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몬
평소보다 답답하고 쉽게 화가 날 때가 있어. 별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짜증스럽지, 싶다가도 달거리를 하면 거짓말처럼 번잡함이 사라져. 월경전 증후군이었던 거야. 아주 조금의 호르몬으로도 평소의 나에게서 멀어질 수 있어. 사춘기가 그랬듯이 갱년기도 그렇게 오겠지. 몸의 변화가 마음의 변화를 얼마나 쉽게 가져오는지. 반대의 경우도 있어.
특별한 경우이긴 하지만 트랜스젠더는 몸과 마음의 성별이 맞지 않은 상태에 있잖아. 몸을 바꾸기 위해 호르몬 주사를 맞아. 여자에서 남자로 전환중인 분이 호르몬제를 맞으니까 성욕이 5배는 증가한 것 같다고 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어. 의지와 상관없이 호르몬의 영향으로 그렇게 되나 봐. 마음에 맞추려고 호르몬으로 몸을 바꾸는 중이지만 호르몬이 다시 마음에 영향을 줘. 마음이 몸을, 몸이 마음을, 다시 마음이 몸을...
유전자와 호르몬 속에서 그것에 완전히 압도당하지 않으려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마음을 돌아보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해.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려고 매일 균형 잡기 연습을 하며 살아가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번번이 실패를 경험해. 내 몸속에 얼마나 많은 호르몬들이 출렁대는지 나도 모르게 나를 움직일 때가 있지. 그래서 내가 한 건지 호르몬이 한 건지......나쁘지 않아. 내가 나라고 믿는 나와 조건에 의해 흔들리는 내가 다 나라는 것이, 어쩌면 내가 아니라는 것이.
호르몬그래피
_김행숙
호르몬이여, 저를 아침처럼 환하게 밝혀주세요.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태풍의 눈같이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 자가 제게 사기를 쳤습니다. 저 자를 끝까지 쫓겠습니다.
당신에게 젖줄을 대고 흘러온 저는 소양강 낙동강입니다. 노 없는 뱃사공입니다. 어느 곳에 닿아도 당신이 남자로서 부르면 저는 남자로서
당신이 여자로서 부르면 저는 여자로서 몰입하겠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세번째, 네번째, 일곱번째 사다리에서 거지가 될 때까지 카드를 만지겠습니다. 녹초가 되게 하세요. 호르몬이여, 당신의 부드러운 손길로 눈꺼풀을 내리시고
제 꿈을 휘저으세요. 당신의 영화관이 되겠습니다. 검은 스크린이 될 때까지 호르몬이여, 저 높은 파도로 표정과 풍경을 섞으세요. 전쟁같이 무의미에 도달하도록
신성한 호르몬의 샘에서 영원히 반짝이는 신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