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돋을 시간, 해가 구름에 가려 얼굴을 내밀지 않자 사람들이 새해 소망을 담아

노란 풍선을 날려 보낸다. 해가 놀라서 구름 위로 얼굴을 내민다.  



새해 행복! 건강과 평안을 기원합니다. 뜻하시는 일, 원만여의하게 이루어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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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7-01-02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달팽이 2007-01-02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는 복지을 일이 많으시길..
그리고 공부 잘 되어지기를..

혜덕화 2007-01-03 0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운대 해맞이 오셨나봐요.
새해엔 좋은 인연, 좋은 일 많이 생기길 바랍니다._()_

2007-01-03 2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7-01-05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 건강을 빕니다. 저뿐 아니라 서재지인들의 공통소망이 아닐까 싶습니다. 님에게 즐거운 일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어요.

달팽이님, 혜덕화님, 그렇지 않아도 부산 하면 님들이 떠오릅니다. 부산에서 님들 생각을 했었어요. 기쁨이 마음 속에서 늘 넘실거리는 한해 되시길 기원합니다.

속삭이신 님, 한꺼번에 두 가지 일을 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 다른 일 겸해서 가긴 어렵고, 님 만나러 갈 수 있으면 갈께요. 3월이라야 될 듯한데 그땐 님이 바쁘시려나? 저도 뵙고 싶어요.

2007-01-10 0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돌바람 2007-01-1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우리 남편한테 찍혔어요. 책 나오는 족족 보낸다고 아예 주소를 가져갔습니다. 왜 이리 웃음이 나오지요. 치유되었나? 지금 평택쌀 먹고 있는데 생일날에는 우렁이쌀 먹으면서 기운 많이 낼게요. 근데, 치유? 책 말씀하시는 거지요? 책은 없던데요. 평온이요^.............^

2007-01-15 1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닐 도날드 월쉬, 조경숙 역, "신과 나눈 이야기", 아름드리미디어.

너는 온갖 것들에 대해서...."죽는 한이 있어도"라고 하는군. 하지만 기왕이면 "살아서 꼭"이라고 하는 게 더 멋지지 않느냐?       -p.13

나는 생각으로도 교류한다. 생각과 느낌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생각으로 교류할 때 나는 자주 영상을 사용한다. 그 때문에 교류 도구란 면에서 생각은 단순한 말보다 효과가 크다.  

느낌과 생각 외에 나는 체험이라는 운송수단을 쓰기도 한다. 체험은 참으로 위대한 전달자이다.  -p.15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 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p.35

두려움은 우리 몸을 옷으로 감싸나, 사랑은 우리가 발가벗고 설 수 있게 해준다.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틀어쥐고 집착하게 하나, 사랑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게 한다. 두려움은 갑갑함을 지니나, 사랑은 정을 지닌다. 두려움은 움켜잡지만, 사랑은 보내준다. 두려움은 사무치게 하지만, 사랑은 달래준다. 두려움은 공격하지만, 사랑은 치유한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에 근거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이란 없기에 너희들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희의 자유다. -pp.38-39

============

"목숨을 걸고"라는 표현을 즐겨 쓸 때가 있었다. 삶은 죽음 같았고, 그래서 목숨을 건다고 해도 여전히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선의로 가득찬 무엇을 본다면...아픈 것은 나쁘게 보이지만 몸이 무언가를 해결하려는 몸부림이다. 몸에게는 어떤 악의도 없다. 악의가 없는데도 생명을 앗아가기도 한다. 선의를 오로지 선의로만 본다면 그때도 앗아감이 있을까? 두려움 때문에 선의를 악의로 돌변시키고 있는 걸까?

나는 언젠가 영상으로 어떤 존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매번 그 영상은 일상적이지 않았다. 일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두려웠다. 아니, 더 정확히는 그것을 보지 않는 많은 사람들 속에 내가 없을까봐 두려웠다.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단 두 가지 감정으로 구분해야 한다면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느낌과 생각을 넘어선 영상과 체험이 있었는데도 두려움 때문에 어두워졌던 게다. 단순화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간단한 것이냐. 복잡한 것은 행위로, 체험으로 드러날 수 없다. 단순한 것은 드러난다. 사랑 아니면 두려움...바로 이 순간. 아주 손쉽게 선택할 수 있게 한다. 이런 기준을 갖는 것은 행운이다.

사랑은 발가벗고 설 수 있게 한다고 한다. 이 구절은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를 생각나게 한다. 그는 그의 아버지 앞에서 발가벗고 섰다. 당신이 내게 준 옷을 당신에게 돌려드립니다. 나는 이제 당신의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했던 그 미치광이 성자를 생각나게 한다. "남의 눈치를 보며 살지 않고 자신의 마음에 충실하게 사는 용기를 모든 사람에게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던 그...그러고보니 그는 "나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아요"라고 했다.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구나.

그러나 마음은 얼른 두려움이 뭔지, 사랑이 뭔지 니가 아느냐고 물으며 이간질을 한다. 아는 것보다 느끼는 쪽을, 느끼는 것보다 체험하는 쪽을 택하겠다고 나는 대답한다. 내가 사랑하는 노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는 성가가 요즘 입에서 흘러나온다. 화두가 일면 "사랑해"라는 말이 같이 인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여전히 모르는데 왜 그 말이 아무 데서나 튀어나올 것만 같은가. 튀어나올까봐 두려워하는가. 마치 "사랑한다"고 말하면 수만 가지 문제가 일어날 것 같은 두려움. 두려움에 지나치게 길들여진 탓일까? 그래서 사랑 앞에서는 못하고, 여기 중얼대는 자리에서 말하는 걸까? 사랑해.

이 말을 하기 위해 이런 변명들이, 혹은 신의 말을 빌어야 했을까. 말은 생각보다 느낌보다 영상보다 체험보다 더 왜곡되기 쉬운 것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글이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애초에 나는 선의와 영상에 대해 말할 참이었다. 그러나 두려움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이고, 덧붙이다 그 이야기로 흐른다. 어디서든 튀어나올 것 같은 그 "사랑해"가 여기서 그냥 튀어나와 버린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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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6-12-2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으니 사랑의 반대말은 두려움이 아닌가 싶네요.

이누아 2006-12-29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으로 하는가, 두려움으로 하는가...일을 할 때 생각해 보게 돼요. 벌써 한 해가 저뭅니다. 건강하세요.
 





고구마야. 싹이 났기에 쓰지 않는 컵에 담아 두었어. 고구마 하나에 한 컵씩 줬어. 두 컵의 고구마가 자라고 있어. 왼쪽 컵의 고구마는 사진에 없어. 나는 이렇게 꽂아만 두는데 엄마는 줄기를 잘라 흙에 심었어. 그랬더니 흙에서 고구마가 달려 나오는 거야. 아주 맛나다고 엄마가 자랑하셨어. 몇 달 전 서재지인이 보내주신 고구마처럼 그렇게 달고 맛있나 봐. 희미해진 기억 속에서 고구마가 웃고 있어. 네 방에도 고구마가 있었지. 어디 위에 올려져 있어서 줄기가 아래로 늘어져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 위에 올려져 있었는지, 어떻게 거기에 꽂혀 있게 된 것인지, 얼마나 자라다 사라졌는지 기억이 안 나. 그렇지만 이 고구마를 보고 있으니 그 고구마가 생각나. 이 고구마는 자는데 깨워서 표정이 좀 없지? 하지만 그 고구마는 웃고 있었어. 웃는 고구마. 생각하니 웃음이 나와. 혹시 너도 웃고 있니? 웃는 고구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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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상처가 있다. 상처가 없는 사람을 나는 아직 알지 못한다. 상처는 낡은 사진처럼 간혹 튀어 나오기도 하고, 그 상처가 삶의 주인처럼 행세하기도 한다. 사진들이 쏟아진다. 하나하나의 사진들은 하나하나의 상처다. 그 사진들이 화산 속으로 들어간다. 열기에 사진들이 금방 녹아버린다. 녹아버리는 사진들...나도 상처가 있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 네게 상처 받았다 라고 말하려는 순간...나는 여지껏 보지 못한 네 상처를 보았다. 그랬구나. 그런데도 나는 줄곧 내가 상처받았다고 여겼구나. 알지 못했구나. 그 사진들이 화산 속으로 들어가자 이제서야 보이는구나. 손을 잡고 네게 미안하다, 고 말했다. 나는 몰랐노라고, 나는 정말 몰랐노라고...내 마음이 네게 전해지고 있을까? 나는 점점 커지고, 나는 점점 커지고 화산은 조그만해진다. 조그만해지는 화산 안에 녹아버린 사진은 이제 보이지도 않는다. 덕지덕지 붙이고 살았던 그 사진들의 누추함이 녹아진다. 사라진다. 눈을 뜨니 너도 없고, 사진도 없고, 화산도 없다. 늦잠을 잔 게다. 밖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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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는 정답이 없다.

                                       -법정스님

삶에는 정답이란 것이 없습니다.

삶에서의 그 어떤 결정이라도

심지어 참으로 잘한 결정이거나 너무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정답이 될 수 있고, 오답이 될 수 있는 거지요.

참이 될 수도 있고, 거짓이 될 수도 있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정답을 찾아 끊임없이 헤메고 다니는 것이
습(習)이 되어 버렸습니다.

정답이 없다는 것은 다시 말하면 모두가 정답이 될 수도 있고
모두가 오답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지나온 삶을 돌이켜 후회를 한다는 것은
지난 삶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정답이 아니었다고 분별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정확히 내 자리가 맞습니다.

결혼을 누구와 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것이며,
대학을 어디에 갈까에 무슨 정답이 있겠고,

어느 직장에 취직할까에 무슨 정답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때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그 때 그 대학에 입학했더라면
그 때 또 그 때 ..한 없이 삶의 오답을 찾아내려 하지 마세요.

정답, 오답 하고 나누는 것이
그 분별이 괴로움을 몰고 오는 것이지
우리 삶에는 그런 구분이란 애초부터 없다는 것을 알아야지요.

어느 길이든 정답 오답 나누어 정답인 것이 아니라,
그냥 그냥 다 받아들이면 그대로 정답인 것입니다.

정답 아닌 정답이며, 오답 아닌 오답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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