되기도 하고. 님의 서재에 들어가니 틈틈이 읽을 글이 많아져 신나요.

하나 2020-11-04 23:20   좋아요 1 | URL
제 서재에서 이누아님께서 같은 책을 못 찾으신 이유는, 제가 그 책들을 읽었던 시간을 묻어둬서 그런 것인데요. 음, 서경식은 옛날에 친했던 친구 y가 알려준 작가인데, 그때는 제가 되게 슬퍼하던 때여가지고 막 그 사람의 슬픔에 제 슬픔을 포개가지고 울면서 보던, ˝당신도 언젠가 (그 미술관에 그 그림을 보러) 가게 될 거야.˝ 라는 말을 어딘가에 옮겨 적던 게 기억났고요. 독서량이 많지 않으시다는 건 지나친 겸손이신 듯합니다. 저야말로 오늘 덕분에 잊고 있던 책들을 만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 여기서 이렇게 읽고 계셔 주셔서 감사드려요.
 

목소리A

_변희수

 

 

바닥에 떨어지면서 컵이 산산조각이 났다

 

배울 점이 있다

빙빙 돌려서 말하려다가 정면으로 부딪힐 때

입술을 열고 반짝이는 게 있다

 

남아서 계속 주의를 요하는 게 있다

컵보다 먼저 손목을, 어리석음을, 날카로움을

긋는다는 것

진심을 다해 무찌른다는 것

 

여기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컵이 있다

용기에 대해서 조각조각 설명해보려다 아악!

부들부들 떨고 있는 손이 있다 수상한 움직임이 있다

부정이 있다 긍정이 있다

 

그러니까 말하려는 바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다그치기도 전에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사라진 컵이 있어서

이 근처는 뾰족하고 위험해 보이지만

 

분명하고 투명하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다른

 

-변희수, 거기서부터 사랑을 시작하겠습니다』(시인동네, 2020)

 

 

한 서재지인의 글을 읽으며 이 시가 생각났다. 다시 깨어나고 있는 것처럼 전과 후가 확연히 달라졌을 사람의 이야기. 몇 번이나 그 서재를 서성이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나왔다. 내게도 할 말이 있어요. 나도 말하고 싶어요. 나는 끝내 말하지 못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담담히 말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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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로 시집을 영 덜 읽는다. 읽어도 건성건성 읽게 된다. 시가 짧아서 바쁠 때 읽기 좋다지만 시집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있을 때라야 시에 집중이 된다. 산문은 아이들과 함께 있어도 읽을 수 있는데 시는 왜 그런지 모르겠다. 그 덕분인지 그 탓인지 산문을 좀 더 읽게 되었다. 2학기에는 전일 등교를 한다는데 그때가 되면 한 번에 한 권의 시집을 읽는 사치를 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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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경사 바틀비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허먼 멜빌 지음, 공진호 옮김,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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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안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편을 택한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못 한다거나 안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안 하는 것을 택하는 것이다. 짧은 소설이다. 안 하는 편을 택하는 사람의 이야기가 긴 글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지친 탓일까. 안 하는 편을 택하는 그가, 떠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그가, 그래서 감옥에 가는 그가, 식사를 하지 않는 편을 택하는 그가, 그래서 죽어 버린 그가, 전혀 불쌍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처럼 "약간 미친 것"처럼 안 하는 편을 택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어느 날 아침, 한 젊은이가 내가 낸 광고를 보고 찾아와 사무실 문턱에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지금도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리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그 모습이! 그가 바틀비였다. - P25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안 하겠다고?"
"안 하는 편을 택한다고요" - P41

"어째서죠? 별나군요. 그렇죠?"
내가 서글피 말했다.
"약간 미친 것 같소."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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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7-30 21: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바틀비, 책을 가지고 있는데, 먼저 오디오북으로 들었어요.
흥미롭게 들었어요. 하지만 우리도 어떤 면에선 그러고 싶을 때가 있는 것 같아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해 보이지만...

이누아 2020-07-30 23:03   좋아요 1 | URL
짧아서 오디오북으로 들어도 좋을 것 같아요. 바틀비가 안돼 보이지 않고 용기 있게 보이는 게 변명이나 핑계 없이 자신의 선택이라는 걸 밝히고 안 하는 편을 선택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또 우리가 뭐든 열심히 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바틀비가 자유롭게 보이는 건 아닐까 생각해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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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가게 사장님이 어떤 책이 재미있냐고 하시기에 이 책을 얘기했다. 앞 쪽에 4페이지나 이 책에 대한 각계의 찬사가 적혀 있어 눈살이 찌푸려졌는데 다 읽고나니 그런 찬사를 받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책에 비유하자면 한 장 한 장의 그림이 배경까지 다 채색된 아름다운 책이다. 꽉 찬 느낌이다. 자연이 배경이 된다는 게 이런 힘이 있나 보다. 관계는 하나의 세계다. 가족이라는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 후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손을 내미는 사람들이 다시 하나의 세계를 연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어떤 세계로 나아갈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는 소녀, 카야가 있다. 책을 읽는 누구라도 그녀의 습지로 빨려들어갈 것이다.

 

 

 

 

남매는 조용히, 그렇게 앉아 있었다. 아무 기억도 하지 않으려 하면서. - P299

엄마는 언제나 습지를 탐험해 보라고 독려하며 말했다.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가 봐. 저 멀리 가재가 노래하는 곳까지." - P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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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0-07-30 06: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연 풍경 묘사가 아름다운 책이죠 ㅎㅎ카야라는 소녀도 정말 특이한 캐릭터였어요. 모글리 미국 버전 같은...그나마 주변에 착한 사람’도’ 있어서 더 나은 쪽으로 살아남는...

이누아 2020-07-30 15:42   좋아요 1 | URL
주변의 착한 사람들 덕분이기도 하고, 카야 자신 때문이기도 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사라진 관계도 여전히 살아서 관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엄마는 사라졌지만 습지를 탐험하라는 엄마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엄마를 기다리기 위해 아궁이를 남겨 두고, 엄마처럼 불행해지지 않으려고 결단을 내리기도 하잖아요. 인간은 어쨌든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건 확실한 것 같아요. 사라진 관계와도 함께할 수 있으니까요. 아무것도 원하는 것 없이 카야를 돕는 사람들이 어둠 속 반딧불이 같았어요.

반유행열반인이 무슨 뜻인지 볼 때마다 궁금했는데... 유행은 떠도는 것? 열반인은 불교적 의미? 혼자 이래저래 생각해봤는데...^^;;

반유행열반인 2020-07-30 17:09   좋아요 1 | URL
카야 자신 때문이라는 말에 뭔가 쿵 하고 가요. 나새끼가 잘해야 해...하는 ㅋㅋㅋ
인간은 혼자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씀도 새겨듣고 갑니다.
반딧불이 나오는 장면 이누아님 말씀 듣고 나니 막 하나둘 불켜지는 느낌처럼 살아나네요.
제 닉네임은...고등학교 때 퀴즈푸는 게임 아이디 그냥 가져다 붙인 게 어쩌다 살아 남았는데...
지금은 없어진 듯한 어떤 브랜드 광고에서 nirvana against the fads- 하는 문구를 보고 오오! 두둥! 하고 제 마음대로 한자?한글 번역해서 지은...중2병 돋는 이름입니다...귀찮아서 안 바꾸고 있어요...너바나니까 확실히 불교적인 거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답이 되었나 모르겠습니다 .ㅋㅋㅋ

이누아 2020-07-30 23:00   좋아요 1 | URL
답이 되었습니다. 제 예상과 살짝 빗나갔네요. 멋진 닉네임이에요. 독특하기도 하고요.

반유행열반인 2020-07-31 06:43   좋아요 1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누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