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가족

 

 

어제는 네게 이야기를 하려고 앉았는데 친구에게 전화가 왔어. 친정엄마를 요양원에 보내는 문제로 힘들어하면서. 나는 그 친구 집에서 1년 가까이 살았어. 그 어머니가 해주신 밥도 얻어먹고, 함께 고스톱도 치고.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친구도 힘든 상황이야. 전화를 받을 때는 담담하게 받았는데 끊고 나니 친구가 쏟았던 눈물이 내 귓속에 흥건히 고여 있어.

 

친구 어머니와 나눴던 이야기며, 고생하신 모습이며 다 떠올라서 마음이 안 좋아. 그렇지만 기슭아, 나는 가족이 아니니까 그냥 마음만 아프면 그만이야. 가족과 가족 아닌 사람의 거리가 얼마만큼인지 알아? 누군가 슬프면 함께 슬퍼하지만 나는 가족이 아니니까 그의 복잡하고 무거운 심경과 어떻게든 일을 해내야 하는 상황을 지켜볼 뿐이야.

 

차곡차곡 쌓였거나 어떤 시기에 멈춰 있는 가족 간의 상처와 사랑이 뒤엉겨 하나하나 풀려고 하면 이상하게 더 엉겨버리기도 해. 오래 앓는 가족이 있으면 마음은 더 복잡해져. 아플 때도 떠나보낸 뒤에도 그 가족을 떠올리면 슬픔과 후회와 죄책감 같은 게 배경처럼 깔려 있어. 친구도 이 과정을 다 겪게 될까?

 

외할머니가 심장에 병이 있어 늘 아프셨대. 엄마는 외할머니께 아프다는 말을 많이 들어서 아파도 우리에게 그 말을 안 하려고 애쓰셨대. 사랑하는 이의 짐이 되고 싶지 않은 건 다 같은 마음일 텐데 자기 자신을 돌볼 수 없을 때 얼마나 난감할까?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다 우리 이야기가 될 테지만.

 

 

 

낙엽

_최영미

 

 

아스팔트 위에 먼지처럼

왔다 가는 인생들.

 

낙엽만이 위안이다

 

반지하 셋방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서러운 현재를 덮고

어머니의 도저히 갚지 못할 해묵은 빚도 파묻고

나의 알량한 죄의식도 바람에 날려 보내고

 

오래 참은 눈물처럼 쏟아지는 낙엽

 

유행가를 들으며

내 손에서 부드럽게 구겨지는 너.

여름은 사랑의 계절......

여름은 젊음의 계절......

내게도 여름이 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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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7 1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7 1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음이 녹았다

 

 

어제 아이들이 얼음을 깨던 그 계곡에 다녀왔어. 아이들은 다시 얼음 깨기를 하고 싶어 계곡을 따라 올랐지만 얼음은 어디에도 없었어. 저 물 속에 있을까? 녹아서 벌써 저 아래로 흘러갔을까? 풀잎에 앉은 이슬을 하나하나 닦지 않아도 해가 뜨면 일시에 다 사라지듯 봄이 온다고 얼음은 이슬처럼 다 사라지고 없어.

 

날씨가 무척 따뜻해서 모두 외투를 벗었어. 마치 여름처럼 아이들은 바지를 걷고 물에 들어갔어. 아이들은 비치볼을 들고 와서 물에서 공받기 놀이를 했어. 발이 빨갛게 차가워졌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았지. 아직 산엔 꽃도 없는데 봄이 먼저 온 듯이 한참을 계곡에 있었어.

 

애들이 정말 잘 놀아서 시골집에 가서 뜨거운 물과 컵라면을 들고 와 거기서 먹었어. 그런 곳에서 먹는 건 다 꿀맛이지. 나도 계곡에 늘어지게 앉아서 햇살과 바람과 나무와 물소리와 아이들 웃음을 잔뜩 먹었어.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어제 먹은 웃음으로 배부를 줄 알았더니 어제 먹은 것은 어제 먹은 것이요, 오늘은 다시 배가 고픈 건지. 아침에 아이에게 얼굴을 찌푸렸어. 그래, 나는 화날 만해. 화낼 만하다고, 걸레질을 하며 나를 합리화했지만 아무래도 몸이 피곤해서 짜증이 더 묻어난 것 같아 후회했어. 사과를 해야 하나 고민 중인데 아이는 어제 찔린 가시를 아직 못 뺐다고 끙끙. 둘이 머리를 맞대고 가시 뽑는 데 집중했더니 하던 생각 다 잊고, 뽑았다! 기쁨에 다시 알콩달콩.

 

이번 주가 아이들 방학 마지막 주야. 분노와 기쁨이 혼재된 이 어지러운 생활이 끝나긴 끝나겠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듯,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듯, 아이들도 전혀 다른 모습으로 커 가겠지. 내가 계절에 맞춰 옷을 입고, 날씨에 맞춰 일정을 잡듯 아이들이 자라는 계절에 잘 적응하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어. 우선 오는 봄부터 잘 맞이해야지.

 

 

 

_오규원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 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앉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 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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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암에 걸린 사람이 매일 법화경을 베껴 써서 병을 이겨냈다는 기사를 보고 놀란 적이 있어. 사경을 헤맬 것 같은 사람이 어떻게 사경을 했을까? 나는 큰병에 걸린 것도 아닌데 너무 피곤해. 나도 필사적으로 필사하면 건강해질 수 있을까?

    

침대에 누워 시집을 펼치다 말고 읽는 것도 힘겨워, 가만히 있으니 잠이 들어. 잠 속으로 꿈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펼쳐져. 조각난 장면들. 바위를 드는데 공처럼 가벼워. 바위를 풍선처럼 타고 올라가. 구름을 툭 치자 비가 쏟아지네. 지렁이 한 마리 춤을 춰. 이렇게 높이 떠올랐는데 지렁이는 왜 이리 크게 보이지? 꿈틀꿈틀 지렁이를 보다 눈을 떠.

 

일어나 창을 보고 있어. 하늘에 구름이 꽉 끼었어. 그 구름 속에서 해가 희미하게 비치네.

 

 

 

내가 느끼는 것은 특히 피곤함이다. 그리고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피곤함을 느끼는 다른 이유가 없을 때, 그것의 쌍둥이 격인 불안을 느낀다.-페르난도 페소아, 불안의 책(까치, 2014), p.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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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22 17: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2-22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19-02-22 1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곤함...그것에 쌍둥이 격인 불안 ..우아!! 저도 옮겨 주신 부분 필사를... 하면 피곤과 불안이 물러나 줄지 ㅎ

이누아 2019-02-22 17:57   좋아요 0 | URL
자다 일어나 저녁 준비하고 앉았어요. 오늘은 아이들이 내내 밖에서 노네요. 해가 지는데 안 들어오네요. 그런데 우리, 필사가 아니라 적당한 운동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기

 

 

언니의 아들이, 그러니까 내 조카가 아기를 낳았어. 칭얼칭얼 아기가 울고, 똥오줌을 싸. 어른들은 어쩔 줄 모르고 아기를 어르고, 기저귀를 갈다가도 아기가 한 번 웃으면 모두가 까르르.

 

아기는 태양이야. 아기의 몸은 햇살로 가득 차 있어. 펄떡이는 심장, 빠르게 뛰는 데도 헉헉거림은 없어. 집안을 다 불태울 듯 울다가도 엄마가 젖을 내밀면 밤의 별처럼 고요해져. 눈을 깜빡일 때마다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아. 그 빛에 매료되지 않는 사람들은 눈먼 사람뿐일 거야. 태양신의 신도처럼 우리는 아기의 몸짓을 따라 다니지. 아기가 있는 곳은 환해서 아무것도 숨길 수 없는 곳이 돼.

 

아기가 아이가 되고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될 때까지 빛은 마르지 않지. 밝기가 약해질 뿐. 그러나 요양원에 누워 겨우 눈뜬 노인이 되면 이제 자신의 태양이 빛을 다 소진해가고 있다는 걸 알아. 풀무질을 해서라도 불씨를 살려보려 하지만 의사의 풀무질은 손을 휘젓는 정도일 뿐이지. 빛은 기억 속에서만 불타오르지. 텅 빈 자리에 고요가 내리길.

 

다 타고 남은 재가 풀풀 날려. 쌓여있는 먼지는 닦아내거나 창을 열어 날려 보낼 뿐 잡을 수는 없어. 잡을 수 없는 먼지처럼 우리의 삶도 우리의 것이 아닌 때가 오지. 사랑하는 이의 머릿속에 햇살이 비치면 우리 존재가 잠시 일어났다 스러질 순 있겠지.

 

우리는 모두 한때는 아기여서, 무조건적인 사랑 속에 있었던 적이 있어서, 아기로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어. 연인들은 모두 아기가 돼. 서로를 베이비로 부르며, 아무 일도 아닌 일에 환하게 웃지. 우리 속에 있는 아기의 빛을 깨우지. 우리는 모두 얼마간은 아기지. 우리 안에 그 빛이 있는 동안.

      

눈을 동그랗게 뜨고 궁금한 듯 주위를 살피던 아기의 얼굴이 눈에 어른거려.

사랑스러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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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unwoo 2019-03-1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랑스런 시 한 편입니다.
 

낮이 닫히고

 

 

해가 지고 있어. 문 닫기 전 도서관에서 흐르는 음악처럼 노을을 먼저 울리며 낮의 문이 닫히고 있어. 어두워지기 전엔 사물이 더 진하게 보여. 나뭇가지를 봐. 더 검고 뚜렷해. 조금 더 어두워지면 나무는 나무의 시간을 가지겠지.

 

하루 종일 공을 쫓던 아이들은 저녁이 너무 빨리 왔다고 투덜거리고, 반찬거리를 걱정하는 사람과 퇴근길 정체를 염려하는 사람이 모여 앉아 뉴스를 보겠지. 뉴스 속에는 낮이 끝나지 않은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서성대겠지.

 

밤은 조급하지 않아. 느릿느릿 거대한 그림자처럼 와. 일은 끝났고, 식사도 마쳤으니까. 잠들 수 없는 사람만이 실핏줄 터진 눈을 껌뻑일 뿐 모두들 어둠을 덮고 하루를 마치겠지. 기슭아, 어둠 속에서 더 잘 보이는 게 뭔지 알아? 자기 자신이야. 어둠 속에서는 숨을 곳이 없어. 자기 스스로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텔레비전과 컴퓨터와 휴대폰과 책 속으로 빛을 찾아 헤매겠지.

 

압력밥솥이 칙칙 소리를 내고 있어. 노을 음악은 끝나고 이제 정말 저녁이야. 곧 저녁은 저 녘으로 가고 밤이 오겠지. 나날이 오던 대로, 그러나 늘 똑같지는 않게. 

 

 

 

 

하루

_장하빈

 

 

 

 

밥숟가락 들었다 놓는 사이

하루가 지나갔다

하얗게 피어난 밥 한 공기

시래깃국 말아 후루룩 넘기는

아침상 물리자마자

쪽문으로 들어온 이웃집 멍멍이

개똥 차반 차려놓고 가는

따뜻한 저녁 맞는다

식탁 귀에 놓인 앉은뱅이달력

당기면 하루가 오고

밀치면 하루가 갔다

허공의 까치밥 쳐다보는 사이

한 생이 지나갔다

 

-장하빈, 까치 낙관(시학,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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